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고구려
12. 고구려
(넓은 방. 아무런 장식이 없는 굵은 기둥들은 왕이 앉은 자리를 대칭으로 천장을 받치고 서있다. 바닥에는 범들과 곰을 비롯한 뭇짐승들의 가죽이 깔려 있다. 기둥들 뒤로는 단단히 철갑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저마다 중장비를 든 채 말없이 서 있다. 왕 역시 무장을 한 채다. 왕의 허리에 찬 칼집에도 단단히 칼이 채워져 있다. 병사 서넛이 눈을 가린 남자들을 끌고 들어온다.)
(왕이 말없이 손짓한다. 그러자 병사들이 남자들의 눈가리개를 거칠게 푼다. 눈이 풀린 남자들은 입은 열지 않지만 방의 분위기에 저마다 경악한 듯하다. 남자들은 모두 다섯이다.)
왕:(내키지 않는 말투)고구려에 당도한 것을 환영하오. 백제인들이여.
(차가운 분위기에 남자들은 저마다 당황한 눈치다. 그러나 남자1이 눈치 빠르게 앞서 나와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한다.)
남자1: 백제의 무리들이 고구려의 왕께 인사드리옵나이다.
(남자2와 남자3은 따라 고개를 숙인다. 그러나 남자4는 아직 눈치를 보는 듯 하다. 남자5는 멀찍이 떨어진 채 묵묵부답이다.)
왕:(여전히 내키지 않는 말투)그래. 어쩐 일인가?
남자1: 백제의 무리들이 감히 고구려의 왕께 사뢰나이다. 부도한 백제의 왕이 짐승과 같은 신라의 무리와 손을 잡고 같은 핏줄인 고구려를 치고자 아래로는 백성들을 쥐어짜고 위로는 하늘을 능멸하니 백제의 산천초목이 치를 떨고 분루를 떨구었나이다. 하여 충언을 하는 신하들을 물리치고 계집과 잡기를 가까이하더니 이제 충신들을 물리치는 즉. 감히 고구려의 왕께 도움을 구하고자 하나이다. 백제는 본디 고구려의 동생과 같으니 형으로써 동생의 부도를 바로잡게 하소서.
(남자1의 말을 들으며 왕은 몸을 앞으로 숙인다. 그러다가 남자1의 말이 모두 끝나자 왕은 몸을 뒤로 젖히며 수염을 쓰다듬는다.)
왕:(비웃음을 흘리며)충신의 무리라?
(남자1이 몸을 떤다.)
왕:(다시 수염을 매만지며)어찌한다······. 고구려는 백제의 충신이 필요치 않느니라.
남자1:(여전히 몸을 떨며)통촉하여······.
왕: 또한 고구려는 백제의 배신자도 필요치 않느니라.
(남자1, 몸을 떤다. 다른 이들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당황한 듯)
왕:(웃음을 흘리며)긴 말도 필요 없다. 동생 근개루가 무슨 작당을 꾸미건, 설령 신라와 손을 잡건 고구려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때가 되면 하늘이 고구려의 손을 들어줄 터인즉.
(문득 왕이 말을 멈춘다. 그러더니 날카로운 북방 사투리로 누군가를 부른다. 갑옷을 입은 시종 하나가 뜀걸음으로 달려온다. 왕이 남자들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의 목소리로 무어라 명한다. 시종은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달려 나간다.)
왕:(다시 몸을 의자에 기대며)그러나 그대들이 그때를 앞당길 수는 있을 터이지······.
(남자1이 반색하며 앞으로 나가려는 순간, 시종이 무언가를 지고 나타난다. 대충 보아도 무기들이다. 남자들이 당황하는 가운데 시종이 남자들 앞에 무기를 늘어놓는다. 고구려의 창칼 등이다. 방패는 없다. 오로지 무기 뿐.)
왕:(의자에 몸을 기댄 채, 손가락을 빙글빙글 움직이며)둘만 남거라.
(남자1이 앞으로 나가려는 듯 몸을 굽힌다. 그때 남자2가 남자1의 몸을 잡는다. 남자1이 돌아선다. 남자들이 작당을 하는 것을 왕은 코웃음을 치며 바라본다.)
남자2:(낮은 목소리)글렀습니다. 이제 어찌한단 말이오.
남자3:(낮은 목소리, 약간 겁에 질린 듯)둘만 남기라는 말은······.
남자4:(약간 격앙된 목소리. 어차피 늦었으니 될 대로 되란 듯한 태도)둘만 남기고 우리끼리 싸우다 죽이라는 것이지. 고구려 야만족 놈들······.
남자3:(낮은 목소리, 억울한 듯)어찌 항자를 이리대하는 법이 있습니까?
남자4:(여전히 격앙된 목소리)항자라니? 우리가 어찌 항자란 말인가?
남자2:(남자4를 끌어당기며, 침착한 목소리)지금 그런 것을 두고 다툴 때인가.
남자4:(결연한 표정. 슬며시 왕 쪽으로 턱을 움직인 뒤)차라리 죽을 거라면 저자를 베고 죽는 것이 합당하지 않습니까?.
남자2:(소스라치게 놀라며)그게 무슨 말입니까?
남자4:(표정에 미동 없이)마땅한 말이오. 설령 저기까지 칼이 닿지 않는다 한들······. 그게 무인의 죽음이 아니겠습니까.
남자3:(겁에 질린 표정이 역력)난, 난······. 왕은 갑옷을 입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저 갑옷을 뚫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 가기도 전에 저 무사들에게······.
남자4:(미동 없이)설령 우리의 칼이 닿지 않는다 한들!
남자2:(만류하는 분위기로)이 사람이 살기도 전에 죽을 길을 찾고 있구려!
남자1:(남자2를 바라보며)맞네. 일단은 우리 모두가 살 방도를 궁리해야 할······.
(이때 남자5가 말없이 나아간다. 그러더니 곧장 무기를 뒤적이기 시작한다. 모두의 시선이 남자5에게 꽂힌다. 칼과 창의 무게를 가늠해보던 남자5가 칼 하나를 골라 오른손에 쥔다. 왕이 흥미로운 듯 남자5를 바라본다.)
왕:(호기로운 목소리)외팔이가 아닌가?
(남자5는 대꾸하지 않는다. 아직도 자신의 손에 쥔 칼을 가늠해보는 듯 하다. 코등이가 넓고 자루가 긴 칼이다. 마치 마상에서나 쓸법한 칼이다.)
왕:(호기심어린 목소리로. 수염을 쓰다듬으며)고구려 칼을 다룰 줄 아는가?
남자5:(칼을 거머쥐고 돌아선다. 나지막이 읊조리듯)사람은 둘이면 됩니까.
(왕, 예상치 못했다는 듯한 얼굴. 왕의 시선은 남자5의 얼굴에 멎는다. 외눈인가. 외팔이에 외눈. 그러나 왕은 내색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남자5를 바라본다.)
남자5:칼이 한 자루니 충분합니다.
(남자5, 자신을 경악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남자들을 향해 미끄러지듯 달려든다. 남자들은 저마다 흩어지며 무기를 향해 손을 뻗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