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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 박하림 Sep 06. 2020

가본 적 없는 곳에 대한 그리움 03

만난 적 없는 이에 대한 애틋함



나는 죽지 않을 이유를 찾기 위해 타지 생활을 청산하고 고집을 부려 귀국을 했습니다. 엄마 아빠에게도 말하지 않은 일이지만, 나는 어떤 마무리도 제대로 짓지 못하고 그냥 들어왔습니다. 학교에 휴학 신청만 간신히 냈고, 은행 계좌, 핸드폰, 렌트, 어떤 것도 제대로 해지하고 정리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추가로 돈이 나갈 일만 면하고 귀국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부모님과는 당연히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나는 계속 밖으로 돌았고, 혼자서 술을 그렇게도 마셔댔습니다. 종로, 명동, 서촌, 북촌, 상수, 합정, 망원 등을 음악을 들으며 하염 없이 걷고 또 걸었고, 사진을 무진장 찍어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찍은 사진을 보면 지금도 꽤 괜찮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있어요. 글쓰기를 통한 탐색도 그때부터 시작되었고, 뉴욕에서보다 어떤 점에서 보면 더 무모한 선택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띠동갑 남자를 만나 연애를 하며 어른 별 거 없다는 웃긴 생각도 하게 되었고, 연극단에서 연극을 하며 거짓말쟁이로서의 면모도 유감 없이 발휘했습니다. 물류 관리 및 배송준비 알바를 하며 육체노동의 즐거움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정말 많은 전시를 보러 다녔습니다. 


재입학을 위한 대학원서는 모조리 철학과로만 넣었고, 원래는 한예종에 지원할 생각으로 포트폴리오 준비까지 했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원서를 넣고 이듬해 대학 진학을 앞두게 되면서 특히 아빠와의 갈등이 절정에 이르렀고, 덩굴처럼 달라 붙는 아빠의 눈초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밤 늦게까지 하는 알바를 하다가 편지 한 통 달랑 놔두고 집을 나오기까지 했습니다. 서너달 정도 경리단길에서 살다가, 서너달 정도 서촌에서 살았고,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그리움을 해결하기 위한 여정은 그 속에서도 계속 되었습니다. 끊임 없이 사랑을 찾았고, 그림을 그렸고, 예술가의 삶을 훔쳐 보기도 했고, 때때로 비행도 저질렀습니다. 한 번은 친했던 친구와 안국역에서 만나 마리화나를 넣은 초콜릿을 먹고 국현 전시를 보러 갔었는데, 미쳐 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다만 한 번에 너무 많이 먹어서 거의 기절할 지경이 되었고, 내 친구는 본인도 제정신이 아닌 채로 나를 택시를 태워 집으로 보냈습니다. 그때 경찰에 잡혀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별일 아니었을 수도 있는데, 혹시 모를 일이기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집을 돌아간 건 대학에서 제대로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결심을 한 이후였습니다. 방황이 정점을 찍었던 해 여름, 이름만 간신히 얹어 놓은 대학에서 여름 해외연수를 간다고 하기에 무작정 신청했습니다. 학교 수업은 나가지도 않던 애가 해외 연수만 간다니 지금 생각해도 웃긴 일이었는데, 그곳에서 만나 친해진 사람들이 지금 나의 제일 가까운 친구들이 되었을 정도로 내게는 소중한 2주였습니다. 아테네 도시 곳곳에 남아있는 유적들을 보며 막연했던 그리움의 실체를 파악할 단초를 찾게 되었고, 플라톤의 <국가> 수업을 들으며, 또 당시 플라톤을 전공하고자 공부하고 있던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철학자와 그들의 저작들에서 위안과 해답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을 느꼈습니다. 머리를 감고 젖은 채 두면 10분만에 바싹 마르는 아테네에서 내 삶에 흐르는 공기가 바뀌는 경험을 다시 한 번 하게 되었고, 귀국했을 때 나는 어느새 다른 지향에 따라 내면을 정돈하기 시작한 뒤었습니다. 




그 뒤로 나는 철학과 문학에 푹 빠져 지냈고, 조금 더 후에는 내 존재를 뿌리까지 긍정해준 연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에게서 배운 연인으로서의 가장 큰 덕목은 지구력이었습니다. 신기한 건 그도 내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에게 기대도 없고, 관계에서의 지구력 없는 두 사람이 만나 서로에게 기대를 품고 지구력을 발휘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가본 적 없는 순간에 대한 그리움 만큼이나 불가해한 일입니다. 나는 그때 이제 그만한 불가해함이면 충분하다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내면으로만 파고들던 시선을 돌려 바깥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던 겁니다. 그게 내게는 고시 공부였습니다. 예술과 취향에 대한 탐색을 멈춘 것도 그때문이었습니다.


지금 나는 고시공부를 시작하기 전으로 되돌아온 것 같습니다. 그만한 불가해함이면 충분하다는 몇 년 전의 내 결론은 틀렸던 것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가본 적 없는 곳에 대한 그리움, 만난 적 없는 이에 대한 애틋함이 해소될 길이라는 것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게는 그 길을 계속 찾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다는 걸 확인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금 당황스럽고 한동안 기가 막히기도 했지만, 나는 요즘 내 삶을 흐르는 공기의 온도가 다시 한 번 바뀌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표면적인 직업이 무엇이 되었건, 나는 아마 계속해서 예술의 길을 추구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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