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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엽서시 Jan 10. 2016

대영박물관전: 영원한 인간

인간을 찾다

아기는 거울을 보고 입을 쫑긋이고 팔다리를 가누면서 자신도 어른들처럼 팔다리가 달린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세상에는 인간을 정의하는 수많은 말과 고함과 생각과 믿음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육체라는 그릇으로 정의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간의 형상을 한 돌과 그림 앞에서 인간을 찾습니다.

기원전 8천년전 예리코에서 출토된 해골

인간의 육체는 유한합니다. 죽고 나면 육체도 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인들은 죽은 이의 형상을 보존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만년 전 예리코에 한 해골이 묻혔습니다. 고대인들은 해골에 석고를 바르고 눈에 조개껍질을 넣었습니다. 

기원전 2세기 니네베의 황금가면

죽은 자의 얼굴에 금속을 씌워 만드는 장례가면, 이른바 '데드 마스크'도 그런 염원이죠. 죽은 이의 얼굴을 보존함으로써 우리는 그의 영혼도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우리는 영혼이 얼굴에 있다고 믿나봅니다.

수많은 얼굴들. 그리고 수많은 영혼들. 

수많은 얼굴들 속에 수많은 영혼들이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죽은 젊은 여인의 얼굴, 로마에서 죽은 노파의 얼굴, 페루 사제의 얼굴, 여신과 남신의 얼굴. 화가가 화폭에 그려낸 같은 예술가의 얼굴, 자신의 얼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흉상

때로 얼굴을 조각하고 담는다는 것 자체가 살아있는 사람의 힘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에서 오늘 내일을 장담하지 못하는 전사들이 자신의 모습을 영원히 전하길 바란다는 것이죠.

뉴질랜드 마오리족도, 우리가 잘 아는 알렉산더 대왕부터 로마의 황제도. 그리고 중국의 마오쩌둥까지. 

전사들의 얼굴

생각해보니 최근 높이 36M의 마오쩌둥 동상이 허난성에 세워졌다가 주민들의 반대로 철거되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마오쩌둥의 동상이 재생산되는 것을 통해 아직도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번 전시회의 주제는 '영원한 인간'입니다.

인간을 담아낸 회화와 조각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자신이 그려낸 인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영원이라는 의미는 결국 죽음을 극복한다는 것입니다.

우습게도 그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열망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은 황제, 전사, 신의 그림이나 조각이 아니라 어느 한 젊은 부인의 묘지에 드러나 있습니다. 27살에 어린 아기를 두고 죽은 여인을 위해 조각가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모든 죽은 이들이 부활하여 영원히 산다'는 최후의 날을 묘사합니다. 젊은 여인은 종잇장처럼 관을 찣고 어린 아들와 함께 살아납니다. 여인은 언제 죽음을 경험했냐는 듯, 젊고 건강한 모습 그대로 입니다.

김수영 시인의 「눈」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시인은 '눈'이라고 하는, 햇빛에도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녹아버리는 이 한없이 유약한 것을 보고 역설적으로 살아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는 이야기합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고. 

결국 인간이 돌과 그림을 통해 얻고자하는 불멸도 이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죽음을 잊어버림으로써, 죽음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잊음으로 죽음을 이길 수 있다면, 반대로 우리는 기억을 통해 살아있을 수 있습니다.

돌과 그림을 통해 인간은 기억됩니다. 만년 전의 해골에서부터 우리의 프로필 사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타인에게 기억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영원을 찾습니다.    


('대영박물관전: 영원한 인간,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15.12.11~16.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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