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삼국유사

도미설화 10

10. 한수의 맹인, 도미

by 엽서시

10. 한수의 맹인, 도미

담벼락에 기대 졸고 있던 왈패 하나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늦었다.

날랜 발에 따귀를 맞은 왈패가 턱을 잡고 다시 일어났을 때 눈앞에 보이는 건 동녘 하늘을 닮은 칼날이다. 왈패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칼에 묻은 핏줄기를 보며 몸을 떨었다.

다른 왈패들이 놀라 몸을 일으켰다. 개 중 덩치 깨나 있어 보이는 왈짜가 얼른 허리춤에 손을 갖다 댄다. 그러나 허리에 맨 날붙이를 미처 끌러내기 전에 벌써 재증걸루들이 뽑아낸 칼에 기가 죽은 모양이다.

“어허, 이럴 것 까지 없다니까.”

고이만년이 애써 만류하는 듯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썩 앞으로 나섰다. 개중 말이 통할 것 같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왈짜에게 다가섰다.

“도미는 여즉 자고 있나? 하긴 뭐 장님이 낮밤이 있겠냐마는.”

“거 입이 뚫린 입이요, 마구난 창구멍이요? 말뽄새 하고는.”

왈짜가 댓 발은 나온 입을 불퉁거려보였다.

“어허, 거 참. 거 눈은 뚫린 눈인가, 마구 난 옹이구멍인가? 좋은 말로 할 때 한 번 들어가 보게.”

고이만년이 슬슬 다가서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재증걸루가 고이만년의 앞을 가로막았다.

“걸루.”

“이 자들과 말다툼할 시간이 없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얼굴에 왈짜는 놀란 듯한 표정이었으나 재증걸루의 얼굴이 어린 것을 알고 금방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왈짜가 우쭐하는 듯이 다가섰다. 재증걸루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재증걸루는 왈짜의 덩치를 보지 못한 것처럼 제가 든 칼을 땅에 집어던졌다.

피가 묻은 칼이다.

“시간이 없다. 어서 도미를 불러라.”

“이 사람 귀는 뚫린 귓구멍인가, 마구 난 쥐구녕인가. 도미가 뉘 집 개여? 아침 댓바람부터 부르라 마라 하게?”

무인들의 분위기가 일순간 냉랭해졌다. 왈짜도 그 분위기를 대충 눈치 챈 듯 했으나, 아직 실감을 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역시 재증걸루가 한 팔을 쓰지 못하는 것을 어림잡고 있었다. 설령 두 팔을 쓴다 한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낮은 인물이니 낮추어 보는 것이 틀림없었다. 왈짜의 손이 슬쩍 허리춤으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어디 손 대 보거라.”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재증걸루의 목소리에서 흘러나왔다. 왈짜가 눈을 부릅뜨며 허리춤의 날붙이를 쥐는 순간,

-재증걸루는 반 보 옆으로 돌려 피했다.

지증설이의 칼이 흰 빛을 뿌렸다. 왈짜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날아간 손가락이 저만치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순간 왈패들이 모두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지만,

“어디 손 대 보거라!”

는 재증걸루의 외침에 모두들 동작을 멈췄다.

왈짜의 신음소리만이 정적 중에 흐르고 있었다. 그때 문소리가 들렸다. 모두의 눈이 열리는 문 틈새로 꽂혔다. 도미다.

부성한 앞머리를 젖히며 나온 도미는 히죽거리는 표정이었다. 고이만년이 얼른 앞으로 썩 나섰다.

“도미!”

그러나 도미는 고개를 갸우뚱 해보였다.

“이게 누구시더라?”

고이만년이 얼른 앞서 도미의 성한 왼손을 쥐었다. 그 손에 절렁거리는 주머니가 쥐여져 있음은 물론이다. 주머니와 함께 고이만년의 손을 쥔 도미는 슬쩍 고이만년의 손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더니 도미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번졌다.

낄낄낄낄낄-

도미의 웃음소리가 들리자 손가락이 잘린 손을 칭칭 묶은 왈짜가 불거진 눈을 번득이며 손짓을 했다. 왈패들이 한숨을 쉬며 허리춤에 멎어있던 손을 올렸다.

“오랜만일세-.”

“그래, 나도 오랜만일세.”

고이만년이 바삐 입을 열었다.

“도미, 일이 바쁘게 되었어. 한 시가 바쁘네. 어서 배를 내주-”

“바쁘다니?”

도미의 눈꺼풀이 팔랑거렸다. 화상으로 얽어 있는 눈꺼풀 밑으로 희게 변색된 눈자위가 번득였다. 도미는 한 손바닥을 벌리고 웃었다. 고이만년이 옷섶에서 쌈지 주머니를 꺼내어 도미에게 던졌다. 쩔그렁 소리를 내며 도미가 주머니를 받았다.

“일이, 일이 그렇게 되었네. 그 이상은 묻지 말고······. 오늘 오중이면 자네도 알 터이니.”

도미가 빙글거리며 주머니를 앞섶에 넣었다.

“일이 발각되었나 보군.”

“그렇게 됐네.”

“그렇게 됐나 보구만.”

도미는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모두 몇인가?”

“나까지 다섯일세.”

도미가 손짓했다. 허공중에 한 손짓이지만 왈짜가 재빨리 도미의 옆에 가 붙었다. 도미가 왼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그러자 주춤거리던 왈짜가 칭칭 묶은 오른손을 갖다댔다. 그러더니.

아욱, 왈짜가 고통을 참는 소리가 허공을 내질렀다. 도미가 있는 힘껏 왈짜의 오른손을 쥔 까닭이다.

“근데 뱃삯이 없네.”

도미가 왈짜의 손을 놓으며 중얼거렸다.

“이 돈은 우리 애 오른손 값인데.”

지증설이가 칼날을 휘두르려는 것을 가승섭연이 쥐었다. 지증설이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도미를 보고 있었다. 엔간한 사람이라도 옴쭉 못할 눈빛이었지만 도미는 태연했다. 숨을 고르며 가승섭연이 말을 꺼냈다.

“우리는 지금 돈이 없네. 어찌하면 좋은가?”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도미가 히죽 웃었다.

“돈이 없으면 벌어얍지요, 나리.”

일부러 나리에 힘주어 발음하는 것을 들은 지증설이가 다시 몸을 앞으로 솟구쳤다. 고이만년이 만루하며 물었다.

“어쩐 수로 말인가?”

“나리와의 정을 봐서 숨겨드리기는 할 터이니.”

도미의 손가락이 대충 왈짜가 있는 어디즘을 가리켰다.

“그동안은 이놈과 함께 그 칼 좀 쓰시지요.”

고이만년이 무어라 입을 열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나선 것은 재증걸루였다.

재증걸루가 바지춤에 손을 집어넣었다. 한참 뒤적거린 끝에 무언가를 주먹에 쥔 것을 재증걸루가 직접 도미의 손에 쥐어주었다. 다른 무인들도 의아한 듯이 도미의 주먹을 바라보았다. 도미가 고개를 기울였다. 도미의 손에 들린 것을 본 왈짜도 놀란 표정이더니, 금방 도미의 귀에다 속닥이기 시작했다.

“금거북이?”

왈짜는 여전히 손바닥으로 입을 가린 채 였다.

“대가리만?”

말을 이은 도미가 입으로 금거북이의 대가리를 가져갔다. 어금니로 한번 짓물어보더니 이내 만족한 표정이었다. 도미의 손에 들린 것은 손가락 한 마디만한 금거북이의 대가리였다. 머리 쪽에는 방금 생긴 도미의 잇자국이 흐릿했다.

“왜 대가리만 있나?”

“몸통은.”

재증걸루가 입을 열었다. 도미가 다시 귀를 기울이자 왈짜가 다시 속닥이기 시작했다. 도미가 그러거나 말거나 재증걸루는 말을 이었다.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때 주마.”

낄, 낄, 낄낄낄낄낄-

도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리는 뭘 믿고 내게 선불로다가 이런 걸주시나?”

“다시 가져가면 그뿐이다.”

“무슨 수로?”

재증걸루가 땅에 떨어진 칼을 턱짓 했다. 대답이 없어 의아해하는 도미에게 다시 왈짜가 속닥거렸다. 도미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듣자하니 외팔이시라는데?”

재증걸루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허리를 숙여 칼을 쥐었다.

“어차피 칼도 한 자루다.”

낄, 낄, 낄낄낄낄낄낄낄-

참다가 터져 나온 듯한 웃음이 도미의 몸을 뒤흔들었다. 한참 웃던 도미가 왈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르신들이 바쁘시단다. 어서 배를 내어 주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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