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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 Jul 03. 2017

미술관 가는 길

블라맹크展을 보고


일요일 이른 아침의 장례식장은 적막했다. 십자가가 놓인 영정 앞에서 절을 해야 할지 기도를 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다 절을 두 번 올렸다. 육개장에 밥을 말아 홍어회 무침과 명태찜을 집어 먹었다. 사돈이자 거래처 임원의 빙모상인지라 상제와 마주 앉아 길게 얘기할 처지가 아니었다. 돌아가신 분의 연세를 묻고 장지가 어딘지를 묻고 삼우제는 지내시고 회사로 복귀할 건지를 물었다. '난 사위인데 뭘' 하던 사돈은 슬퍼 보이지 않았다. 느닷없이 오던 길에 고속도로에 전복되어 있던 차량의 운전자는 무사한지가 궁금했다. 장례식장에서 나오는 길에 장맛비가 쏟아져서 옷이 흠뻑 젖었다. 





어제 죽은 사람에게 예를 올리고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 남긴 그림을 보러 갔다. 모리드 드 블라맹크의 그림은 전시장의 첫 작품부터 벽으로부터 튀어나와 내게로 돌진한다. 덧대 바른 유화물감은 투박하지만 섬세하다. 블라맹크는 그가 살던 프랑스 지방의 거리를 주로 그렸다. 한 세기 전 소도시의 건물들은 음울하며 화려하다. 벽돌로 지어져 단단해 보이는 건물과 급한 경사의 지붕들 그리고 자작나무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 눈 쌓이 산과 나무들. 마차 자국이 거칠게 남은 골목길. 두툼한 외투를 입고 을씨년스럽게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흐린 하늘과 먹구름. 일출인지 일몰인지 모를 먼 바다의 오렌지 빛 여명과 무거운 파도. 붓질의 대상들은 개별로 화폭에 존재했으나 군집했다. 





블라맹크는 대상을 깊고 오래 생각했으나 빠르게 화폭에 옮겼다. 그림을 그린 후에는 다시 완성된 자신의 작품에 침잠했다. 유화 물감을 캔버스에 바른 담벼락의 질감은 그 어떤 소재로도 재현하지 못한다. 사진이나 프린트 또는 첨단 디스플레이 장비로도 원화의 감동에는 일 할도 미치지 못한다. 전시의 슬로건이 '왜 유화를 원화로 보아야 하는지'인가는 원화를 보면 비로소 알 수 있다. 블라맹크의 붓질은 거친 질감은 물론이며 색감의 표현에서 관람객을 압도한다. 적갈색과 장단색이 어우러진 담벼락과 설백색과 다자색의 지붕들. 자황색과 하엽색에 청록색이 조화로운 숲과 나무들. 블라맹크의 어떤 작품 앞에서도 쉽게 다음 작품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어렵다. 나는 몰입한다.





전시장 서너 곳에는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간이 의자를 마련해 놓았다. 나는 어떤 전시든 작품에서 멀리 떨어져 한눈에 여러 작품을 담기를 즐겨한다. 전시장 한가운데 놓인 간이 의자에 앉으면 몰입했던 시야가 넓어진다. 블라맹크의 그림들이 회색의 전시장 벽면으로부터 부상한다. 훌륭한 그림을 보면 늘 그렇듯, 작품 하나를 떼어내 내 집에 걸고 싶다. 대가의 그림을 보면 구매욕보다는 탈취욕이 생긴다. 내가 평생을 단 한 푼 쓰지 않고 모아도 살 수 없는 그림의 가격 때문임은 물론이다. 그러기엔 미술관은 보안설비가 너무 잘돼 있을 테다.





블라맹크는 그림은 물론 글쓰기에도 능했다. 수많은 그림을 그렸고 그보다 더 많은 활자를 남겼다. 블라맹크가 화가로서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지만 마티스나 고흐 또는 폴 세잔 등의 화가보다 덜 알려진 건 왜일까. 전시를 같이 본 아내는 다른 화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블라맹크만의 독특한 화풍을 남기지 못해서일 거라고 말했다. 나는 블라맹크가 그림 외에 글쓰기 등 다른 분야에서도 재능을 발휘했기에 그림에 집중하지 못해서일 거라 생각했다. 잡기를 즐기는 내가 뭐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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