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서 <번역의 정석>을 읽고
오랫동안 누구나 옳다고 믿어왔던 상식이 뒤집히는 순간은 통렬하다. 갈릴레오가 천동설을 지동설로 뒤엎던 장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정서의 번역 이론이 그러하다. 그 비판의 대상이 우리 문학과 번역의 대가로 손꼽히는 김욱동 이인규 이종인 황현산 김영하 등의 유명 작가들이라면 더욱 놀랍다.
이정서의 번역 원칙은 단순하다. 원작자가 쓴 서술 구조대로 부사나 형용사, 접속사나 대명사 또한 가능한 그대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전 작품일수록 그 원칙은 더욱 철저히 적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더욱이 소설의 문장은 작가가 고뇌하고 다듬어서 견고하게 고리를 짓고 있으므로, 번역자가 원저자의 문장을 '의역'해서는 안되며 쉼표 하나 마침표 하나까지 가능한 원작 그대로 살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정서가 여러 작품의 번역 오류를 지적한 지점은 너무도 많다. 그중 오역과 표절을 함께 지적한 대표적인 사례를 보자.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해서 가장 많이 팔린 두 종의 책, 김욱동(민음사)와 김영하(문학동네)의 경우다.
The only picture was an over-enlarged photograph, apparently a hen sitting on a blurred rock. Looked at from a distance, however, the hen resolved itself into a bonnet, and the countenance of a stout old lady beamed down into the room.
위 원문을 김욱동은 이렇게 번역했다.
벽에는 희미한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수탉을 지나치게 확대한 사진 한 장이 달랑 걸려 있었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서 보면 수탉은 부인용 모자처럼 보였고, 살찐 노부인의 얼굴이 방 안을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김영하의 번역은 이러하다.
벽에는 바위에 앉아 있는 수탉을 지나치게 확대한 사진 하나가 달랑 걸려 있었다. 멀리서 보면 수탉은 여자들이 쓰는 끈 달린 모자처럼 보였고, 그래서인지 살찐 노부인의 얼굴이 방안을 내려다보며 빙긋이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김욱동과 김영하의 번역은 '수탉'이라는 것인데, 원문은 사실 '살찐 노부인의 얼굴'을 묘사하였다고 이정서는 주장한다.
이정서의 번역은 이렇다.
유일한 벽 그림은 과도히 확대된 사진으로, 암탉이 흐릿한 바위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멀리서 보니, 암탉이 보닛 모자로 좁혀졌고, 뚱뚱한 할머니의 얼굴이 방 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정서의 번역이 옳다면 김욱동은 'hen(암탉)'을 수탉으로 잘못 번역했고, '노부인'에 대한 묘사를 '닭'의 묘사로 오역한 것이다. 더구나 김영하는 김욱동의 번역을 베낀 셈이 된다. 설마 불문학 박사인 저명한 번역가와 '알쓸신잡'에도 출연한 유명한 소설가가 저런 기초적인 실수를 했을까?
나는 앞뒤 설명을 생략한 채, 대학생인 아들과 딸에게 위 문장의 번역을 요청했다. 두 아이에게 영어 원문을 휴대폰으로 촬영하여 각각 카톡으로 보냈다. 잠시 후 답이 왔다.
먼저 딸의 번역이 왔다.
유일한 사진은 확대된 사진이었는데 흐릿한 바위 위에 앉아있는 암탉인 것이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멀리서 보면 암탉은 보닛으로 보였다. 그리고 통통한 노부인의 얼굴이 방 안을 보고 활짝 웃고 있었다.
뒤이어 아들의 번역이 도착했다.
유일한 사진이라고는 지나치게 확대돼 흐릿한 바위에 앉은 암탉을 찍은 듯한 사진이었다. 그러나 멀리서 보자 암탉은 보닛이 되었고, 통통한 노파의 모습이 방 안으로 내리쬈다.
두 아이 모두 'beamed down into the room'이란 생소한 표현의 번역에 다소 어려움을 겪었을 뿐. 이정서의 번역과 내용면에서 동일하다. hen을 암탉으로 번역한 것은 물론이고, 묘사의 주체를 닭이 아닌 노부인으로 파악했다.
저명한 작가들은 왜 이런 번역의 기본을 지키지 못했을까. 이정서의 번역이 옳다면, 답은 뻔하다. 기성 번역가들이 게으르거나 실력이 부족하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다.
이정서는 <위대한 개츠비>에서 각 캐릭터의 특징에 대한 잘못된 번역을 지적했으며, 까뮈의 <이방인>에서는 뫼르소의 아랍인 살해를 정당방위로 보는 번역이 올바르다고 주장한다. <어린 왕자>에서는 우리와 같은 존댓말 구조를 가진 불어 표현을 반말로 오역했으며, <노인과 바다>에서는 '늙은 어부가 불굴의 의지로 물고기를 잡는'것이 주제가 아닌, 오히려 '자연에게 패배하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 주는' 작품으로 해석해야 옳다고 말한다.
나는 불어는 물론 영어 역시 편하게 읽고 쓰지 못하지만, 우리말은 누구 못지않은 독해력을 가졌다고 자부한다. 이정서에 대한 언론과 출판계의 비난과 작가의 반박 글을 모두 읽어 봤을 때, 이정서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으며 공감된다. 다만, 저자가 SNS 상에서의 공방을 거의 그대로 책으로 가져와 한풀이하듯 반복하는 점은 다소 불편해 보인다. 그 보다는 위와 같은 오역의 사례를 좀 더 다양하게 제시하는 일에 지면을 할애 함이 좋지 않았을까.
이정서를 비판하는 쪽에서는 그가 출판사 대표라는 신분을 숨기고 필명을 사용했다거나, 책 판매를 위한 노이즈 마케팅을 했다는 비난을 한다. 어쩌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날카롭거나 까칠한 이정서의 문체가 그런 반응을 부추겼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그가 본명을 쓰던 필명을 사용하던 관심 없다. 노이즈 마케팅으로 판매 부수를 늘렸다면, 상업 출판사의 마케팅 전략이므로 손가락질할 일이 아니다. 오직 내가 읽는 책이 원작자의 작품 의도에 맞게 충실히 번역되었는가가 중요하다. 다소 까칠한 이정서로 인해 우리 번역 출판이 한 단계 올라서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정서의 <번역의 정석>으로 인해 오래전 읽은 후 묵혀 두었던 <이방인>과 <뫼르소, 살인 사건>을 다시 펼쳐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