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아나토미아
오늘날 나치의 하켄크로이츠는 그 자체로 악의 상징이 되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하켄크로이츠를 보고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라는 것이 공공연히 받아들여진 상식이다. 반면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 < 욱일기 >는 반세기 넘게 꾸준히 논란이 되고 있다. 욱일기 문양을 문화예술, 디자인 영역에서 사용하는 게 왜 비판의 대상이 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고,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과연 이게 욱일기 문양을 사용한 것이냐'를 판단할 기준이 모호하다는 문제는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이런 문제는 일본 문화에 우호적인 사람들이라면, 특히 그러한 한국, 중국 등 아시아 국가의 국민들이라면 한 번쯤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일본 패션 브랜드들이 한층 더 인기를 얻고 있는 가운데 일본 아메카지(アメカジ;American casual의 일본식 축약어) 패션의 선두주자 빔즈(Beams)가 빔스 재패 인스타그램 계정(@Beams_Japan)에 욱일기 문양을 사용한 홍보물을 게재하면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욱일기 논란이 재점화되었다. '과연 이런 브랜드들의 제품을 구매해도 괜찮은가' '욱일기 사용 등으로 보이콧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브랜드들에는 또 무엇이 있는가' 등의 문제가 부수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사실 어떤 브랜드의 제품을 욱일기 논란을 이유로 보이콧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각자가 내릴 문제이다. 일련의 포스팅을 통해 내가 이러한 판단을 위한 일률적인 기준을 제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나는 논란의 진상을 한층 깊이 있게 파고 들어감으로써 소비자들이 보다 풍부한 정보를 토대로 판단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하에서는 욱일문양이 문제 되는 이유를 밝히고, 이어지는 포스팅에서 빔즈 문제를 한층 깊이 있게 분석해보고자 한다.
*문제의 소지가 있을까 걱정되어 첨언하자면, 나는 빔즈의 팬도 아니고, 빔즈를 옹호할 생각도 없다.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보고 싶을 뿐이다. 물론 나의 시각이 객관적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독자들에게 달려 있겠지만 말이다.
이것이 논란의 중심이 된 이미지이다. 두 남녀의 이미지 뒤로 욱일 문양이 부정할 수 없는 형태로 깔려있고, 그 위로 낙하산을 맨 듯한 인간들이 날아오르고 있다. 카미카제의 진주만 공습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이다. 이로 인해 일부 한국 소비자들로부터 제기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1) 위의 이미지로부터 빔즈 재팬의 의사결정권자들이 어떤 정치적/역사적 입장을 지니고 있는지 추정할 수 있다.
2) 위로부터 추정될 수 있는 정치적/역사적 입장에는 두 가지가 있다. 빔즈 재팬은 (1) 20세기 전반 일본의 군국주의를 옹호하거나, (2) 적극적으로 옹호하지 않더라도 그것에 대한 문제의식 내지는 경각심을 지니지 않고 있다.
3) 빔즈 재팬이 일본의 군국주의를 옹호하든, 그것에 대한 문제의식/경각심을 지니지 않은 것이든, 어느 쪽이든 바람직하지는 않다.
4) 그처럼 바람직하지 않은 정치적/역사적 입장을 취한 브랜드의 제품은 구매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빔즈의 제품에 대해 보이콧을 벌일 필요가 있다.
모두의 입장이 이러하다는 것은 아니다. 위와 같은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일부 소비자들은 보이콧까지 갈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내보이기도 하고, 일부는 빔즈는 물론 유사한 논란을 일으킨 다른 브랜드들도 찾아내어 이참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에 대해 합리적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문제의 양상과 근거들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욱일 문양이 문제되는 이유
욱일 문양이 오늘날 갖는 상징성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자신들의 제국주의 이념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욱일기를 사용하면서 형성되었다. 따라서 제2차 대전 당시 일본국에 의한 '피해국'들에서는 오늘날 욱일 문양이 일본의 전쟁범죄를 옹호하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여겨진다. 대한민국, 중국을 포함한 피해국 국민들에게는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옹호 자체가 크나큰 모욕이 된다. 게다가 일본은 독일만큼 논란의 여지 없이 과거사를 청산했다고 보기 어려운 만큼, 일본인이나 일본에 관련된 사람이 욱일문양을 사용한다면 그가 실제로 어떤 의도를 지녔는지와 무관하게 일정한 해명을 요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나는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욱일기 문양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에 대한 입증책임을 욱일기 문양을 사용한 자가 져야 하고, 이 입증책임을 다한 경우에만 사회적 의혹의 눈초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비난을 받는 것이 타당하다는 말이다.
이 정도까지가 적어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원만하게 합의할 수 있는 지점인 것 같다.
이 다음에 제기되는 문제는 어떤 경우에 욱일 문양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는지가 애매하다는 점이다.
(1) 일본인이 아닌 사람들에 의한 욱일기 사용
욱일문양은 일본은 물론 국가를 막론하고 전통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왔다. 심지어 서구권에서는 'sunburst'라는 이름이 욱일 문양을 별도로 지칭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위의 사례들 모두 욱일기 사용으로 국내외에서 논란이 일었던 이미지들이다. 이 사례들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전혀 정치적 의도가 담기지 않은 것으로 생각될 만한 경우에도, 단지 욱일기 문양을 사용했다는 것만으로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2014년 실제로 한인 학부모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제거를 요구한 펜실베니아 대학 건물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1928년에 제작된 것이다. 일본이 욱일기를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사용하기 훨씬 전에 제작된 것이다. 또 티벳 국기가 일본 군국주의와 관련이 있을 리가 만무한다. 러시아 브랜드 고샤 루브친스키는 애초에 구소련 스타일을 테마로 전개되는 브랜드이다. 1977년 창립된 선버스트 사는 '어쩌면' 일본 군국주의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관련이 없다는 것을 입증할 책임이 선버스트사에게 있는지, 아니면 관련이 있다는 것을 입증할 책임이 문제를 제기하는 편에 있는지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위의 사례들을 살펴볼 때 단지 욱일기 문양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비난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다고 보기 어려운 사례가 많다. 물론 위의 사례들은 일본 이외의 국가들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의혹의 정도가 덜하다는 반박이 가능하다. 만약 선버스트 사가 러시아가 아닌 일본 국적의 회사였다면 이 회사가 군국주의를 옹호한다는 강력한 추정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 이외의 국가에서 사용된 욱일 문양에 대해서는 이해의 여지가 있지만, 일본인이 사용한 경우에는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볼 수 있을까?
(2) 일본인에 의한 욱일기 사용
다음을 고려해보자.
백 번 양보한다면, 일본 문화에서 전통적으로 욱일 문양을 새해, 일출의 상징으로 사용해왔음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의도와 무관하게 신년 카드 등에 욱일 문양이 쓰이고, 에도 시대부터 어선에서 풍성한 수확을 기원하기 위해 달았던 '대어기'에도 자주 쓰인다. (원래 전통 자체는 에도시대부터 있었지만 지금같이 욱일문양, 물고기, 파도 등이 들어간 화려한 형태는 쇼와 30년대 전반(서기 1950년대 후반) 부터라고 보인 것이라고 한다. 출처: 나무위키) 더 나아가 일본 내에서는 '빨갱이 언론'이라는 조롱을 받기도 하는 친중, 친한 진보언론 '아사히 신문'의 로고는 빼도 박도 못하게 욱일 문양을 사용하고 있다. 아사히(朝日)의 의미 '아침해'를 고려한 로고인 것으로 보인다.
위의 경우에도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다고 볼 수 있을까? 물론 일본에서 자국의 전쟁범죄에 대해 충분한 반성의지를 보이지 않아왔다는 점, 일본 사람들이라면 자국의 역사적 과오에 대해 다른 국가의 국민들보다 더 예민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비판의 여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사히 신문처럼 그 정치적 입장이 명료한 경우에도 단지 욱일 문양이 갖는 현대의상징성만을 이유로 로고 수정을 요구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극우 단체에서 집회를 가질 때 욱일기를 사용하는 경우는 물론, 실제로는 군국주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티베트 국가를 사용하는 것조차도 비난의 대상이 된다. 이는 욱일 문양을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명백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욱일 문양, 혹은 그것에 유사한 문양을 사용했다는 사실만으로 비난의 여지가 된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것 같다. 즉, 욱일 문양을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사용 주체의 정치적 입장을 명시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고 볼만한 또다른 근거가 있을 경우에, 비판의 대상이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빔즈 논란을 포함하여 욱일기 논란 및 다른 관련 논란들에 대해 위의 기준을 적용하여 정당성-부당성을 판단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시리즈에서는 빔즈가 이번에 게재한 이미지의 출처와 성격을 상세한 리서치를 토대로 분석해보고자 한다.
*참고로 문제된 깃발은 '전범기'도 '욱일승천기'도 아닌, '욱일기'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고 한다. '욱일승천기'라는 말을 사용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뿐이고, 일본에서는 욱일기(旭日旗;きょくじつき)라고 부르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욱일기'라고 부른 것이 맞을 것이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그렇다는 것이지, 누군가 '욱일승천기'라고 했다고 하여 일일이 태클 걸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의 용례가 그러한 것이니까.) 반면 '전범기'의 '전범'은 전쟁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전범기는 엄밀히 말해 전쟁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상징하는 깃발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전범기'가 지시하는 바와 일치하지 않는 의미이다. 이 때문에 전범기를 'war crime flag' 혹은 'war criminal flag'로 옮기는 것은 옳지 않다. 영어권에서는 'The Rising Sun Flag'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