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한수의 맹인, 도미
16. 한수의 맹인, 도미
“괜찮아요. 도림이도 속았으니까요.”
도미가 피실피실 웃고 있었다. 어느새 도미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새하얀 칼날이 개루의 목을 꺼득꺼득 노려보았다. 횃불의 불을 넘실거리면서.
“아, 엄청 아팠어요. 내 손으로 내가 지졌다니까요? 그랬더니 도림이도 껌뻑 넘어가던데요.”
도미가 고개를 젖힌 채 뒤흔들어 머리카락을 넘겨보였다. 지져진 오른쪽 눈꺼풀 아래에서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개루는 무어라 대꾸할 듯이 입을 벌렸지만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왜 그래요?”
도미는 여전히 웃는 채, 칼로 개루를 가리켰다. 개루는 굳어진 그대로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너, 나 몰라요?”
도미의 웃음은 환했다.
“잊어버렸어요? 나?”
한 발짝, 한 발짝, 도미가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이거 봐요. 나······.”
도미가 성한 다리를 흔들어보였다. 그러더니 거짓으로 몇 번 다리를 절룩여 보였다.
“참, 그 뿐이 아니에요. 봐요.”
도미가 칼을 흔들어 보였다. 피가 양 옆으로 튀었다.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사람을 많이 죽였는데요.”
개루는 여전히 도미를 보지 못하는 듯 했다.
“왜 떨고 그래요, 내가 너라고 해서 또 화났어요?”
낄, 낄, 낄낄낄낄낄낄-
몸을 뒤흔드는 도미의 웃음소리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무기를 손에 쥐고 있던 왈패들이 무기를 떨어뜨렸다. 몇몇은 입에서 이상한 소리를 흘리며 횃불을 던지고 달아났다.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이 다른 왈패들도 무기를 내려놓고 달아났다.
도미는 여전히 웃고, 웃고, 웃다가,
웃음을 멈췄다.
개루의 눈동자는 바삐 흔들리고 있었다. 개루가 보는 것은 도미의 성한 눈도, 다리도 아니었다. 피 묻은 도미의 칼도 아니었다. 도미는 어느새 개루의 얼굴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렇지만 개루는 여전히 도미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도미의 입이 우물거렸다. 그러더니
개루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러나 침을 맞고도 개루는 도미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개루의 눈동자가 바삐 움직였다. 개루가 바라보는 것은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고구려 병사들의 시체였다. 일격에 죽은. 몸이 반절이 넘게 잘려나간.
“어딜 봐!”
그때 도미가 외쳤다. 일행 뒤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개루는 도미의 이 고함에 정신을 깬 듯이 이제야 멍하니 도미를 바라보았다.
“뽑아!”
도미의 칼이 개루의 허리춤을 쳤다. 개루는 고분고분히 칼을 뽑았다. 도미가 뒷걸음질을 쳤다. 어느새 도미와 개루의 간격이 벌어져 있었다.
“들어.”
개루의 칼이 서서히 어깨 위로 올라갔다. 동시에 개루의 눈빛도 변하고 있었다. 도미도 칼을 들었다. 오른손 한 손이었다. 왼쪽 어깨는 여전히 축 처진 그대로였다. 개루의 얼굴에 번질거리는 미소가 돌았다. 개루가 노리는 것은 도미의 늘어진 어깨 위에 있는 목이었다. 그러나 개루는 성급하지 않았다. 도미가 다친 다리와 눈을 가장했듯, 언제든 저 어깨도 거짓일 수 있다. 개루의 칼날이 조금 아래로 움직였다.
옆구리를 베어낸다. 설령 저 팔을 움직이지 않는다하면 왼팔까지 베어내면 될 일이다. 옆구리에서 비스듬히 가슴팍까지. 저 고구려 병사들처럼.
개루가 외마디 고함을 질렀다. 개루의 칼날이 재증걸루의 왼쪽 옆구리에서 빛나던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