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모를 작은 진심
짐 캐리가 출연하고 미셀 공드리기 아트디렉터를 맡아 화제가 되었던 미드 <키딩>에서 주인공 제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슬픔에는 이름이 필요하다”. 아마 사랑하는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도 여전히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미스터 피클스이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겠죠. 스스로 밝고 티 없이 선해야 한가는 강박 때문에 자신의 슬픔에 슬픔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었을 겁니다.
처음에는 그 대사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모든 슬픔에 이름이 필요하다는 건 모든 슬픔에 보살핌이 필요함을 의미한다고 생각했거든요. 흔히 이름을 붙이는 행위,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대상을 내 삶의 일부로 끌어들여오는 행위라고 이해되잖아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오히려 어떤 것이 보살핌을 받기 위해 이름이 필요하다는 전제 자체가 불완전할 수도 있겠더라고요. 산책길에 피어난 들꽃, 올봄에 처음 돋아난 새순, 항상 같은 자리에서 잠을 자는 비둘기, 옹기종기 붙어다니는 오리가족. 내게는 이름 붙이지 않아도 마음으로 살펴보게 되는 것들이 많이 있거든요.
게다가 감정에는 이름을 붙일래도 붙이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이름을 붙이려면 개념화가 가능해야 하는데, 개념은 감정의 질적 풍부함을 온전히 포섭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스스로 잘 이해할 수 없는 감정도 많고요. 행여 적절한 이름을 붙인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이름이 적절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모든 슬픔에 필요한 것은 정확한 이름이 아니라 온전한 관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슬픔 뿐만 아니라 모든 감정에는 그것을 바라봐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것에 귀기울이고 그것이 하는 말에 따라 움직여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내 마음이 그렇습니다. 이 감정에 어떤 이름을 붙이는 것이 정확할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내게 어떤 행동을 취하도록 요구하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 여기서 나의 마음의 부탁을 하나씩 들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은 막연하게나마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