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삼국유사

도미설화 15

15. 도미

by 엽서시

15. 도미

도미의 몸이 기우뚱하더니 그대로 넘어갔다. 등에서 목이 뽑혀 나오는 바로 그 곳에 칼이 박힌 채 먼지를 불고 있던 도미의 목숨을 마저 끊은 것은 재증걸루의 칼이다. 도미의 목에 벌어진 상처에서 검은 피가 쿨쿨 흘러나와 먼지를 적셨다. 방금 도미의 목을 벤 제 칼을 도미의 옷에 문질러 닦으며 재증걸루가 헐떡였다.

“죽이다니, 이 사람이 고구려의 끄나풀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도림은 대꾸하지 않은 채 도미의 시체로 다가갔다. 피를 밟지 않도록 조심스레 발을 디디더니 도미의 등에 박힌 칼을 꿍, 힘주어 뽑았다. 등의 옷자락에도 검은 핏자국이 베어 나오기 시작했다. 도림은 칼을 닦지 않았다. 대신 도미가 머리를 두고 있는 수풀 쪽으로 칼을 던졌다. 칼이 나무등걸 즈음에 부딪쳐 쇳소리를 내며 덤불에 떨어졌다.

“동지.”

도림의 음성은 메말라 있었다.

“이 간나는 아무 것도 아니디요”

이제 도림은 재증걸루를 쏘아보고 있었다. 재증걸루는 자신을 쏘아보는 그 눈빛을 맞보았다.

“이 간나는 동지에게도 더러운 배신자가 아니간디?”

“배신자라면······.”

내가 아닙니까, 라는 그 말을 재증걸루는 끝내 뱉지 못했다. 그 대신 재증걸루는 엎어진 채 아직도 피로 흙먼지를 더럽히고 있는 도미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두꺼비처럼 엎어진 모양이었다.

“이 간나는 고구려가 아니오.”

재증걸루는 의아한 듯이 도림을 바라보았다. 재증걸루 안 쪽에 있던 무언가가 재증걸루의 얼굴을 씰룩거렸다.

“나 역시 고구려와는 상관없는 사람이오.”

“내래 알고 있소.”

더 이상은 말이 필요 없다는 듯, 도림은 손을 휘휘 저었다.

“그와는 반대로 내래 동지를 믿간디.”

“무슨 뜻인지······.”

도림의 눈빛은 여전히 찼다.

“내래도 그 자리에 있었디비.”

“무슨 자리 말입니까?”

재증걸루도 차갑게 되쏘았다. 재증걸루의 칼이 부들부들 떨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도림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이 텅 빈 손인 것도 개의치 않는 말투였다.

“동지가 동지의 동무들을 베어내던 그 자리.”

도림의 말은 남의 일을 말하는 것만큼이나 가벼웠다. 오히려 재증걸루도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고구려 다른 이들은 다른 생각일디 모르디만······. 내래는 그렇게 생각하디 않소. 아마······. 왕께서도 그렇게 생각하디 않을까 내래는 그리 짐작하디오.”

재증걸루는 입술을 물었다.

“도미 이 간나는 죽어 마땅하디. 내게 있어 이 간나는 배신자에 불과하디요. 제 몸뚱이 하나 건사하기 위해 나라와 백성을 팔아먹은 간나. 사내로 태어나 차라리 빌어먹고 말디, 어찌 나라를 팔아먹는단 말이요?”

도림이 재증걸루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재증걸루는 그 눈빛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동지. 동지는 그렇게 되지 말라요.”

“이미 나 역시 배신자 아니겠소.”

허허, 한숨처럼 재증걸루가 웃었다. 그러나 도림은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여전히 형형한 눈빛으로 재증걸루를 쏘아보고 있을 뿐이었다.

“동지는 아니요. 아니디요. 오늘 동지는 고구려가 될 것이오. 나는 동지가 진실로 그렇게 되리란 걸 믿고 있소. 동지는 몸뚱이를 건사하기 위해 나라를 배신한 몸이 아니요. 동지는, 동지는 이미 죽은 몸이 아니간디. 동지가 동무들을 베던 순간 동지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나는 보았디요. 그리고 느꼈디요. 동지는 제 목아지를 벤 것이나 다름없소. 살아서 개루 놈의 목아지가 떨어지는 것을 보기 위해.”

도림이 고개를 숙였다. 도림은 말없이 엎어진 도미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도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 놈을 베었소. 이 놈을 벤 것처럼 우리가 개루 놈의 목아지를 베디는 못할 것이디요. 그렇디만 고구려 칼에 그 놈의 목이 떨어지는 순간, 그건 우리가 벤 것이나 다름없디요. 우리가 고구려가 된다면.”

도림이 발로 도미의 시체를 걷어찼다.

“그러니, 그러니 동지는 고구려가 되어야 하오. 이깟 배신자 새끼가 무얼 알겠소. 이 새끼가. 동지, 다시 헤아려 보시오. 동지가 동무들을 베어내던 그 순간. 동지의 헤아림을.”

“내 헤아림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싸울 듯이 재증걸루가 쏘아 물었다. 만일 도림이 한 번만 더 동지를 베는 순간 따위를 입에 올리면 어떻게든 베어버릴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도림이 재증걸루를 돌아보았다. 도림이 웃었다. 재증걸루는 칼을 놓았다.

“내래 어찌 알간디?”

도림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덜그럭. 마저 손가락의 힘이 풀렸나 보다. 칼이 굳은 딸에 부딪쳐 몸을 누이는 소리가 들렸다. 재증걸루는 칼 쪽은 바라보지 않았다. 어째서 도림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도 묻지 않았다. 재증걸루의 머리와 가슴을 뒤흔드는 것은,

눈물방울이 도림의 눈에서 툭 떨어져 뺨에서 깨어졌다. 그리고 메마른 뺨을 적시며 턱 아래로 흘러내렸다.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재증걸루 역시. 부젓가락에 지져진 왼쪽 눈깔이 그때만큼이나 뜨겁게 달아올라 눈꺼풀 안쪽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마구 울며 발광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왼쪽 눈의 울음을 미처 삼킬 수밖에 없었다. 재증걸루는 도림처럼 조용하게 우는 법을 몰랐다.

만일 눈물을 흘리게 되면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걷잡을 수 없는 비명과 울음이. 궁궐의 개루까지 놀라 뛰쳐나올. 고구려 땅에 묻힌······. ‘동무’들도 깨어 나올 것 같은.

숨을 몰아쉬었다. 입 안에 없는 물을 삼키는 것처럼 울음을 삼키고 다시 삼켰다. 재증걸루의 입에서 나온 것은 뜻밖의 말이었다.

“악몽입니다······.”

도림이 그 말에 다시 눈물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악몽이디······.”

도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악몽이라요.”

도림의 앙상한 손이 어느새 재증걸루의 어깨를 쥐고 있었다. 왼쪽 눈알만큼이나 뜨거운 손아귀였다. 눈동자의 놀음이 점점 잠잠해지고 있었다.

“그럼······. 이제 이자는 어찌 합니까?”

도림의 손이 어깨에서 떨어지자 재증걸루가 도미의 시체를 발로 가리켰다.

“요 간나? 괴깃밥으로 던져버려야디 모.”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은 채였지만 도림의 말은 차갑게 돌아와 있었다.

“아니, 이자가 있던 자리 말입니다.”

도림이 말없이 재증걸루를 바라보았다. 재증걸루의 성한 오른쪽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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