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엽서시

너희를 만나는 길조차 흥겹다

by 엽서시

<1>

전생에 이전 생에

아마도 조선 땅에서

우리는 무른 감을 먹고 촉 없는 활을 들고 시덕거리다가, 멧새에게 시위를 당겨보기나 하고, 나자빠져 잠이나 자곤 했을 것이다.

하릴 없이 검은 사추리나 몇 번 긁다가 지나가는 신부 행렬에 손을 흔들다 서로 실없는 욕이나 한 바가지 퍼붓고, 어, 그래 시원다, 땀 젖은 머리를 흔들며 발에 묻은 저문 흙을 닦고 서로의 집으로 향하지 않았을까.

어깨동무하지 않아도 서로 그림자가 엮인 것이 무슨 다리 같다고, 다리는 무슨 다리냐고, 시러밸 놈아, 마지막 욕으로 손 흔들고 털레털레 사립문 닫지 않았을까.


<2>

나의 친구 중 한 놈은, 엊그제 만난 이 녀석, 둘이서 식초를 탄 것처럼 신 김치찌개에 술을 한 병 나누어먹고, 에이, 아저씨 이거 진짜 식초탄 거 아녜요, 시발이란 말은 입에 삼키고 물었더니, 원래 그래요, 우리 집은 원래 그래요, 이딴 말이나 듣고.

원래 이런 세상이다, 시벌,

학벌 아닌 게 없더라, 시벌,

그러냐. 난 잡아보니 줄 아닌게 없더라, 시벌.

둘이 술 한 병을 나누어 먹고, 손을 흔들고. 그래, 야 너 아직 월급 안 나왔으니까 오늘까지 내가 사고, 다음부턴 네가 사라.

아냐, 인마. 너 접때두.

접때두 이번에두 내가 먹고 싶은 안주 먹었으니까 담에 네가 먹고 싶은 거 먹고 그때 네가 사라. 알았냐.

그래. 새키야.

야.

왜.

소고기 먹고 싶을 때 불러라.

그래, 새키야.

꼭이다. 소고기.

그래, 새키야.

들어가라.

엉. 잘가라. 너도.


<3>

하남으로 이사간 친구 한 놈은 인제 가끔 면접 볼 때나 서울땅을 밟는 모양이지만 그땐 연락이 없다. 게임을 하다 가끔 만나서는,

야, 오늘 형이 가르쳐줄게, 인마.

마우스가 삐었냐, 이 새키야.

하다가 서로 잘자라 하고 헤어진다.

잘자라, 하고 헤어진다.

잘자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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