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미끼
8. 미끼
“꼬리가 길면 결국 밟히는 법이지.”
개루가 고소했다. 개루의 손에 들린 부젓가락은 붉게 달구어져 있었다. 부젓가락이 한숨같은 소리를 냈다. 푸스스스스스스.
“내가 보낸 여자는 어찌 하였나.”
재증걸루가 입을 열려다가 다물었다. 그러다가 피식 웃었다. 개루의 부젓가락이 재증걸루의 눈앞에서 대롱거렸다. 푸스스스스스.
“내가······.”
“······.”
“잡아먹었다.”
“뭐?”
개루가 반문했다.
“위례성에 고기반찬이 없기에 내가 먹었지.”
껄껄껄껄껄껄. 개루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은 기침에 막히더니 다시 한번 탁 터져 흘러나왔다. 주체할 수 없이 여러 줄기로 새던 웃음이 갑자기 한 순간 닫혔다.
“거짓말.”
개루가 조소했다. 푸스스스스스스.
“계집을 놓아주었더군. 그것도 돈과 패물을 들린 채.”
계집. 계집이라. 개루가 보낸 계집의 얼굴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계집이 입고 있던 녹색 저고리가 횃불에서 타오르는 불씨처럼 떠오르다 너실너실 공중으로 사라졌다. 재증걸루는 눈을 꾹 감았다. 눈에서 금질 기어 나오는 것은.
“계집은 고구려 국경에서 붙잡혔다. 초병이 잡아 목을 벴다. 아직도 장대에 꽂혀있겠지.”
재증걸루가 고개를 들었다. 알지 못하는 말이다.
“초병에게는 네 이름을 대었다 하더구나.”
“······.”
재증걸루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에서는 붉은 불똥이 너울거렸다. 탈춤 추는 이의 손끝에 달린 것처럼 넘실거리던 불똥이 고개를 숙이고 다시 희뿌연 것이 몰려왔다. 옛사랑의 얼굴도 아니다. 아니, 옛사랑의 얼굴인지도 모른다. 다만 이제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정말 재증걸루의 눈을 흐리는 것은 그 이름도 모르는 궁녀의 얼굴이다.
“말 하거라. 어찌 한 나라의 장수가 고구려의 첩자 짓을 하였더냐?”
“······.”
말 하지 않았다. 할 말도 없을 뿐더러. 그저 재증걸루는 눈 안에 백태처럼 쌓여가는 희뿌연 얼굴을 몰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재증걸루가 답하지 않는 것을 보며 개루는 웃었다.
다시 껄껄거리며 웃던 개루가 어디론가 나갔다. 부젓가락을 든 채.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방금까지 눈 앞을 가리던 얼굴이 순간 또렷하게 아려왔다. 재증걸루는 고개를 들고 개루를 찾았다. 다시 한 번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옥방을 뚫고 재증걸루의 앞섶을 풀어헤쳤다. 재증걸루가 입을 벌렸다.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지를 않았다. 대신 울음소리 같은 괴이한 비명이 재증걸루의 입을 메웠다.
다시 한 번 비명소리가 들리고서야 개루가 다시 옥방에 들어섰다. 개루의 그림자가 눈 앞에 어리기가 무섭게 재증걸루가 몸을 날렸다. 그러나 손목과 발목을 단단히 묶은 매듭은 재증걸루의 몸뚱이를 바닥에 패대기쳤을 뿐이다. 생선처럼 퍼득이는 재증걸루의 머리 위에 개루의 버선이 놓였다.
“듣기 좋더냐?”
쇳소리가 들렸다. 재증걸루의 눈앞에 부젓가락이 떨어졌다. 살점이 묻어있는 부젓가락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흘러나왔다. 개루가 다시 무어라 입을 열려 하는 순간 재증걸루가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개루의 몸이 나자빠졌다.
부젓가락을 입에 물고 다시 한 번 재증걸루가 몸을 집어던졌다. 그렇지만 꼴사나운 움직임에 지나지 않았다. 몸을 일으킨 개루가 코웃음을 치며 발로 재증걸루를 걷어찼다. 턱을 얻어 채인 재증걸루가 젓가락을 뱉어냈다.
“멍청한 놈.”
개루가 숨을 헐떡였다. 그리고 다시 화로로 손을 뻗어 부젓가락을 쥐었다. 그걸 보는 순간 재증걸루의 눈앞이 다시 하얗게 바래왔다. 어디선가 머리카락이 자글자글하게 타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소리. 흐느끼는 소리가 재증걸루의 귓바퀴를 조여 왔다.
“멍청한 놈!”
개루가 고함을 치며 손을 뻗었다. 재증걸루는 불에 달군 쇠가 몸에 닿을 것을 생각했지만 움직인 개루의 손은 그 반대편이었다. 뺨을 후려 맞은 재증걸루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늑대의 눈깔이로다! 무엄한 놈!”
다시 개루의 손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재증걸루의 입이 개루의 손을 물었다. 질끈, 개루가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리고 오른손에 들린 부젓가락으로 무작스럽게 재증걸루의 얼굴을 찔렀다. 붉은 피가 튀었다. 다시 부젓가락이 떨어졌다. 개루가 왼손에 묻은 피를 비단옷으로 닦으며 헐떡였다. 재증걸루가 다시 고개를 들더니,
웃어 보였다. 개루의 주먹이 다시 재증걸루의 얼굴을 후려쳤다. 재증걸루가 입을 열었다.
“알고 보니 왕도 범은 아니더이다.”
“미친놈.”
개루가 곧바로 뇌까렸다. 어질어질 흔들리던 개루의 눈이 화로에 꽂혀 이글거리는 부젓가락을 향했다. 그러나 개루가 다시 눈을 거뒀다.
“고구려라······. 네가 그럴 리 없지. 암.”
“······.”
역시 재증걸루는 입을 열지 않았다. 자신의 말을 받아 개루가 다시 지껄인다.
“그깟 계집이냐? 그깟 계집이야?”
“말조심하시오. 내 계집이외다.”
이번에는 재증걸루가 말을 쏘아붙였다. 말에 뒤이어 개루를 노려보는 것은 형형한 눈깔이었다. 개루의 얼굴에 다시 번들번들한 미소가 돌았다.
“네 계집? 네 계집? 네 계집이라 하였느냐?”
재증걸루가 이를 앙다물었다. 그러자 얼굴에서 붉은 피가 튀었다. 그제야 재증걸루는 방금 부젓가락이 지진 것이 왼쪽 눈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뜨거운 피가 볼따구니를 타고 흘러 앞섶을 적셨지만 재증걸루는 피가 뜨거운 것을 몰랐다. 눈. 눈이 뜨겁다. 아니, 뜨거운 건 지져진 왼쪽 눈이 아니다. 눈물이 찬 오른쪽 눈. 저 개루를 담고 있는 성한 눈깔이 너무나도 뜨거웠다. 개루가 이죽거리는 투로 말을 이어갔다.
“네 계집은 없다, 어리석은 놈아. 네 계집이란 이 세상에 없어. 멍청한 놈. 멍청하고도 멍청한 놈. 네 계집은 본디부터 없었다. 아랑이는 내 것이었다.”
재증걸루가 숨을 들이쉬었다.
“무어라·····. 네 지금 무어라 하였느냐?”
이번에 숨을 들이마신 것은 개루였다. 개루의 눈자위가 번뜩였다.
“뭐······. ‘너’라 하였느냐?”
“네 놈이······. 네 놈이 어찌 아랑이를 아느냐. 네 놈이 세상 것을 다 안다 해도······. 네 놈이 어찌 아랑이를 아느냐?”
재증걸루가 다시 악을 썼다. 개루가 다시 웃었다.
“그 아이 이름도 몰랐느냐?”
앞뒤사정을 알려는 듯 몸을 숙이던 개루가 다시 몸을 뺐다. 어차피 이 따위 것들의 사랑놀음을 들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이제 고삐를 쥔 것은 개루다. 개루가 다시 한번 너털웃음을 토해냈다.
“저 때문에 옆에서 얼굴 살이 타고 있는 데 그 이름도 모른단 말이냐?”
다시 재증걸루가 몸을 퍼덕였다.
“네 계집, 네 계집. 네 계집, 네 계집, 네 계집, 네 계집!”
개루가 고함치며 재증걸루에게 다가섰다. 이제 둘의 얼굴은 손가락 하나 비비고 들어갈 틈도 없이 맞닿아있었다. 개루가 내뿜는 숨이 재증걸루의 수염을 간질였다.
“네 계집은 없다. 아랑이건 뭐건. 그건 내 계집이었고.”
말을 내뱉으며 개루는 재증걸루의 눈자위가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젠 내 계집도 아니다. 오늘밤 저 년 위에 올라탄 병사만 기십이 넘을 것이다.”
다시 재증걸루가 알 수 없는 소리를 토해냈다. 이제 재증걸루는 눈을 감지 않았다. 오래 잊고 지냈던 그 희미한 윤곽에 궁녀의 얼굴이 겹쳐졌다. 물에 띄운 기름처럼 서로 비비고 있던 둘의 모습이 갑자기 하나로 합쳐졌다.
아랑. 아랑. 아랑.
하인들이 나무를 하러 갈 때면 꼭 빈 지게 위에 올라타던 아이가 있었다. 도끼가 나무를 찍어내는 소리가 산을 흔들던 순간에 덤불을 뒤지던 아이가 있었다. 하인들이 나뭇짐을 이고 내려오는 날이면 한 손가락으로 꽃대궁을 흔들며 같이 산을 내려오던 아이가 있었다. 그날 저녁이면 그 꽃을 머리에 꽂던 계집애가 있었다.
열 여남은 나이를 먹고 아비를 따라 궁으로 들어가며 계집애의 머리 위에서 흔들거리던 꽃을 떠올리던 소년이 있었다. 다른 소년들과 함께 목도를 휘두르면서도. 떨어지지 않고 머리 위에서 흔들거리던 그 꽃을 떠올리던 소년이 있었다.
소녀도 나이를 먹고, 시집을 가고, 애엄마가 되고, 졸고 있는 남편 곁에서 물레질을 하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며 소년은 웃었다.
소년도 나이를 먹고 장수가 되고, 다만 장가는 들지 않고. 그저 어디선가 물레질을 하다 졸고 있을 소녀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그저.
고구려도 신라도,
그리고 개루도 손이 닿지 않는 먼 그 곳에서 졸고 있을 소녀를 생각하며.
가끔 덤불 위에서 흔들거리고 있는 꽃을 꺾곤 했다.
산제는 우연이었나 싶었다. 그 흰 얼굴은, 그래. 그 흰 얼굴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내가 그랬던 게다, 미쳤던 게다. 다시 보지 못할 얼굴이었다.
아니, 아니다. 어쩌면 그저 같은 이름일지 모른다. 아랑이라는 이름이 어디 옥처럼 귀한 이름이더냐. 강가에 차돌처럼 흔한 이름이 아니더냐.
그러나 재증걸루는 알고 있었다. 그 애가 맞다. 그 애가 맞다. 그 아랑이다.
머리위에 꽃을 틀어 올리던 그 모습이 생생했다. 손가락이 거미처럼 물레 가락 사이를 오가는 배틀 북처럼 꽃의 줄기를 이어나가던 그 모습이.
다만 어찌하여 내가 알지 못했을까. 어째서 일찍 깨닫지 못했을까. 이 지독한 놈이 말하기 전까지 까맣게 알지 못했던가 그것이 재증걸루는 역했다.
소년이 나이를 먹고, 궁에 들어가고, 장수가 되고······.
소녀도 나이를 먹고, 궁에 들어가고, 궁녀가 되고······.
이제 그 먼 백리길을 돌아 같이 있구나. 허허, 허허, 허허허허허······.
재증걸루의 입에서 웃음이, 실성한 듯한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을 보며 개루는 고개를 저었다. 개루가 나직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네가 좋았다.”
재증걸루는 개루를 올려다보았다.
“그 아름다움이 내 것이기에, 오직 내 것이기에 좋았다.”
개루와 재증걸루의 눈이 맞닿았다.
“땅 위의 모든 것이 내 것이듯이 그 아름다움도 내 것이기에. 그 흠집을 가진 아름다움까지 내 것이기에.”
재증걸루는 고개를 저었다.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너는 내 개다. 너는 내 그릇이다. 너는 내 술잔이다. 너는 내 바둑돌이고······.”
그러나 재증걸루가 고개 젓는 것을 보지 못한 것처럼 개루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왜 그랬느냐. 왜 그랬느냐. 왜······. 왜 날 물었느냐. 왜 내 손아귀에서 떨어져 나갔느냔 말이다. 내가 네게······.”
여자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재증걸루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다. 그럴 리······.
“그 계집 때문에······. 그 계집 때문이라면.”
아랑의 얼굴이 재증걸루의 눈앞을 맴돌았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재증걸루 뿐은 아니었다. 개루 역시 말을 멈췄다. 개루 역시 아랑을 보고 있었다. 이불 아래 훤히 드러난 어깨. 밭고랑 같던 정수리에 피어나 있던 꽃. 두 남자는 같은 꽃을 보고 같은 향기를 맡았다.
소리를 지른 것은 개루다.
“여봐라, 아무도 없더냐!”
누군가가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종장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재증걸루는 무심히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궁에 들어온 사람은 적이 궁에서 죽는 법이다. 혹여 죽는다면 모르되 묶어 놓은 여자는 내어다가 무수리로라도 쓸 것이되 내 눈에는 더 이상 뜨이지 않게 할 것이며!”
무섭다, 재증걸루는 생각했다. 내 것, 내 것, 내 것······. 문득 재증걸루의 눈에 다시 물이 괴었다. 미안하오······. 미안하오······. 어찌 그렇게 살겠소······. 내 미안하오······.
“이 자는 내 밑으로 들어온 자가 없는 이다. 중신들을 불러라.”
다시 대답 소리가 들렸다. 발자국 소리가 멀어졌다. 그러나 개루는 개의치 않고 마저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어갔다.
“칼은 내가 직접 고르겠노라.”
두 시각이 흐른 후.
남자들은 말없이 두 사내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 쪽은 머리를 곱게 빗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네들이요, 한 쪽은 얼굴이 탄 곽곽한 사내들이다. 그러나 모두 하나같이 부엉이처럼 눈이 툭 불거진 채 두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내의 손에 들린 목도가 꺼뜩이며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소쩍새가 울었다.
두 남자 모두 이마가 땀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횃불이 일렁였다. 마치 싸움을 재촉하는 것처럼 불길이 일다가 수그러들곤 했다.
어디선가 소쩍새가 다시 울었다.
싸움은 일순간에 끝날 것이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소쩍새가 다시 흐느꼈다.
순간 목도 사이에서 불꽃이 튀는 듯 했다. 두 목도가 엇갈려 빗겨나간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서로 목도를 치고 벌린 거리는 약 십 보 정도.
그대로 목도를 치켜 올린 개루의 팔은 아직 후들거리고 있었다.
설령 몸에 목도가 닿는 다 하더라도 힘을 빼는 일은 없을 것이다. 붉은 비단띠를 묶는 일도 없을 것이다. 반병신이 된다 하면 다행이다. 방금 재증걸루가 노린 곳은 목이었다. 개루는 겨우 목도를 엇갈려 막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반격은 고사하거니와.
목이 꿰뚫리거나 목뼈가 부러져 어깨 위에 덜렁거리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침을 삼켰다. 입 안이 거칠었다. 마른 침이라도 내기 위해 억지로 턱을 움직이며 개루는 목도를 고쳐 쥐었다. 땀이 밴 손이 유달리 미끄러웠다. 개루는 재빨리 손을 옷자락에 문질러 닿았다.
재증걸루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이쪽을 보는지는 불분명했다. 멍하니 한쪽 눈을 이쪽으로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부젓가락에 지져진 왼쪽 눈에서 땀인지 터친 눈알인지 모를 멀건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개루는 그 왼쪽을 눈여겨보며 다시 목도를 고쳐 쥐었다.
사람에겐 버릇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개루는 제 목소리를 되뇌고 되뇌었다.
재증걸루는 거친 숨을 고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보고 있었다.
한 쪽 눈으로도 개루가 숨을 고르고 손바닥을 옷에 비비고 하는 것이 보였다. 오히려 두 눈으로 보던 때보다도 개루가 더 환히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왼쪽 눈에는 멍멍하게 통증이 자리 잡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반대로 재증걸루는 보지 못하고 있었다.
재증걸루는 반드시 봐야하는 것을 더듬어 찾고 있었다.
대국을 이기기 위해서는.
무어라 뒤에 이어지던 개루의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대국을 이기기 위해서는.
재증걸루 역시 개루의 말을 되뇌었다.
개루가 목도를 고쳐 쥐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후려칠 수 있다, 재증걸루는 속으로 생각했다. 개루의 얼굴이 유난히도 환히 보였다. 횃불이 일렁이며 개루의 얼굴에 시시각각 변하는 그림자를 흔들어대는 것도. 개루의 콧등에 반질반질하게 땀이 어리는 것도. 개루의 눈동자가 움직이다가 흔들리다가 어느 순간 빤히 멎은 것도.
순간 재증걸루는,
-소쩍새가 울었다.
한 발짝을 옮겼다. 그때 개루가 왁 달려들었다. 개루의 목도가 재증걸루의 어깨뼈를 날려버리는 순간이었다. 재증걸루는 눈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그것은 엄청난 고통이었고 또 동시에 엄청난 놀라움이었다. 비틀거리며 몸을 돌리는 재증걸루의 머리를 향해 다시 개루의 목도가 날아들었다. 개루는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재증걸루는 겨우 움직이는 오른팔로 목도를 올려 그 일격을 막았다. 그러나 개루는 그대로 목도를 내리쳤다.
개루가 다시 한 번 목도를 휘두르려 어깨를 올렸을 때, 이미 재증걸루는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재증걸루의 이마에서 피가 한 줄기 흐르고 있었다. 개루는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 무인들이 엉거주춤 일어서 있었다. 개루는 그들의 손이 허리춤에 가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목소리를 내고 싶었지만 그것이 힘들었다. 다시 한 번 숨을 고르며 개루는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막 뒤에서 병사들이 무인들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