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흰 바둑돌
여전히 궁 안에는 벚꽃이 흐드러져 있었다. 다만 대부분이 궁궐의 흙에 섞여 밤바람에 몸을 굴리고 있을 뿐이었다. 재증걸루는 바람을 몸에 닿는 서늘한 옷깃으로 느끼며 다시 한 발짝을 뗐다.
봄의 밤은 아직 서늘했다. 재증걸루보다 다섯 발자국 쯤 앞서 걷고 있던 시종장은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재증걸루가 일부러 걸음을 늦게 걷는 탓이다. 그러나 시종장은 재증걸루를 감히 채근하지는 않았다.
“재증걸루!”
뒤에서 놀란 외침소리가 들렸다. 재증걸루는 뒤를 돌아보았다. 태자 문주였다. 열 살을 넘긴 태자는 길고 윤기 나는 머리를 곧게 빗어 넘기고 있었다.
“재증걸루, 정말 그대입니까?”
테자가 반가이 재증걸루에게 다가왔다. 시종장은 마뜩찮은 눈치였지만 고개를 숙였다. 재증걸루 역시 고개를 숙이며 태자의 물음에 답했다.
“예.”
“궁에는 어떤 일이오? 또 전하께서 부르셨소?”
태자의 뒤에 길게 궁녀와 시종 무리가 늘어섰다. 재증걸루는 미소했다.
“산제에서 경합을 잘 보았소.”
“못난 재주를 보였으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못난 재주라니요, 다른 이들이 들으면 기함할 일입니다.”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전하께서 부르시는 일입니다. 태자저하께서는·····.”
“그러면 나도 전하께 함께 가지요.”
신나 까불거리는 태자가 재증걸루 옆에 섰다. 태자를 따르던 시종이 무어라 입을 열려하자 태자가 손을 들었다.
“시종장이 바래다 줄 것이니 개의치 말거라.”
개루를 많이 닮았다.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재증걸루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재증걸루는 태자와 함께 걸었다. 태자가 묻는 이런 저런 것들에 적당히 대꾸하고 미소를 지으며. 시종장이 둘을 안내했다.
갑자기 궁에 수풀이 우거진다. 새 하나가 시종장 앞으로 후드득 몸을 던졌다. 시종장이 팔을 마구 휘두르자 그 새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다시 덤불 사이로 몸을 숨겼다. 어두운 밤이지만 재증걸루는 그것이 궁에서 놓아기르는 꿩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저 쪽입니다.”
시종장이 고개를 숙였다. 재증걸루는 감탄했다. 비원은 처음이었다. 태자도 탄성을 흘렸다. 물이 둥글게 돌아 나가는 가운데에 누각이 있었다. 누각의 사방에는 작은 돌다리들이 놓여 있고 누각의 위에는 늙은 벚나무가 몇 송이 안 되는 꽃을 흩날리고 있었다. 누각을 돌아나가는 물 위에도 벚꽃이 떠다니고 있었다. 물에서 버찌 향이 나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재증걸루는 돌다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태자가 재증걸루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려는 것을 시종장이 막았다.
“무엄하다.”
그러나 경치에 압도되어있는 태자는 사실 이미 고분고분해진 말투였다.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시종장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왕의 명이십니다.”
시종장은 숲에서 한 발짝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왕의 명이십니다.”
“그래. 알았다.”
볼이 부어오른 태자를 뒤로 한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재증걸루는 다시 누각으로 힘차게 발을 뗐다. 뒤에서 시종장이 태자를 안내하는 소리가 멀어졌다.
홀로 개루를 만난다.
누각에는 흰 비단옷을 입은 개루가 홀로 술잔을 채우고 있었다. 마치 신선과 같은 모습이었다. 재증걸루는 왕께 절을 올렸다. 개루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손짓했다. 자리에는 술상과 작은 단지, 그리고 바둑판이 놓여있었다. 바둑판에는 늙은 나무의 살결이 그대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바둑을 둘 줄 아는가.”
“미숙합니다. 왕께 배우기를 바라옵니다.”
개루가 미소했다. 바둑돌은 모두 육각형으로 납작하게 깎은 옥돌이었다. 재증걸루가 검은 돌을 잡았다. 나무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검은 돌이 바둑판 위에 점을 찍었다. 한동안은 말이 없었다. 바둑돌을 내려놓는 소리가 마치 목도를 사이에 두고 싸우는 것처럼 이어졌다. 연타와 휴식. 휴식과 연타가 이어졌다. 개루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위례성 공사는 잘 진행되고 있는가.”
“예상보다는 늦어질 것 같습니다.”
“그러한가.”
“비가 오질 앉아 물을 구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비가 오면 다시 제 속도를 찾을 터이니 너무 심려 마시옵소서.”
“그러한가.”
다시 돌 놓는 소리.
“자네도 뜬소리를 듣는가?”
“무슨 말씀이오신지······.”
개루가 한쪽 볼이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재증걸루가 눈치 채기 전에 미소를 지웠다. 그리고 손을 움직였다. 흰 옥돌이 유달리 큰 소리를 내며 나무에 제 몸을 부딪쳤다. 재증걸루의 대마가 머리 앞을 가로막혔다. 돌들이 몸을 떨었다.
재증걸루는 고이만년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짐작해보았다. 대체 무슨 뜬소리를 말하는 것인가.
“자네도 고구려와의 싸움이 두려운가.”
재증걸루는 말없이 돌을 움직였다. 검은 옥돌이 흰 옥돌 사이에 집을 짓는다.
“두렵습니다.”
개루가 실소했다.
“그대 같은 무인도 고구려가 두렵단 말인가?”
"무인은 언제나 두려운 법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매일 같이 단련을 하겠습니까? 남다르게 뛰어난 무인은 남다르게 겁에 질려 있을 뿐입니다."
개루가 재증걸루를 바라보았다. 손가락에 닿는 옥돌처럼 차가운 눈빛이었다.
“그래서 혼인도 하지 않고 있는가?”
“그럴지도 모릅니다.”
재증걸루가 빠르게 답하였다. 동시에 재증걸루의 손이 움직였다. 나무를 뚫을 듯이 강한 마찰음을 뱉으며 검은 돌이 흰 옥돌을 둘러쌌다. 우수수 개루의 졸병들이 죽어나갔다.
“또 뜬소리가 있어.”
재증걸루는 답하지 않았다.
“그대가 혼인 하지 않는 이유. 요 며칠 사이에도 세 번이나 혼담을 거절하였다고 들었네.”
재증걸루는 여전히 답하지 않았다. 요 며칠 사이 중신들에게서 혼담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혼담 뒤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개루라는 사실을 재증걸루가 모를 리 없었다.
“안 그래도 겁이 많은 이 사람이 가족이 생기면 더욱 저어할까 싶어 거절한 것입니다.”
“따로 정인이 있는 것은 아니고?”
개루의 흰 돌이 검은 돌의 복장을 내질렀다. 허리가 끊기면서 열을 맞추고 있던 재증걸루의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개루의 손이 바삐 검은 돌을 바둑판 밖으로 나르는 것을 바라보던 재증걸루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겁이 나는지도 모르지요.”
개루의 손이 멈추었다.
“또 뜬소리가 있어.”
재증걸루가 돌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개루가 그 옆에 돌을 내려놓았다.
“누군가가 자꾸 월담을 한다는 소리. 누군가가 궁을 제 집처럼, 아니 제 집보다 더 잘 드나든다는 소리. 어찌나 그 자의 몸이 날랜지 궁에 병사를 두 배로, 세 배로 늘려도 그 그림자도 본 병사가 없다는 소리.”
이번에도 개루가 돌을 놓는다. 재증걸루의 검은 병사들이 힘없이 바둑판을 떠났다.
“또 있지.”
재증걸루가 입을 열려는 것을 개루가 손을 들어 막았다.
“진영에 내게 딴 마음을 품은 장수들이 많다는 건 나도 진즉 알고 있어.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일부러 자청하여 위례성 공사를 맡더니 그 공사를 지연하고 있다는 소리. 궁에 가까운 곳에 병사들을 둔 채로 정작 저는 몰래 궁이나 월담하면서!”
흰 돌이 벽력처럼 바둑판에 내리꽂혔다. 바둑판이 떨었다. 재증걸루는 말없이 바둑판의 떨림이 멎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또 다시 입을 연 것은 개루였다.
“나는 바둑을 좋아하네.”
재증걸루가 마저 검은 돌을 놓았다. 재기를 기다리는 재증걸루의 대마가 개루의 옆구리를 노리고 있었다. 개루의 대마는 고개를 왼쪽으로 꼰 채 재증걸루를 노려보고 있었다.
“바둑알은 생각을 하지 않지. 죽으라면 죽고 살라고 사네. 적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어도, 그 안으로 뛰어드는 게 바둑알이야. 꼭, 꼭 전쟁과 같지. 왕의 놀음판과 같아. 그래서 너나할 것 없이 바둑을 좋아하는지도 모르네. 사람이라면 누구나 왕이 되고 싶어 하는 법이니까. 그렇지만 그렇기에 바둑을 이해하는 사람은 왕 밖에 없는 것이야.”
개루의 돌이 재증걸루의 손과 교차했다. 거의 동시에 돌을 내려놓은 셈이다.
“바둑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적을 속여야 하네. 미끼를 주고 적이 미끼를 덥석 물때까지는 적의 놀음에 맞춰주지. 때로는 적이 두고 싶어 하는 곳에 적의 돌을 둘 수 있도록 기다리고 때로는 적의 대마가 자라기를 기다리지. 그렇지만 다 그것은 이기기 위한 기다림일 뿐.”
재중걸루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다시 재증걸루가 돌을 놓자 거의 동시에 개루가 돌을 놓았다. 재증걸루의 돌 석 점이 사라졌다. 그 석 점은 재증걸루의 왼팔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재증걸루는 뒤늦게 깨달았다.
“이 바둑판 안에서는 왕을 이길 수 없네. 걸루.”
왕이 재증걸루의 이름을 속닥였다. 재증걸루는 떨리는 손이 보이지 않도록 바둑판 아래로 손을 숨겼다. 재증걸루가 돌을 집으려는 그 순간이었다.
“이제 그만 돌을 내려놓게나.”
재증걸루는 말없이 돌을 내려놓았다. 개루가 몸을 일으켰다.
“내일 여자를 한 명 보내겠네. 아주 고운 아이로.”
“······.”
“바둑판에서조차 왼쪽이 약점이구나. 한 수 배우고 싶다 하였으니 일러주는 말이네.”
재증걸루가 말없이 읍하고 있는 동안 개루는 누각을 떠났다. 재증걸루는 홀로 남은 누각에서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재증걸루의 대마가 옆구리를 보여주며 몸을 틀고 있었다. 재증걸루가 다시 돌을 집었다.
딱.
딱. 딱.
딱.
재증걸루가 손을 멈췄다. 이제 재증걸루의 대마가 온연히 일어나 개루의 군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개루의 차례. 재증걸루의 손에 든 흰 돌이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이 순간 재증걸루는 개루 그 자신과 다름없었다. 흰 돌의 자리가 보였다. 재증걸루의 옆구리를 힘껏 끊어낼 수 있는 자리였다.
흰 돌이 자리를 잡았다.
그 순간 재증걸루의 눈빛이 변했다. 검은 돌을 들었다. 그때 꽃잎, 재증걸루의 눈앞에서 하얀 벚꽃 잎이 나풀거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재증걸루는 조용히 그 꽃잎이 바둑판 위에 내려앉는 것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 곳이 제자리라는 것을 오래전부터 눈여겨보았다는 듯, 꽃잎은 돌들 사이로 제자리를 비집고 들어앉았다. 재증걸루는 돌을 내려놓았다.
미끼라.
바둑판 위에는 미완의 대국이 서로 얽히고섥힌 채 놓여 있었다. 재증걸루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 팔을 휘둘러 그 대국을 휩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