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그림자
5. 그림자
귀또리 소리가 멎었다. 나뭇잎이 손바닥을 비비는 소리도 멎었다.
가지 꺾이는 소리가 우뚝한 침묵 속에서 무안한 듯 고개를 괴괴히 숙였다.
숨을 꾹 참은 침묵이 이어졌다. 솔잎이 두 올 떨어졌다. 그러나 그 고요 중에도 솔잎이 가랑잎에 부딪치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소나무 밑에 웅크리고 있던 그림자가 조용히 손을 들어 솔잎을 털어냈다. 그림자는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2열로 넘실거리는 횃불이 골목을 돌아나가고 있었다. 때때로 횃불들이 멈춰서는 것이 보였다. 밤새나 박쥐를 날려 보내려는 까닭이다. 횃불들이 골목으로 사라지고 그 넘실거리는 불빛도 보이지 않게 되자 그림자는 조용히 손바닥을 움직여 바닥을 더듬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솔가지들을 주워 옆으로 던져버린 후 그림자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는 덤불 옆의 오솔길의 낙엽은 이미 치워져 있었다. 가끔은 바위 위를 날래게 뛰어 넘기도 하면서 그림자는 사뿐히 나무들의 그림자 아래를 바삐 오갔다. 마침내 그림자가 다다른 곳은 궁궐의 후원이다.
달빛이 고고히 철쭉 덤불과 벚나무들을 비추고 있었다. 벚꽃이 흐드러진 아래에 철쭉 덤불에는 삐죽삐죽한 꽃봉오리들이 꽃잎을 오므린 채 밤바람에 고개를 젓고 있었다. 벚나무가 살며시 고개를 흔들었다. 궁녀 한 명이 그 아래에서 달빛을 맞고 있었다. 밤바람이 궁녀의 머리를 쓸었다. 수없는 꽃잎이 궁녀의 얼굴에 내려앉았다가 다시 흘러갔다.
그림자는 한 발짝, 한 발짝 그녀에게 걸음을 옮겼다. 벚나무가 한껏 그림자를 뻗은 곳에서 그의 발이 멎었다. 이제 궁녀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저하던 그림자가 다시 한 발짝을 옮겼다.
달빛에 사람의 윤곽이 드러났다. 궁녀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림자가 몸을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궁녀의 손은 정말 그림자를 만지듯 허공을 스쳐지나갔다. 궁녀의 표정에 아쉬움이 서리는 것을 본 그림자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섬섬옥수에 더러운 것이 묻을까 저어하는 것이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허공에서 흘러나온 듯한 목소리가 궁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궁녀의 얼굴이 환히 빛났다.
“오해하지 않을 테니 이번엔 저어하지 마십시오.”
궁녀의 손이 다시 허공을 더듬었다. 달이 궁녀의 손도 살며시 떨리는 것을 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구름이 달빛을 흐리는 그 순간 궁녀의 손이 그림자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 손에는 땀에 젖은 숯가루와 흙먼지가 가득했다. 그러나 궁녀는 손에 든 힘을 풀지 않았다.
두 그림자가 말없이 겹쳐 있었다. 달이 구름을 깨고 나왔을 때 그림자가 손가락을 들어 궁녀의 뺨에 묻은 숯가루를 닦아 주었다. 궁녀가 키득거리며 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림자도 빙글 웃었다.
“걸루.”
궁녀의 입에서 빙글 이름이 쏟아 나왔다. 그림자는 웃지도 놀라지도 않은 채 궁녀의 손을 쥔 손가락에 잠시 힘을 주었다. 궁녀도 손에 힘을 주었다. 다시 두 그림자에 웃음이 함뿍 담겨졌다.
“이름을 묻지 않으십니까.”
궁녀가 장난스레 물었다. 그림자는 그저 웃어보였다. 밤중에도 숯가루가 묻지 않은 하얀 이가 보였다. 그림자가 입을 다물고 생각하는 그 동안 밤바람이 한 번 더 불어왔다. 여인의 숨처럼 따뜻한 바람이었다.
“깨어질까 그렇습니다. 그러니······.”
“오해하지 않겠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림자의 말꼬리를 궁녀가 재빨리 붙들고 물어졌다. 다시 궁녀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얼굴에 묻은 웃음을 닦으려는 것처럼 옷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소매를 얼굴에서 뗀 궁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이 대룽대룽 달려있었다.
“어찌 아직도 안해를 얻지 않으십니까?”
이번에도 침묵을 뗀 것은 궁녀다. 그림자는 약간 놀란 듯이 그러나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본적은 없습니다. 그저······. 무인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무인······.”
“무인은······.”
궁녀의 표정에 벚가지 그늘이 서리자 그림자가 바삐 입을 뗐다.
“전쟁에 나가기 전에 가족을 베고 나가는 것이라 아비께 들었습니다. 저도 그리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림자가 고개를 갸웃 숙였다. 길게 묶은 머리타래도 주인을 따라 몸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젠 잘 모르겠습니다. 과연 그래서인지는.”
“······.”
그림자가 웃었다.
“방금까지 무인이라 하던 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우습습니까?”
“······.”
궁녀는 조금 고개를 숙였다. 그림자가 살며시 궁녀가 잡은 손을 뺐다. 궁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그림자의 손가락이 궁녀의 볼을 스친 후였다. 볼에 검은 숯 자국이 남은 것을 보고 그림자가 씩 미소했다. 궁녀도 웃으며 다시 소맷자락을 올렸다.
“깨어진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예?”
“아까 그리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깨어진다고······.”
그림자가 입을 열었다. 그때 숯가루로 범벅한 그림자의 표정이 변했다. 궁녀가 놀라 입을 여는 순간 그림자가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붙이더니 뒷걸음을 옮겼다. 한 발짝, 한 발짝. 벚나무도 눈치를 챘는지 한껏 그림자를 늘였다. 그림자의 몸에 벚나무의 그림자가 닿았다. 다시 한 발짝. 벚나무의 그림자가 그림자의 몸뚱이를 집어삼켰다. 사람의 윤곽이 가지에 얽히더니 궁녀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뭉개지고 뭉개져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궁녀의 귀에도 시종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궁녀가 얼른 소매 자락으로 다시 얼굴을 씻고 뒤를 돌아보았다. 시종 한 사람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멀리서 뛰어온 것인지 시종이 숨을 헐떡였다.
“또 여기 있었느냐.”
“네.”
궁녀는 환히 웃으며 대답해보였다. 시종이 혀를 쯧쯧 찼다.
“궁녀들 사이에 네가 매 밤마다 가는 곳이 어디냐구 내게 안달이더라. 내가 입을 다무느라 혼났단다.”
“고맙습니다. 저도 다른 이들을 떼놓고 오느라 혼났습니다.”
“그래, 그래. 왕께서 찾으신다. 얼른 가자꾸나.”
“잠시만.”
궁녀가 몸을 휙 돌렸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손을 뻗었다. 궁녀가 바닥을 더듬더니 날래게 꽃 한 송이를 주워 올렸다. 그리고 재빠른 솜씨로 머리에 꽃을 꽂았다.
벚나무 아래에서 한 그림자가 궁녀가 시종을 따라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궁녀와 시종이 건물의 그림자에 삼켜지고 한참이 더 지나도록 그림자는 벚나무 아래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역시나 그녀로구나. 역시나.
염려가 그려댄 개루가 꽃을 집어던지던 그림이 눈앞을 지나갔다. 눈을 감아도 눈꺼풀 안에서 숱한 그림들이 나타났다. 개루가 꽃을 안고 물고 하는 광경이.
‘두렵습니다.’
두렵습니다. 그토록 전장에서 사람이 깨지고 죽는 것을 보아도 거듭 두렵습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이 내 안에서 사람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깨어지는 것이 너무나 두렵습니다. 그대를 보는 것이 예부터 담고 있던 정인을 다시 보는 것 같아 즐거웠습니다. 어린 날의 내가 그리하였듯 꽃을 꺾어 주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그대의 이름을 듣는 순간 그대가 내가 품고 있던 정인을 깨어버릴까.
꽃을 꺾으며 즐기던 내 마음도 깨어질까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대가 왕의 여자가 되어 버린 것을 경하할 수도 없는 제 자신이 두렵습니다.
차라리 그대를 품고 달아날 수도 없는 제 자신이 두렵습니다. 또는 그런 상상을 하는 제 자신이 두렵습니다.
그러니 마지막 한 송이를 두고 이별의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이제 꽃이 질 때가 왔음을 알아주십시오.
이제 나의 정인으로 남을 사람이여.
‘부디 행복하십시오.’
바람이 불어 벚나무 그림자를 흔들었다. 철쭉 봉우리 하나가 툭 떨어졌다.
다른 그림자는 없었다. 벚나무가 쓸쓸이 가지를 흔들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