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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 Jun 12. 2017

졸업

아들의 고교 그리고 나의 기러기 졸업

서울에서 근무하던 내가 갑자기 해외 주재원으로 발령이 난 건 2004년 여름이었다. 당시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은 느닷없이 나를 따라 이주했고 국제학교로 전학을 했다. 생소한 해외생활에 적응하기 힘들기는 가족 모두 마찬가지였다. 해외 법인을 처음 설립한 회사는 우왕좌왕했고 나는 회사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격무에 시달렸다. 우리말로 처리하기에도 벅찬 업무를 한국어 영어 베트남어 등 소통 가능한 언어를 닥치는 대로 서툴게 구사하며 업무를 쳐냈다. 업무는 밤을 새워 일을 해도 끝이 없었고 책상에 서류는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영어로만 공부를 해야 하는 아이들은 어땠을까. 어느 날 아이가 학교에서 숙제를 들고 와서는 내게 물었다. 더듬더듬 사전을 찾아가며 문제를 읽고 비슷한 답을 풀어줬다. 그 숙제를 들고 갔던 아이는 이후 내게 다시는 학교 과제에 대해 묻지 않았다. 묻지 않은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어설프게 풀어줬던 숙제는 거의 오답 투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회사에서 아이들은 학교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업무와 공부에 지쳐갔다. 아이들이 아버지의 업무를 모르는 건 당연하겠지만, 나 역시 아이들의 학업에 무관심했다.


나는 5년의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국내로 복귀했다. 큰아이는 그로부터 3년 후 졸업을 하고 국내 대학에 진학을 했고, 작은아이는 이번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산 건, 오로지 아이들의 학업을 위한 일이었다. 떨어져 살아가는 가족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 시선이 불편했고 나와 가족들은 고독했다. 그 결정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 채로 세월이 흘렀다. 가족의 이산은 외롭고 쓸쓸한 데다 경제적 부담 또한 적지 않았다.


큰아이는 맏이라는 이유로 기대와 자립이 강요됐고, 상처와 인내를 감내하며 성장했다. 어려서 큰 병치레를 했던 작은아이는 별 기대 없이 학업을 무난히 마치기만을 바랬다. 다행이라면 두 아이 모두 큰 굴곡 없이 사춘기를 보냈고(적어도 부모 입장에서 보기에는) 소위 사고를 치는 일도 없었으며 비교적 건강했다. 가족의 일원 중에 가장 나약했던 건 어쩌면 나였는지도 모른다. 때때로 수시로 힘들다고 외롭다며 말이나 글로 주변에 징징댔으니 말이다.


큰아이는 어려서 한국을 떠난 탓에 깊은 친구 하나 없이, 외려 해외나 마찬가지인 서울에서의 대학생활에 적응해 갔다. 공부하기 싫으면 한국학교로 가서 졸업만 하라는 아빠의 겁박(?)을 받던 작은 아이는 의외의 성적으로 졸업을 했다. IB DIPLOMA 전과목 만점으로 DUX AWARD를 수상하며 전교 수석으로 졸업식 메인이벤트의 주인공이 됐다. 이삿짐을 싸기 위해 짬을 내서 날아갔다가 참석한 졸업식에서 아들의 성적 최우수상 수상은, 그간의 기러기 생활을 보상받는 듯했다.



야구에서 챔피언 경험을 해 본 팀이 다시 우승을 할 줄 안다고 한다. 공부나 인생에서도 다르지 않으리라. 각국에서 모인 학생들 가운데 First Place에 위치해 본 경험이 앞으로의 인생에 자신감과 용기를 잃지 않는 기회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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