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사계절이 피는 산장 (3)

by 달빛타래

식당에는 주방과 이어진 문 외에도 아치형으로 지어진 대문이 있었다. 별채의 손님들이 바로 식당으로 올 수 있도록 외부와 연결된 문이었다.


“이제 손님들이 머무는 별채를 보여줄게!”

펠은 웬디의 어깨 위 높이에서 선회하다 앞장서 나아갔다. 본관에서 별채로 이어지는 완만한 언덕은 넓적한 조약돌이 물고기 비늘처럼 촘촘히 깔려 있었다. 누군가 매일 길을 쓸어두는지 흔한 나뭇가지나 잡초도 보이지 않았다.


“가장 먼저 봄 별채야! 사계절 별채 중에서 가장 화사한 곳이지.”

봄 별채는 웬디가 언덕을 오르는 길에 봤던, 벚꽃잎이 만연한 건물이었다. 하얀 자작나무 판자와 연한 민트색을 띠는 창틀로 이루어진 봄 별채는 보는 것만으로 청량함이 느껴졌다. 별채를 호위하듯 둘러싼 벚나무에서는 바람이 불 때마다 연분홍 꽃잎이 눈송이처럼 흩날렸다. 웬디는 흩날리는 꽃잎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기묘하게도 꽃잎은 그녀의 손끝을 비껴가며 바닥에 떨어졌다. 이상함을 느낀 웬디가 한 발짝 다가가자, 꽃잎이 놀란 참새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까악! 주인장이 마법을 걸어놔서 꽃잎을 함부로 만지려 하면 도망쳐.”

웬디가 손을 뒤집으며 당황하자, 벚나무 가지 위에 앉은 펠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왜 마법을 걸어놓은 거죠?”

“꽃잎을 가방에 담거나 벚나무 가지를 기념이라면서 꺾어가는 손님이 있었거든. 자기 나라에는 일년내내 더워서 벚나무가 자라지 않는다나 뭐라나?”

“고약한 손님들이네요.”

“동의하는 바야.”

펠은 힘찬 날갯짓을 하며 봄 별채를 빙 둘러 울타리 쪽으로 날아갔다. 울타리 너머에는 여름 별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똑같은 아침인데도 여름 별채 주변은 유독 그늘이 짙고 깊었다. 청록색 외벽 위에는 테라스가 젖지 않도록 길게 뻗은 처마가 설치되었고, 별채 주변에 심어진 너도밤나무와 참나무의 두꺼운 잎사귀들은 햇빛을 조각조각 부수어 바닥에 뿌렸다.


“여름 별채는 쾌적한 휴식을 원하는 손님들이 선호하는 곳이야.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하는 손님들은 테라스에서 몇 시간이고 빗소리를 듣곤 해.”

펠의 말을 들은 웬디는 잠깐 소나기가 쏟아지는 여름 숲을 상상해 보았다. 사실 그녀에게 있어 비는 축축하게 젖은 양말이 살갗에 달라붙을 때나 만원 지하철에서 느껴지는 눅눅한 체취처럼 불쾌함의 상징이었다. 특히 아침에 내리는 비는 출근길을 어렵게 만드는 방해꾼이었다.


“다음은 가을 별채야. 여기는 알록달록한 단풍잎과 낙엽이 많아서 고즈넉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손님들이 많이 예약해.”

가을 별채는 멀리서부터 확연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단색이 가득한 풍경 중앙에 지어진 호박색 외벽과 밤색 지붕의 조합은 동화 속 호박 마차를 집으로 개조한 것처럼 느껴졌다. 별채 주변에는 서로 다른 색으로 물든 단풍나무들이 둘러싸 있었고,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들이 느릿하게 내려 지붕과 처마 위에 쌓였다. 그때, 무심코 지붕을 올려다본 웬디의 눈에 작은 움직임이 걸렸다. 처음에는 낙엽이 둥글게 뭉친 줄 알았으나, 자세히 보니 단풍 아래 고양이가 파묻혀 있었다. 단풍과 하나가 된 것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던 고양이는 웬디의 시선을 눈치채고 고개를 힐끗 돌렸다.


“뭘 그렇게 봐? 고양이 처음 봐?”

웬디는 순간 눈을 깜빡였다. 그리곤 뒤늦게 말을 건 대상이 지붕 위의 고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찬가지로 지붕을 올려본 펠이 말했다.


“까악! 밍크다!”

“밍크요?”

“밍크는 카멜레온 고양이인데, 하루에 절반 이상을 잠만 자는 게으름뱅이다!”

고양이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귀 끝을 까딱했다. 그 가벼운 움직임을 따라 털빛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카멜레온이 보호색을 띠는 것처럼 털 위로 단풍의 색이 물드는 것처럼 보였다.


“거기는 미끄럽지 않나요?”

웬디는 발끝이 간질거릴 만큼 아슬아슬한 경사에 걸친 밍크를 향해 물었다.


“여기가 제일 햇빛이 잘 들어.”

밍크가 앞발을 길게 쭉 뻗자, 발톱이 잠깐 드러났다 사라졌다. 가을 별채의 지붕은 볕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탓에, 지붕의 어두운 밤색이 오히려 오래된 카펫처럼 보였다. 그 위에서 느긋한 표정을 한 밍크의 모습은 세상과 동떨어진 느낌을 줬다. 몸을 둥글게 말아 자세를 새로 잡은 밍크는 웬디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런데 너도 사는 게 지쳐서 여기에 왔어?”

“네?”

“피곤에 찌들어 보이는 얼굴이길래.”

웬디는 말문이 막혔다. 잠시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정작 밍크는 늘어지게 하품하며 별로 관심 없는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웬디는 다른 말을 꺼내기로 했다.


“저는 여기에서 일을 하고 싶어요.”

“일?”

눈을 가늘게 뜬 밍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쉬지 못해서 난리인 줄 모르겠네. 그냥 좀 욕심을 내려놓고 느긋하게 살면 그만인데.”

“네?”

“제대로 쉬는 법을 모르는데 일부터 하겠다니. 사람들은 참 필요 이상으로 성실하단 말이야.”

밍크의 말은 비웃음이라기보다 정말로 이해가 안 된다는 느낌이었다. 웬디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밍크는 눈을 감고 고개를 둥글게 만 몸에 묻었다.


“밍크는 자려고 할 때 깨우면 귀찮아하니까 그냥 가자.”

펠은 웬디의 옆으로 내려와 속삭이듯 말했다. 방금까지 말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밍크는 빠르게 잠들었다. 함께 겨울 별채 방향으로 향하던 중 웬디는 마지막으로 가을 별채의 지붕을 올려다봤다. 펠은 밍크를 두고 게으름뱅이라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웬디의 눈에는 세상의 소음에서 동떨어진 신비로운 존재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감상도 잠시, 웬디는 훅 덮쳐오는 차가운 공기에 깜짝 놀랐다. 겨울이라는 체감이 확 들 정도로 쌀쌀한 바람과 함께 작은 눈송이가 서서히 떨어지고 있었다. 이 눈들이 어디에서 내리는가 싶어 고개를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먹구름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겨울 별채는 항상 눈이 내리나요?”

“별채 날씨는 매일 달라져. 주인장 말로는 숲의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더라고.”

“숲의 기분이요?”

웬디는 펠의 대답을 들으며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숲의 기분이라니, 마치 숲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표현한 말이지 않은가. 하지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소리 없이 내려앉는 눈송이들도 비현실적이긴 마찬가지였다.


겨울 별채는 다른 별채보다 크기가 작지만, 추위를 막기 위해 돌과 나무를 섞어 만든 잿빛 외벽과 흰색으로 된 창문이 달려 있었다. 지붕은 경사가 더 가팔라 눈이 어느 정도 쌓이면 쉽게 미끄러질 정도였다. 현관과 이어진 테라스에는 두꺼운 털 매트와 숯을 넣어서 쓰는 간이 화로가 있었다. 둘의 조합은 나뭇가지에 꽂힌 구운 마시멜로와 따뜻한 수프를 홀짝이는 광경을 떠오르게 했다.


“이 외에도 별채가 하나 더 있기는 한데, 지금은 손님이 묵고 있어서 오늘은 넘어가자. 다음은 초원으로 가볼래?”

웬디는 마지막 별채가 있는 방향을 힐끗 쳐다본 뒤, 펠을 따라 아래쪽으로 이어지는 내리막길로 향했다. 초원 방향으로 이어진 길은 별채 사이보다 폭이 좁았다. 대신 울창한 나무 사이로 난 흙길은 발끝으로 다진 것처럼 단단했고, 길 위로 떨어진 잎들이 얇게 깔려 있었다. 사브작 잎이 밟히는 소리 가운데 숲을 종횡하는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가까웠다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일을 하면 주로 어떤 일을 하게 될까요?”

“까악! 손님에게 별채 열쇠 나눠주고, 침구 정리, 청소, 숲속 동물들에게 먹이 주기? 일단 떠오르는 건 그 정도인데, 아마 더 있을 거야.”

“생각보단 많네요.”

“맞아! 그래서 주인장이 매일 투덜거려!”

펠은 고개를 끄덕이며 솔직하게 인정했다. 길을 걷다 보면 종종 하얀 편지함처럼 생긴 기둥과 통이 달려 있었는데, 주위에 난 작은 발자국과 부스러기 조각들로 보아, 숲속 동물들의 먹이통인 듯했다.

그렇게 몇 분간 걸어갔을 무렵, 갑자기 숲길이 넓어지며 시야가 확 트였다. 숲길 너머에는 그림처럼 펼쳐진 초원이 햇빛을 받아 초록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발목까지 오는 풀들이 한꺼번에 방향을 바꾸는 모습이 마치 파도처럼 보였다. 그런 초원의 중심에는 작지 않은 호수와 오두막처럼 보이는 건물이 호숫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저 오두막에는 누가 사나요?”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던 펠은 웬디가 가리킨 방향을 확인한 뒤 말했다.


“저건 오두막이 아니라 마구간이야. 저기에는 헨리가 살고 있어!”

“헨리?”

“헨리는 숲의 파수꾼이야. 숲의 결계를 뚫고 들어오는 존재를 막아서거나 길 잃은 손님들을 올바른 길로 안내하지!”

웬디는 파수꾼이라는 말에서 덩치가 우람하거나 인상이 험악한 사내를 떠올렸다. 하지만 호숫가에서 나타난 검은 그림자가 점점 그들에게 가까워질수록, 웬디는 어째서 펠이 오두막이 아니라 마구간이라 불렀는지 깨달았다. 곧 웬디와 펠 앞에 회색빛 털을 가진 말이 멈춰 섰다. 말은 웬디를 향해 우아한 몸짓으로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처음 뵙는 분인 듯한데, 제 소개를 해도 되겠습니까?”

말의 중후한 목소리에는 상대를 향한 예의가 묻어 나왔다. 웬디는 놀랄 틈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이름은 헨리입니다. 프랑스 북부 지역 출신이고, 경주마로 활동하다 지금은 에드먼드 경께 신세를 지고 이곳에서 거주하고 있습니다.”

“저는 웬디라고 해요.”

“오, 웬디 양이군요. 피터 팬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이네요.”

헨리는 이름을 되뇌듯 부르고는 호수 쪽을 고개로 가리키며 말했다.


“만약 호수를 구경하실 생각이라면 제가 태워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저 혼자 걸어가도...”

웬디가 손을 내저으며 거절하려 했지만, 그 전에 펠이 먼저 날개를 접으며 헨리의 등에 착지했다.


“까악! 얼른 와! 호수까지는 보기보다 멀거든!”

펠은 어서 오라는 듯 날개를 퍼덕이며 말했다. 헨리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웬디는 잠시 망설였지만, 헨리가 직접 다리를 굽혀가며 몸을 낮추자, 어쩔 수 없이 등에 올라탔다.

헨리는 짧게 투레질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초원 위의 바람이 얼굴을 스치자, 풀 냄새가 웬디의 옷자락에 은근히 스며들었다. 호수에 가까워질수록 물빛은 더 짙어졌다. 가장자리로 반짝이는 햇살 아래, 어둑한 층이 겹겹이 내려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호수에는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헨리는 호수 안쪽을 턱짓하며 말했다.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호수에 살던 요정이 나타나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처음에는 바람 소리 같다가, 어느 순간부터 자기 이름을 감미롭게 부르는 것처럼 들린답니다.”

“은빛 호수 이야기죠? 저도 옛날에 들어본 적 있어요.”

아는 이야기가 나오자 웬디의 표정이 밝아졌다. 시간이 오래 지나 동화의 내용이 전부 기억나진 않지만, 호수의 요정이 달빛을 잔에 담아 마신다는 결말은 아직 잊지 않았다.


“그래서 요정에게 홀린 사람들은 어떻게 됐나요?”

헨리는 낮게 웃으며 웬디의 말을 받았다.


“사실 요정들은 그저 장난기가 많을 뿐이라, 밤 산책을 나온 손님들을 홀려 발을 헛디뎌 빠지게 만들고 물가로 꺼내줍니다.”

“헨리도 요정에게 홀린 적이 있나요?”

“저는 아직 없습니다. 듣기로는 마음이 흐트러진 손님들이 요정에게 홀린다더군요.”

“그러면 저는 분명 홀리겠네요.”

쓴웃음을 짓던 웬디는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런데 헨리. 이곳에서 일을 하고 싶은데, 에드먼드 씨를 설득할 방법이 있을까요?”

“흠.”

헨리는 잠시 걸음을 늦추고 생각에 잠긴 듯 낮은 소리를 냈다.


“그 전에 한 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웬디 양이 꼭 이곳에서 일하려는 이유가 있습니까?”

역으로 들어온 질문에, 웬디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라기엔 속물처럼 보일 것 같고, 엄마의 초대장 때문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침묵이 길어지자, 헨리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한 가지 조언을 드리자면, 에드먼드 경은 억지로 일을 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웬디 양 외에도 몇몇 분들이 일자리를 구하러 찾아왔지만, 번번이 좋은 자리가 있을 거라며 되돌려보냈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에게 솔직해지세요. 왜 이곳에서 일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왜 이곳에 머물고 싶은지 말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헨리는 입을 다물었다. 웬디는 헨리의 말을 곱씹으며 한동안 고민에 잠겼다. 그렇게 묘한 정적 속에서 호수와 초원을 한 바퀴 돌아볼 무렵, 얌전히 앉아 있던 펠이 입을 열었다.


“까악! 여기까지 봤으면 본관으로 돌아가자! 주인장이 기다린다!”

헨리는 친절하게도 둘을 처음 마주친 초원 입구에 내려주었다.


“다시 뵙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웬디 양.”

깔끔한 인사와 함께 물러나는 헨리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웬디는 펠과 함께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본관에 도착하자, 에드먼드는 손님맞이를 위한 응접실에서 찻잔 두 개를 꺼내놓고 웬디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장, 우리 왔다!”

신문 너머로 웬디를 훑어본 에드먼드는 자리에 앉으라는 손짓을 보내며 신문을 반으로 접었다. 웬디는 가시방석에 앉는 기분으로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에드먼드는 옆에 있던 찻주전자를 들고 기울여 찻잔을 채우며 물었다.


“어떻습니까?”

주어가 없는 질문이지만, 웬디는 그것이 산장에 대한 감상을 뜻한다는 걸 눈치챘다.


“너무 좋았어요. 모두 친절하시고, 별채도 멋지고, 초원도 아름다웠어요. 하지만...”

웬디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찻잔 속에서 일렁이는 갈색 액체를 내려다봤다. 헨리가 말해준 솔직해지라는 조언과 주머니 속에 구겨진 채 들어있는 이력서가 차례로 머릿속을 스쳤다.


“조금은 겁이 나기도 했어요. 밖에서는 항상 멈추지 않고 달려야만 했거든요. 웬디라는 이름보다는 이력서에 적힌 경력이 저를 대신했고, 잠시라도 멈추면 남들보다 계속 뒤처질까 두려웠어요. 거기다 여기는 제가 이룬 일들이 아무 소용이 없는 마법산장이잖아요.”

에드먼드는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려다 말고 계속 말하라는 듯 웬디를 가만히 응시했다. 웬디는 숨을 길게 들이마시고 이어서 말했다.


“처음에는 제 쓸모를 잃어버린 것 같이 느껴졌는데, 생각해 보니 제가 정말 원했던 건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게 아니라, 온전히 숨을 고를 장소가 필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이곳에 머물고 싶어졌어요. 돈이나 경력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저를 위해서요.”

웬디는 뒤늦게 자신의 발언이 다소 이기적이라고 느껴졌다.


‘바보야. 그래도 어느 정도 예의는 차렸어야지!’

웬디가 그렇게 자책하는 사이, 에드먼드는 김이 얇게 올라오는 찻잔을 웬디 쪽으로 밀며 담담하게 말했다.

“요즘은 쉬는 걸 시간 낭비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많죠. 그래서 몸이든, 마음이든, 멈출 때를 모르고 남들을 따라 일단 달려갑니다. 정작 내가 어디를 향해 달리는지 아는 사람은 손에 꼽지만요.”

웬디는 에드먼드가 자신을 비꼬는가 싶어 움찔했지만,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안타깝다는 눈빛을 보였다.


“하지만 쉬어야 할 때를 놓치면, 그때부터는 더 이상 달리고 싶어도 달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웬디 씨는 시기적절하게 이곳에 찾아왔다고 볼 수 있겠네요.”

무심한 듯 다정한 그의 목소리에 웬디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자기도 모르게 찻잔을 쥔 손에 힘을 준 그녀는 이어질 에드먼드의 결정만을 기다렸다. 에드먼드는 차를 홀짝 마신 뒤, 웬디의 경직된 어깨와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을 잠시 응시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가늠하듯 침묵을 지키다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웬디 씨가 이곳에서 손님이 아니라, 직원으로서 머물고 싶다면 그렇게 하세요.”

“아, 감사합니다!”

웬디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여기에서 일한다고 해서 무겁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에 제한해서 웬디 씨가 손을 빌려주면 됩니다.”

“펠에게 해야 할 일은 들었어요. 침구 정리, 청소, 세탁, 숲속 동물들에게 모이 주는 일까지요. 다른 것들도 시켜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웬디는 기억나는 업무들을 하나씩 세어 보며 눈을 빛냈다. 에드먼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그것만 해도 충분합니다. 당장 프런트를 지킬 사람만 생겨도 지금보다 훨씬 편해지겠군요.”

“주인장 성격에 잘도 그러겠다! 혼자서 일하는 게 제일 편하다고 할 때는 언제고?”

“내 성격이 어디가 어때서?”

에드먼드가 눈을 가늘게 뜨며 펠을 노려봤지만, 돌아오는 건 세찬 코웃음뿐이었다. 그 투덕거리는 광경을 보다 웬디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에드먼드는 갑작스러운 웃음소리에 짐짓 놀란 눈빛을 보였지만, 이내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이제부터 말을 편하게 하겠네. 웬디.”

“까악! 식구가 된 걸 환영해!”

펠 또한 기다렸다는 듯 외치며 웬디의 어깨 위로 날아와 앉았다.


“그리고 이걸 받게.”

에드먼드는 품속에서 메리의 초대장을 꺼내 웬디에게 내밀었다.


“에드먼드 씨, 이건?”

“자네를 이곳에 불러온 것으로 초대장의 역할은 끝났다네. 나에게는 평범한 종이에 불과하지만, 자네에게는 아니지 않나?”

“... 감사합니다.”

에드먼드의 말이 퍽 다정했던 탓에, 웬디는 울컥하는 마음을 꾹 누르고 초대장을 두 손으로 받았다. 초대장에서 배어 나온 재스민 향기도 웬디를 축하하듯 은은하게 코끝을 간지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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