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아차산성 밑
9. 아차산성 밑
재증걸루가 비실거리며 눈을 떴을 때였다.
어느덧 동녘이 푸른 빛으로 바래 있었다. 수레바퀴가 돌부리에 걸렸는지 세차게 흔들렸다. 재증걸루는 얼굴을 찌푸렸다. 어깨가 아려왔다. 머리뼈를 절절히 흔드는 이마의 통증은 두 번째였다.
재증걸루가 희부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반 토막 난 시야에 수레 안이 한 번에 들어왔다. 통나무가 세로지르는 살이 사방을 두르고 있는 수레 안에는 재증걸루 말고도 다른 이들이 굴비두름처럼 오라를 이고 있었다. 옥차 밖에는 병사들이 횃불을 든 채 말없이 죄인들을 호송하고 있었다.
수레가 다시 한 번 돌부리에 걸리자 소가 느린 울음을 뱉었다.
재증걸루는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못쓰게 될 걸세.”
고이만년은 왼쪽 눈을 찡긋거려 보았다.
“그 왼쪽 눈처럼 말이네.”
재증걸루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뼈가 조각이 난 모양이다. 이미 퍼렇게 부풀어 오른 왼쪽 어깨는 수레가 흔들릴 때마다 조각난 뼈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그제야 재증걸루는 팔이 묶이지 않은 것은 자신뿐임을 알았다. 팔의 통증을 참으며 재증걸루는 천천히 수레 안을 둘러보았다.
고이만년. 가승섭연. 지증설이. 저이구.
저마다 쓴 미소를 입에 물고 있었다. 따라 그 미소를 입에 물며 재증걸루는 이미 자신도 짐작하고 있는 바를 물어보았다.
“어디로 가는 겝니까?”
대꾸한 것은 맞은편에 꿇어앉아있는 저이구였다. 삼십대 중반의 나이에 벌써 이마에 한일자 주름이 진하게 그어져 있었다.
“아차산성 밑.”
그 짧은 대꾸를 재증걸루는 고소하며 받았다.
“처형장이로군요.”
대꾸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수레가 흔들렸다. 가승섭연이 중심을 잡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며 재증걸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수레 안의 무인들은 의외기도 하고 짐작한 바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한자리에서 볼 일은 드문 무인들이었다.
“계획들은 있으셨습니까?”
고이만년이 움찔거렸다. 그러나 재증걸루의 눈을 맞보며 대답하는 것은 다시 저이구였다.
“개루가 짐작하리라고는 이미 생각해두었네. 다들 일자를 보아 고구려로 가려 했던 즉.”
“무슨 말이오!”
지증설이가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 저항이라도 한 모양인지 지증설이의 입가에 핏자국이 묻어있었다. 거칠게 피 섞인 침을 뱉으며 지증설이는 뾰족한 턱으로 수레 주위의 병사들을 가리켰다. 그러나 고이만년이 허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다 끝난 일일세. 저이구.”
고이만년과 함께 고개를 주억거리며 저이구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수에 가면 고구려와의 끈이 있다 들었소. 정확히 누구인지는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는 않겠으나 자네도 짐작은 하겠지. 그 곳에서 배를 내어 받으면 고구려는 금방이오.”
“금방이라······.”
재증걸루는 대꾸하며 벌렁 수레 위에 누웠다. 어깨가 아려왔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꽃놀이라도 온 양 행동하는 재증걸루를 보고 다시 지증설이가 무어라 말을 꺼내려 했으나 먼저 재증걸루가 말을 잘랐다. 고이만년이 자꾸 손목을 움직거리는 것을 보고 한 말이다.
“손목이 많이 아픕니까?”
그제야 손목 움직이는 것을 멈추며 고이만년이 씩 웃어보였다.
“자네는 좋겠네. 난 살이 쪄서 말이지.”
재증걸루도 마주 웃었다.
“금방입니다. 형님.”
금방이었다. 재증걸루의 성한 오른손이 날래게 수레 밖의 병사를 잡아챘다. 병사의 몸이 수레의 나무 살에 부딪치는 순간, 재증걸루의 손이 병사의 허리춤을 더듬었다. 흰 칼날이 새벽빛에 번득이더니 순식간에 재증걸루가 팔을 움직였다.
병사가 목에 박힌 칼에 피거품을 물며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을 재증걸루가 도왔다. 목에서 칼이 빠지기가 무섭게 병사는 이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쓰러졌다.
순간 수레를 둘러싼 병사들이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병사들이 섣불리 무기를 내지르기 전에 소가 먼저 고함을 지르며 달아나려 했다. 당황한 병사들 틈 한 병사가 소를 묶은 밧줄을 칼로 내리쳤다. 동시에 다른 병사가 고함을 지르며 수레 쪽으로 달겨들었다.
병사의 칼이 가승섭연의 어깨에 닿는 듯 했지만 재증걸루가 칼을 던진 것이 먼저였다. 깊게 박히지는 않은 듯 칼을 잡고 주춤하는 병사의 팔을 붙잡고 두 발로 내지른 것은 지증설이다. 병사의 가슴팍에서 칼을 뽑자마자 지증설이는 칼을 휘둘러 가승섭연과 자신 사이의 오랏줄을 베어냈다. 완전히 베어낸 것은 아니지만 가승섭연이 몸을 구르며 밧줄을 끊어냈다.
재증걸루 쪽으로 칼이 날아들었지만 나무를 치고 말았다. 재증걸루는 재빨리 오른손으로 병사의 멱살을 잡아 휘둘렀다. 나무에 이마를 받은 병사가 피를 쏟으며 허둥이는 사이 다른 병사가 창을 내질렀다. 그러나 창을 받은 것은 방금 이마를 찧은 병사였다. 재증걸루는 창에 찔려 버둥거리는 병사의 손에서 칼을 넘겨받아 가승섭연에게 넘겼다.
가승섭연이 칼을 받아 등 뒤로 찔러 들어오는 칼을 빗겨 막았다. 병사의 칼이 나무와 가승섭연의 칼 사이에 눌려 옴쭉달싹 못하자 저이구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 병사의 얼굴에 발을 날렸다. 그 덕에 수레에 덩달아 나자빠지게 된 고이만년이 애꿎은 비명을 질렀다.
얼굴에 발을 맞은 병사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숨통이 꿰뚫린 이후였다. 손목의 오라를 마저 잘라낸 지증설이가 아까 죽은 병사가 수레에 기대놓은 창을 단단히 그러쥐었다. 말을 탄 병사가 벌써 저쪽 어스름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거리를 가늠하던 지증설이가 나무살 밖으로 창을 던졌다.
창이 고개를 허청이며 어스름쪽으로 사라졌다. 보이지는 않지만 억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무언가 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만 빈 안장을 이고 말이 바삐 달아나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금방이구먼.”
고이만년이 소매로 땀을 씻으며 중얼거렸다. 지증설이가 저이구의 손목을 풀어주며 대꾸했다.
“서두릅시다.”
묶여있던 손목을 매만지며 저이구가 말이 사라져간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말발굽 소리가 희미했다.
“빈 말이 궁에 도착하려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글쎄······.”
고이만년이 발로 수레를 몇 번 차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마 온 거리도 있을 터이니 두 시각 즘이면 닿을 터이네.”
“그때는 동이 틀 무렵입니다.”
지증설이가 차갑게 말을 끊었다.
“서두릅시다.”
다시 저이구가 말을 내던졌다. 고이만년이 건들거리는 나무 하나를 발견했다. 무인들이 발로 그 나무를 걷어차는 것을 보며 재증걸루는 금방이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금방, 금방.
이라도 뒤에서 개루의 병사들이 쫓아 나올 것처럼 일당들이 달아난 지 두 시각 즈음. 일당은 한수에 닿아있었다. 걸음이 느린 저이구는 숨이 찬지 연신 헛구역질을 웩웩 해댔다. 고이만년은 말도 꺼내기 숨찬지 옷소매로 땀을 닦으며 강 근처의 집 한 채를 손가락질 해보였다.
이전에 본 일은 없건만 그 집의 괴이한 모습으로 재증걸루는 그 것이 도미의 집임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