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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엽서시 Jan 11. 2016

뭉크:영혼의 시

‘시’는 아름다움을 좇습니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1연, 김영랑


     

 국어시간에 보았음직한 작품입니다. 김영랑의 작품은 '아름다움'에 충실합니다. 그렇기에 그가 노래하는 아름다움은 오히려 이 세상에 있을법 하지 않은 풍경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모든 시가 아름다움을 노래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걷잡을 수 없는 추함과 끔찍한 절규가 아름다움을 대신하기도 하지요. 김수영 시인의「죄와 벌」에는 길거리에서 아내를 두들겨 패는 시인의 모습이 나옵니다.     

김수영은 아름다움 대신 진실을 노래한 시인입니다.


(중략)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오는 거리에는

사십명 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 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죄와 벌」, 김수영     



 「폭포」에서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는 “고매한 정신”을 노래했던 시인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서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작품보다 『악의 꽃』이라는 시집 제목으로 더 유명한 보들레르는 「살인자의 술」이라는 작품에서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주정뱅이의 목소리로 절규합니다.     


내 마누라가 죽어서, 나는 자유로와졌다!

그러니 취해 떨어지도록 술을 마셔도 돼.

빈털터리로 집에 돌아오며는

그년의 고함이 내 가슴을 찢었다오.     

임금님처럼 나는 행복해.

공기는 맑고, 하늘은 더 높고,

내가 마누라에게 반했을 때도

이 같은 여름이었지!


(중략)     


이제 나는 자유로운 외톨이!

이 저녁 죽도록 취하여

두려움도 후회도 몰라

땅바닥에 쓰러지듯 누워서     

개새끼처럼 잠들어야지!

자갈과 진흙 가득 실은

짐수레의 무거운 바퀴가

아니면 미쳐 날뛰는 짐마차가     

죄 많은 내 머리 박살을 내거나

내 몸뚱이를 두동강 낼 수 있겠지.

(하지만) 악마도 영성체도

신이 그렇듯, 나 또한 관심 없도다!     

                                                       「살인자의 술(포도주)」, 보들레르     


서설이 길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들을 읽다보면 이 전시회가 굳이 뭉크의 이름 앞에 ‘영혼의 시’라는 부제를 달아놓은 이유도 짐작이 갑니다. 뭉크는 결코 아름다운 풍경을 그린 화가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절규」처럼, 끔찍한 풍경으로 메아리치는 절규를 묘사했죠.     


절규, 1895, 석판화

   

이번 전시회에 전시된 작품은 석판화로 제작된 것입니다.

뭉크는 「절규」를 그의 일생에 걸쳐 여러 번 그렸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아무래도 템페라로 나타낸 것이겠지요.

핏빛 노을빛.

이미 죽은 송장처럼 창백한 낯빛의 인물은 마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금 빠져 나온 듯합니다. 그러나 다리를 지나가는 누구도 그의 절규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밀실에 갇혀 있습니다. 마치 최인훈이 「광장」에서 묘사한 것처럼 말이죠. 그렇기에 그의 절규는 공허합니다. 그러나 이 절규를 주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그림을 보는 ‘우리’입니다. 그림 속의 그는 절대 알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팔뼈가 있는 자화상, 1895, 석판화

전시된 뭉크의 그림들은 아무도 듣지 않는 자신의 영혼에 대한 절규입니다. 그의 그림은 한없이 우울합니다. 그가 묘사한 사람들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짐승에 가깝죠. 그가 그린 술집 풍경은 한 명의 ‘마녀’에게 조종되는 ‘꼭두각시’들로 가득 찬 것 같고요.


뭉크가 묘사한 사람들은 어딘가 짐승을 닮았습니다. 딱 한 사람, 니체를 빼면 말이죠.

전기작가들은 이러한 뭉크의 우울함이 어렸을 적 결핵으로 잃은 그의 누이에서 비롯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젊었을 적, 꽤나 여인들에게 퇴짜를 맞았나 봅니다. 특히 그의 첫사랑이었던 하이베르그 부인은 병약하고 신경질적인 뭉크와 달리 생기에 넘친, 자유분방한 여인이었습니다.      

병든 아이, 1896, 석판화
고리버들의자 옆의 나체모델, 1919~1921

그래서일까요. 전시된 뭉크의 작품에서도 여성들은 대조적으로 나타납니다. 병든 소녀, 죄 많은 여인, 생명력을 잃은 나부.     

따라해봤습니다.

그리고 자신만만하고 위풍당당한 여인이 그것이죠. 아니, 여인들은 악녀를 넘어선 마녀, 그것도 남자를 절망에 빠뜨리는 흡혈귀처럼 묘사됩니다.     

재, 1925
흡혈귀, 1893
마돈나, 1895~1902
구석에 웅크린 태아, 주변의 정자에 주목해보세요.

중년의 뭉크는 꽤 안정적인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특히 그가 그린 ‘판화’라고 하는 작품의 특성상, 그는 인기 있는 작품들을 다시 제작할 수 있었습니다. 판화의 가치가 뭉크 때문에 높아졌다는 말이 생길만큼 그는 열심히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삶은 안정을 찾았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의 방황과 절망과 고독, 불안에 주목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아름답기만 한 작품보다 이러한 감정에 주목하는 것은 불안 때문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불안합니다. 사랑과 젊은, 아름다움은 항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절규,  1910

 그렇지만 우리는 타인의 불안과 절망, 고독을 보며 이러한 불안함 역시 인간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엉성하고 조잡하다면 조잡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작품이 전하는 생생한 절규에 주목합니다. 위로도 긍정도 없는 이 날선 절규에는 전혀 뜻하지 않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이 절규 속에는 바로 우리 자신을, ‘인간 그 자체’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뭉크:영혼의 시,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2014.7.3~10.12)

(네. 이미 끝난 전시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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