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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 Aug 06. 2017

어머니의 쓰임

최고령 요양보호사 합격

1942년생 그러니까 올해 연세가 일흔여섯 되신 어머니가 요양보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어머니는 이번 시험의 응시생 중에서 최고령 합격자일테다. 어머니가 요양보호사 시험에 도전한 건 아버지의 병환 때문이다. 지난해 가을부터 대장암과 뇌졸중 등으로 수술과 입퇴원을 반복했던 아버지는 약간의 치매 증세마저 보이기 시작했다. 평생 경제활동을 해왔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병수발을 위해 일을 그만두어야만 했다. 요양인을 두면 어머니가 바깥일을 할 수 있을 테지만 까다로운 아버지는 낯선 이가 집안에 머무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꼼짝없이 집안에 갇혀 지내게 된 어머니에게는 아버지를 돌보면서 부수입까지 챙길 수 있으니 자격증 취득은 일석이조인 셈이었다. 어머니는 총 280 시간 동안의 이론과 실기 교육을 거쳐 응시자격을 갖췄다. 가끔 본가를 방문하면 거실 밥상 위에 두툼한 문제집이 펼쳐져 있었다. 일흔이 훌쩍 넘은 연세인지라 운전면허 시험도 어려울 텐데 어느 정도 전문성이 요구되는 요양보호사라니, 그저 응시 경험만으로도 좋겠다고 내심 생각했지만 결과는 합격이었다.


어머니는 경기도 송탄의 농가에서 10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일대에 상당한 규모의 논과 밭을 보유한 데다가 슬하에 7남 3녀를 두었으니 재산이나 자식 농사에 모두 성공한 부농이었다. 외할아버지는 공부를 잘하는 아들은 서울로 유학을 보내 대학 공부를 시켰고, 공부가 부족한 아들에게는 전답을 물려주어 농사를 짓게 했다. 그러나 외가는 봉건적이어시 딸들에게는 공부를 시키지도 않았고 재산을 물려주지도 않았다. 외할아버지는 자신의 둘째 딸인 내 어머니에게는 국민학교만 간신히 졸업시킨 후 농사일과 집안일을 시키다가는 나이가 차자 중매를 통해 용인의 아버지에게 시집을 보냈다. 딸에게는 그걸로 그만이었다.


가난한 아버지와 결혼한 어머니는 당신의 하나뿐인 아들의 교육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억척스레 일을 했다. 어린 나를 키우기 위해 국민학교에 갓 입학한 아들을 홀로 남겨두고 젊은 어머니는 돈을 벌러 다녔다. 일간 학습지를 돌리다가 요구르트를 돌렸고 집에서는 틈틈이 봉투를 붙이거나 완구용 구슬을 꿰맸다. 구멍가게를 열어 몇 년 운영하다가는 벌이가 시원치 않자 보험회사에 다녔고 연세가 들어 마땅한 일이 없자 강남의 아파트를 전전하며 파출부 일을 했다. 아들인 내가 이젠 그만 쉬시라며 말렸지만, 아버지랑 단둘이 집에만 있으면 답답하다며 한사코 집을 나섰다. 하지만 나는 안다. 어머니가 돈벌이에 나서는 건 평생 몸에 밴 습관이자 자식에게 부담을 주기 싫은 어떤 의무감 때문이라는 걸.



어머니의 합격 소식은 나도 아내도 몰랐다. 어머니가 홀로 시험을 준비하고 응시하고 합격하는 동안 우리는 아들의 대입에 온전히 매달려있었다. 아들이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거나 홍콩과 싱가포르의 국립대학에 복수로 합격을 하거나 IB Diploma에서 세게 상위 1%에 드는 성적을 내거나, 대학에 다니는 딸이 이번 학기에도 좋은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호들갑스럽게 알릴 때마다, 어머니는 손자 손녀의 성취를 진심으로 기뻐했다. 하지만 정작 당신 평생 처음이자 고령에 접한 영광스러운 합격소식은 아들 일행이 오랜만에 본가를 찾았을 때에야 비로소 전했다.


어머니는 어려서는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농사일과 집안일에 일꾼처럼 쓰였고, 결혼 후에는 주부로 가사노동에 쓰였으며, 아이를 낳고 난 후에는 보육과 생계를 위한 돈벌이에 쓰였다. 당신 최초의 도전이자 성취이며 잠재된 능력은 남편의 병수발을 위해 쓰인 셈이다. 이제 어머니의 남은 시간이 당신 스스로를 위해 쓰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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