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삼국유사

도미설화 14

14. 위례 한성부

by 엽서시

14. 위례 한성부

밤이 깊었다.

습기를 잔뜩 물고 있는 공기는 손을 휘젓기에도 무거웠다. 공기를 함빡 지고 있는 등 뒤가 땀으로 젖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밤을 밝히는 횃불은 많지 않았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가마들이 기울어질 때마다 궁녀들의 작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말을 탄 개루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오십 명도 되지 않았다.

일행의 앞에서 말을 재촉하고 있는 개루는 가끔 돌아보며 그 일행이 느린 것에 짜증을 부리곤 했다.

“지금 무슨 천렵놀이라도 가는 줄 아느냐.”

개루가 나직이 불평을 짓누르며 토해낸 말이다. 새로 시종장이 된 중늙은이 한 사람이 개루의 그 말에 연신 고개를 숙였다.

반쯤 무너진 아차산성의 그림자가 일행들을 집어삼킬 듯이 번져왔다. 그때 왈패 한 사람이 칼을 쳐들었다. 칼날이 횃불의 빛을 머금었다 토해내는 빛이 일행의 움직임을 멈췄다. 두런두런 거리던 말소리도 멎었다. 개루 역시 말을 멈췄다.

“무슨 일이오?”

불안한 목소리로 왈패의 뒤를 더듬은 것은 시종장이었다. 개루도 불만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왈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왈패는 말없이 손가락을 뻗어 입술을 짓눌렀다.

잠깐 침묵이 잇달았다. 왈패가 조금 머쓱한 듯이 입을 열었다.

“성문 앞에 집들이 무슨 공터라도 되는 것처럼 부서져 있습니다. 혹 매복이 있을까 하여······.”

개루가 말을 끊으며 손을 들었다.

“네가 열 명만 데리고 가 수색해 보거라.”

왈패가 고개를 숙이며 얼른 다른 이들을 끌고 절렁거리는 쇳소리를 내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왈패들이 부서진 가옥들을 뒤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또다시 불만을 느낀 개루가 입을 열려던 바로 그 순간.

“보실 것이 있습니다!”

왈패 한 사람이 법석을 떨었다. 그러나 비명이 터진 것은 여기저기에서 였다.

개루가 말에서 내려 달려갔다. 시종장이 허둥지둥 횃불을 들고 그 뒤를 따라갔다. 왈패들이 저마다 가리키고 있는 것은 분명 왈패의 말마따나 이 곳에 매복해 있었을,

고구려의 병사들이었다. 두 서너 구는 폐허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섞여 있었고 나머지는 성벽 근처에 포개져 있었다.

누군가 이 곳을 먼저 지나갔다. 그것도 매복해있던 고구려 병사들을 헤치고.

일행의 전체가 놀라움으로 술렁거렸다. 이제 성문을 지나는 일이 안전하다는 것보다도 더 큰 놀라움이었다. 가장 놀라움에 빠진 것은 개루였다. 개루는 어느새 말도 없이 시체 한 구 한 구를 발로 뒤집었다 하며 살펴보고 있었다. 시종장이 개루를 재촉하려 하였으나,

이미 개루의 얼굴은 시종장이 말로 돌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개루는 침을 삼켰다. 자신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너무 커서 모두가 자신을 돌아보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시체들은 모두 일격에 죽었다. 처음 두셋은 등을 베인 것으로 보아 아마 기습에 의한 것이었을 테다. 그러나 나머지는······.

지금 당장 왈패들이 찾아낸 시체들만 열두 구였다. 아마 고구려병사들은 그보다 더 많았으면 많았지······.

그리고 만일 이들이 이 곳에 매복해있었더라면·····.

그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시종장이 개루의 옷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순간 개루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개루의 손이 시종장을 후려쳤다. 볼을 잡고 엎어진 시종장의 입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무엄한 놈, 네가 어딜!”

개루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빈 성곽을 흔들었다. 일행도 개루의 분노에 침묵하던 그 순간, 왈패들이 놀란 비명을 질렀다. 개루는 돌아보지 않으려 했으나 경악의 물결이 이미 무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개루도 성문 쪽을 바라보았다.

도미였다.

흔들흔들 성벽에 손을 짚은 채 도미가 걸어오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흘러내린 머리가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분명 도미였다. 도미가 아니고서야······. 왈패들이 한 두 발자국 뒷걸음질을 했다.

개루를 보고도 전혀 고개를 숙이지 않은 채였다.

개루가 다시 고함이라도 치려는 듯 입을 열었을 때, 개루는 그러나 아무 말도 뱉지 못했다. 고함도 분노도. 개루의 벌어진 입을 고정시킨 것은 다름 아닌 경악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선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도미는 다리를 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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