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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 Aug 31. 2018

늦은 비 내리는 날

길 떠나는 아들에게

며칠째 비가 내린다. 이사하던 날에도 비가 왔지만 이삿짐을 올리고 내리는 시간만은 비를 피했다. 한 달 남짓 짧은 여름방학을 한국에서 보낸 아들이 좀 전에 구미를 떠났다. 아들이 떠나는 아침에도 비가 내린다. 몇 년 전부터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은 드물었다. 가족들을 베트남에 두고 나만 한국에 들어왔고, 얼마 후 딸은 대학에 진학하며 서울로 갔다. 뒤이어 아내가 한국에 들어왔지만 아들은 홍콩의 대학으로 진학했다. 그때부터 노부부 같은 아내와 나, 둘만의 생활이 시작됐다.


가족이 모두 모이는 일은 오랜만이었기에 남해의 섬으로 여행을 계획했다. 하지만 각자의 스케줄이 다르고 날씨마저 도와주지 않아 결국 무산됐다. 딸은 라섹 수술로 병원에 다녀야 했고, 아들은 서울에서 베트남 시절의 중고교 동문들과 조우하느라 바빴다. 그 와중에 구미 집의 이사가 겹쳤고, 어렵게 여행을 잡은 날에는 태풍이 내륙을 관통했다. 우리 가족은 거실에 둘러앉아 맥주나 와인잔을 함께 기울이는 시간에 만족해야 했다.


부모를 닮았는지 성인이 된 아들과 딸은 제법 술을 즐겼다. 취기가 오르자 아이들은 말수가 많아졌다. 졸업을 앞두고 심리학 대학원을 준비 중인 딸과 물리학과 1 학년을 마친 아들의 대화는 흥미로웠다. 각각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전공하는 아이들은 사물을 보는 눈과 세상을 보는 시각이 판이하게 달랐다. 가령 밤하늘의 별을 보며 딸은 감수성을 나타내며 문학적이며 심리적으로 묘사했고, 아들은 천체물리학의 관점으로 건조하게 표현했다. 더 나아가 각자의 전공 용어를 섞어가며 주제를 심화시켰다. 둘 다 미술계열을 전공한 아내와 나는 그때부터 대화에 끼어들기 어려웠다.


잡아놓은 날짜는 빨리 다가오는 법이라더니 어느새 아들이 한국을 떠나야 하는 날이 다가왔다. 아내는 아들이 입을 옷이며 먹거리를 하나라도 더 챙겨 보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아들은 뭐든 가져가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아내는 서운해했고, 나는 아이가 이미 유학생활에 적응했노라 짐작하며 안도했다.


이른 아침, 구미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공항버스를 기다리는 잠깐 동안 아들에게 몇 가지 당부를 했다. 어눌한 내 말이 잘 전달됐는지 모르겠지만 하고 싶은 말은 이러했다. 아들아. 멀리 넓게 바라보고 목표와 계획을 세워 차분히 준비해라. 그러하되 먼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말아라. 시간을 내서 가깝고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라. 독서와 여행은 자연과학자에게도 꼭 필요한 인문학적 소양을 길러줄 테다. 잘 챙겨 먹고 운동을 게을리하지 말아라. 자신의 몸을 소중히 아껴서 체력과 건강을 지켜라. 깊은 벗을 사귀고 많은 대화를 나누어라. 좋은 여자아이를 만나 아름다운 연애를 했으면 좋겠구나. 현지인들의 생활과 문화 또한 배우고 익혀라. 그곳 화가들의 그림을 보고 건축을 감상해라. 여행지가 아닌 로컬 음식을 찾아 맛보거라.


나열하다 보니 결국은 나이 든 부모의 잔소리에 불과한가 보다. 다른 말들은 잊더라도 다시 만날 때까지 무엇보다 건강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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