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하는 세상과 성장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이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손바닥에는 땀이 고였다. 고인 땀이 주먹 안을 채웠다. 그럴 때마다 나는 미끈미끈하고 또 한 편으로 끈적끈적해진 손바닥을 옷소매에 닦았다. 손에 쥔 등산 스틱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다시 손에 힘을 주었다.
이게 없었다면. 눈 앞의 시커먼 그림자가 허리를 둥글게 말았다. 그르릉, 하고 그것이 숨을 몰아 쉬었다. 공기가 낮게 떨렸다. 으스스한 냄새가 퍼졌다. 그것은 나를 견주어보고 있었다. 그것의 입장에서 나는 처음 보는 대상일 것이며, 아마, 먹잇감에 가까워보이는, 그런 모습일 것이다.
다시 등산 스틱을 쥐었다. 꺼져. 이 번에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것이라도 없었으면, 나는 이미 그것의 호기심에 희생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정말로, 나는 그것의 예상대로 먹잇감에 알맞았을 지 모른다. 내 목소리에 둥근 그림자가 들썩였다. 나는 다시 한 번 스틱을 높이 겨누었다. 그러자 그림자는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연이은 자동차의 그늘 속에서 나는 내 눈을 의심하고 의심했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 그 그림자가 사라졌다는 것이 분명하도록, 지루할 만큼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래도 나는 스틱을 든 채로, 한참을, 그 그늘들을 노려보았다.
어깨가 아려왔다. 어깨가 아려오고, 손에 들린 스틱이 이제 더 이상 감출 수 없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스틱을 놓았다. 주저앉고 싶었다. 발을 내딛었다. 발등에 채이는 것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겨우 몸을 일으키고 다시 스틱을 더듬어 쥐었다. 내 발등을 잡아챈 것은 민들레 줄기였다. 억울하다는 듯, 억센 이파리가 검은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다.
민들레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새삼 주위의 것들이 더욱 거대하게 느껴졌다.
그르릉, 다시 공기가 낮게 울렸다.
지구는 팽창하고 있었다.
1.
꺼져. 나지막이 외쳤다. 턱이 떨렸다. 떨리는 것은 감추고 싶었다. 그러나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손이 떨리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손바닥에는 땀이 고였다. 고인 땀이 주먹 안을 채웠다. 그럴 때마다 나는 미끈미끈하고 또 한 편으로 끈적끈적해진 손바닥을 옷소매에 닦았다. 손에 쥔 등산 스틱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다시 손에 힘을 주었다.
이게 없었다면. 눈 앞의 시커먼 그림자가 허리를 둥글게 말았다. 그르릉, 하고 그것이 숨을 몰아 쉬었다. 공기가 낮게 떨렸다. 으스스한 냄새가 퍼졌다. 그것은 나를 견주어보고 있었다. 그것의 입장에서 나는 처음 보는 대상일 것이며, 아마, 먹잇감에 가까워보이는, 그런 모습일 것이다.
다시 등산 스틱을 쥐었다. 꺼져. 이 번에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 것이라도 없었으면, 나는 이미 그것의 호기심에 희생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정말로, 나는 그것의 예상대로 먹잇감에 알맞았을 지 모른다. 내 목소리에 둥근 그림자가 들썩였다. 나는 다시 한 번 스틱을 높이 겨누었다. 그러자 그림자는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연이은 자동차의 그늘 속에서 나는 내 눈을 의심하고 의심했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 그 그림자가 사라졌다는 것이 분명하도록, 지루할 만큼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래도 나는 스틱을 든 채로, 한참을, 그 그늘들을 노려보았다.
어깨가 아려왔다. 어깨가 아려오고, 손에 들린 스틱이 이제 더 이상 감출 수 없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스틱을 놓았다. 주저앉고 싶었다. 발을 내딛었다. 발등에 채이는 것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겨우 몸을 일으키고 다시 스틱을 더듬어 쥐었다. 내 발등을 잡아챈 것은 민들레 줄기였다. 억울하다는 듯, 억센 이파리가 검은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다.
민들레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새삼 주위의 것들이 더욱 거대하게 느껴졌다.
그르릉, 다시 공기가 낮게 울렸다.
지구는 팽창하고 있었다.
2.
지구는 팽창하고 있었다.
지구의 모든 존재가 팽창하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븐 호킹, 같은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팽창의 의미가 아니었다. 정말로, 지구의 모든 것들이 팽창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느끼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몸으로 알게 된 것이다.
되짚어 보면 아마도 처음, 내가 그것을 알게 된 사건은 3년간 매일같이 차고 다니던 손목시계가 손목에서 헐렁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럴 리 없었다. 노원역 2번 출구 앞 시계방에서 만 원을 주고 맞춘 시곗줄이었다. 3년 동안 시계는 내 손목에 자국을 남겼지, 헐렁해진 일이 없었다. 그러나 헐렁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느끼면서도 믿지 않았다. 생각해보라. 이제 서른둘인 내 손목이 갑자기 가늘어질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어느 금요일 저녁, 술을 먹고 탄 만원 지하철의 틈바구니에서 나는 시계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징조였다고 생각한다. 시계가 없어진 것쯤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고작 몇 만원 하는, 카시오 전자시계였다. 시간도 그렇다. 누가 요즘 시계로 시간을 본단 말인가. 핸드폰이 있으니, 주머니에 손을 넣는 것이 다만 귀찮을 뿐이었다. 별 달라진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잊어버렸다-고 나는 믿었다. 그러나 내가 알게 된 것은, 사람은, 습관의 기계와도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손목을 보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휑한 손목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서늘함은 손목의 서늘함 이상이었다.
지구가 팽창하고 있었다.
모든 것들이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그것들에는 고작 몇 만원 하는, 카시오 전자시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는 내가 빠져 있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어느 날 부터인가 내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의 정량과 크기와 높이가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시계를 잃어버리고 난 후부터 나는 보도블럭에 발이 걸리는 일이 잦아졌다. 계단에 부딪치는 것은 예사였다. 내가 예사로 건너고 넘어가던 것들이 하나둘 내 발목에 걸리고 발등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징조였다. 예사로 넘길만한 것들이었지만-그 예사의 것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나는 마침내 이 지구가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예사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팽창은 아주 느리고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서웠다. 길이로 말해보자면, 하루에 0.1-0.2mm 정도일까. 그러니까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얘기해보자면 아마 사람의 머리카락이 자라는 속도랑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그정도로 느리고 서서히 지구가 팽창하고 있었다. 우스울 정도로 느린 속도지만, 그러나 누구나 아는 것처럼 머리카락은 쉼 없이 자라, 어느 순간 눈썹을 덮고 눈을 찌르는 것이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무심코 책상에 놓인 자를 바라보았다. 물론 자도 자라나고 있을 테니, 저것을 들고 지구가 팽창하고 있는지를 잰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내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 적어도, 지금 팽창하고 있는 이 세상의 기준에서는 내가 얼마나 작아지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자를 들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30cm 자가 무겁게 느껴졌다. 손바닥을 힘껏 펼쳤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나는 내 손바닥 길이가 18cm정도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들 그렇지 않은가. 마치 저마나 하나씩 가지고 있는 자처럼, 분명히 알고 있는 제 신체의 길이가 있는 것이다. 엄지손톱의 너비가 1.5cm 정도라거나 하는.
그날 내 손의 길이는 15.2cm였다.
15.2cm. 나는 숫자 15와 16 사이, 16에 닿기에는 한참을 못 미치는 내 손가락의 끝을 한참 바라보았다. 아무리 넉넉히 잡고 본다 하더라도. 결코 내 손은 16cm로 볼 수 없었다.
지구는 팽창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멈춰있었다. 다행히 세상 모든 것이 다 함께 팽창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나처럼 팽창이 멈춘 것들도 있었다. 외투 몇 벌, 셔츠 몇 장, 속옷과 같은 옷가지 몇 개. 작년에 산 구두 한 켤레. 사내 등산 동호회에서 사라고 권유했던 스틱 한 쌍. 그리고 그릇이나 다른 몇 가지 자질구레한 것들. 안타깝게도 그 중에 양말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발가락 한 마디 정도가 남게 된 양말을 접어 구두에 꾸겨 넣다가, 나중에는 아예, 숙녀용 양말을 사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는 이것에 만족했다. 정말로 나를 남겨둔 모든 것이 팽창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들만큼은, 내 옆에서 제 크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바지에 허벅지가 팽팽하게 들어차는 것에 나는 만족했고, 안도했고, 나중에는 감사함까지 느꼈다. 고등학교 이후로 늘 그랬던 것처럼 소매 자락을 두 번만 접어도 되는 셔츠가 남아 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은 셔츠들도 있었으니까. 어느 날 나는 내 몸에 더 이상 맞지 않는 옷을 의류 수거함에 넣어 버렸다. 옷장은 텅 비어 있었다. 그 공간이 동굴처럼 느껴졌다. 몇 벌 옷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 공간은 넓어지고 있었다.
어쨌거나, 지구는 매일, 조금씩 팽창했다.
혹시 내가 말했던가. 머리카락은 일 년에 15cm 정도를 자란다고, 그 사실은.
3.
세상의 기준에서 나는 매년 15cm의 속도로 줄어들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람들도 점차 그것을 눈치 채기 시작했다. 영호 씨, 요새, 뭔가, 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 나는 어설프게 웃는 수밖에 없었다. 허리 안 쪽으로 식은 땀이 흘렀다. 점심시간 동안 톨 사이즈의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일이 버거워졌다. 아니, 그보다도 예전에 두 그릇은 예사로 먹던 공깃밥을 남기는 일도 점차 늘어났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 그럴 때마다 내가 줄어드는 것이 더욱 빠르게 느껴졌다. 동료들의 어깨가 내 눈높이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타면 나는 꼭 사람으로 만든 벽에 둘러싸인 것 같았다. 지하철에서도 그 벽은 마찬가지였다. 그 벽은 점차 자라났다.
퇴근을 하고, 서류가방을 내려놓으면 어깻죽지가 저려왔다. 땀에 젖은 셔츠를 벗어 던지고, 나는 화장실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곧 자라겠지,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아니면 저 팽창이 멈추겠지,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변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나 그대로였다.
사실상 ‘내가 줄어들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째서인지,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게 사실이었다. 나는 나 그대로였다. 자라고 있는 것은 이 세상이었고-. 나는 변하지 않았다. 저 몇 벌의 옷과 구두와 등산 스틱 같은 잡동사니들도 함께.
그러니 어떻게 보면, 제 크기를 알맞게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러니까, 나였지만.
지구가 팽창하고 있었다.
모든 것의 크기가 달라졌다. 나는 내 크기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제 더이상 그것은 알맞지 않았다. 나는 매일매일, 달라지는 크기에 익숙해지기 위해 진땀을 빼야 했다. 겨우 익숙해진 채로 잠들고, 일어나면 세상은 다시 그 크기가 변해있었다. 그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오랜만에 만난 동네 친구들의 크기도 달라져 있었다. 십오 년을 넘게 만난 중학교 시절의 고만고만하던 동창들이 크기가 달라져 있었다. 이제 대리를 달았다는 친구의 넋두리, 대학원을 나와 삼성에 입사했다는 친구의 자랑 섞인 한숨, 실수처럼 테이블에 놓인 외제차 브랜드가 박힌 차키. 그리고 나를 보는 눈빛도 달라졌다. 무언가, 꼭 집어 말할 수 없을 만큼. 딱 머리카락이 자라는 속도 만큼의, 0.1mm 정도 될법한 아주 작은 동정과 연민이 섞인 그런 눈빛이었다. 물론 당신이 알고 있는 것처럼, 머리카락은 쉼 없이 자라 눈을 찌르는 법이고.
그날 나는 어쩐지 누구의 눈도 마주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친구 녀석이 갑자기 어깨를 툭, 칠 때나, 녀석의 눈에 어린 웃음이. 전과 다르게 느껴졌다. 전과 다른 크기 때문일까. 나는 술을 아무리 먹어도 취하지 않는 기분이었다.
야, 이 새키, 갑자기 왜 이러냐. 그러게, 이 자식, 술만 갑자기 늘어서.
따위의 말을 들을 때마다 술이 깨는 느낌이었지만, 몸은 휘청거렸고.
눈을 떴을 때는 침대 위였다. 원룸 구석의 구겨진 양말. 그리고 천장은 유달리 높아보였다. 그 날 재어본 내 손은 13.8cm였고.
그랬다. 그리고 그 주말 나는 성희와 헤어졌다. 삼 년간의 연애였고, 내가 어느 날 시계를 잃어버리게 된 지 딱 팔 개월만의 일이었다. 성희는 나보다 두 살이 더 많았다. 사실 우리는, 그러니까, 지구가 팽창하기 전에도 딱히, 결혼이라거나 하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다행인지도 모르고, 아니면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사실 성희의 입에서 나온, 헤어지자는 말은, 이 번이 세 번째였다. 우리도 여느 연인들처럼 다투기도 했었고, 한 번은 술에 취한 성희가 새벽에 전화를 걸어, 뭉개져가는 목소리로, 헤어지자고 하기도 했었다. 그 때 나는 야근을 마치고, 회사 맞은편의 찜질방으로 가기 위해 텅 빈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다시 만났다.
세 번째 이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이었다. 세 번째 이별이라는 말은, 그러니까, 처음이나 두 번째와는 다르게, 익숙하다는 뜻이었다. 우리의 만남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와, 며칠만이지?
그러게. 한 보름 쯤 됐나?
따위의 안부 인사를 하고, 성희는 전과 다른 내 키를 보며, 눈이 커지더니,
병원은 갔어? 가라니까?
따위의 걱정을 했고, 나는 웃으면서 말을 돌렸다. 우리는 함께 걸었다. 나는 성희의 어깨가 나보다 조금 높은 곳에 있음을 알았다. 성희는 굽이 없는 신발을 신고 있었다. 나는 혼자 웃었다.
헤어지자는 말은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것이 이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 번째, 반복되는 것이기에 오히려, 말을 꺼낼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공원을 거닐었다. 말없이, 몇 바퀴를 돌았다.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구두가 내 입도 같이 짓누르는 것 같았다.
역에 도착했다.
너 타는 거 보고 가도 될까.
하는 내 말에,
당연하지.
라며 성희는 웃었다. 우리는 같이 플랫폼까지 걸었다. 그때도 우리는 말이 없었던 것 같았다. 전철이 왔다. 문이 열렸다. 나는 어설픈 동작으로 성희를 안았다. 성희가 무릎을 숙였고,
나는 성희의 이마를 살짝 입술로 눌렀다.
잘 가.
그래, 잘 가.
성희의 이마에 닿아있던 입술을 떼었다. 성희는 죄 지은 아이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고개를 숙여도, 성희는 나보다 키가 큰 것 같았다. 성희의 이마는 희었다. 무슨 잘못했냐. 고개 들어, 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전철 문이 열렸다.
잘 가고.
침을 삼켰다. 목구멍은 침 한 방울 넘어가기 힘들 만큼 좁아져 있었다.
응.
성희가 답했다.
잘 도착했다는 연락도 하지 말고.
당연하지.
성희가 피식 웃었다. 나도 조금 웃는 흉내를 내었다.
그래. 그럼.
성희가 돌아섰다. 한 발, 두 발, 그리고 세 발. 성희는 전철을 탔다. 나는 눈을 감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전철 문이 닫혔다. 성희가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전철이 떠나갔다.
성희가 눈물을 훔치는 것이 보였다. 전철은 그 모습만 내려놓고 굴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몸을 돌리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서 있었다. 전철에서 내린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고, 전철을 타려는 사람들이 계단을 내려왔다. 눈꺼풀을 몇 번 깜박였던 것 같았는데, 플랫폼이 몇 번 비고 다시 붐볐다. 또 다른 전철이 떠나려 하고 있었다. 몸을 돌리는 법이 떠올랐다.
생각했던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집 근처의 역으로 가기 위해서 환승을 해야 했다. 환승하는 길은 길었다. 내가 걷는 순간에도 지구가 팽창하고 있는 것처럼. 걷고 또 걸어도, 끝나지 않았다. 이마에서 조금 땀이 베어났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꽤 오래 걸었다. 오히려 좋았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머릿속은 꼭 회색 갱지 같았다.
플랫폼에 들어서자, 뗄렐레레, 귀가 따가운 안내 방송과 함께 전철이 왔다. 운이 좋네, 생각하며 전철을 탔다. 전철은 한산했지만, 앉을 자리는 없었다. 나는 문 앞의 봉을 잡고 섰다. 문이 닫혔다. 전철이 움직였다.
덜컹덜컹-
그때 갑자기 눈물이 돌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마치 눈물샘이 어금니 사이에 있다고 배운 사람처럼. 나는 턱이 저리도록 이를 악물었다. 터널을 지나는 어두운 차창에 울고 있는 내가 비쳤다. 어린 아이 같았다.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지도 못한 채, 그저 턱을 앙 다물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한 다섯 정거장쯤 지나고 나니 눈물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봉을 쥔 손의 손가락이 온통 하얗게 질려있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이를 악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후, 한숨을 쉬었다. 마지막 눈물을 훔쳤다. 손등을 바지에 문댔다.
우습기도 했다. 한 번 그런 생각이 들자 멈출 수 없었다. 사실, 헤어진 이유는, 내가, 내가, 병신이라서가 아닌가. 불치병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불치병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고, 이건 무슨, 사실, 세상이 이런 일이, 에나 나올 법한, 그런 일이고, 뭐, 미래를 약속하지 않은, 뭐, 그런 사이에서, 어쩌면, 성희가 헤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고, 성희는 나보다 나이도 많고, 어쩌면 이건 서로에게 좋은 일인지도 모르고-.
따위의 생각을 했다. 하려고 애썼는지도 모르겠다.
주말이 끝나있었다. 눈이 따가웠다. 오랜만에 운동을 하고 난 뒤 쑤시는 몸처럼. 아마도 운다는 것이 눈에는 중노동 같은 일인지도 몰랐다. 눈이 따가운 와중에도, 책상에 놓인 자가 보였다.
12.4cm.
나는 내 손 옆에 놓인 눈금을 읽다가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4.
그 후로 한동안 집을 나가지 않았다. 나는 몸이 아파서 도저히 회사를 나갈 수 없다며, 웅얼웅얼 전화로 사의를 알렸다. 말 그대로 한동안 집을 나가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이런 식으로 사직서를 내면, 퇴직금 정산에 불리할 수 있다고 했다. 인사팀 대리라는 사람은 전화로, 제대로 된 인계인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측에서 고발을 당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하라고, 중얼거리고 전화를 끊었다.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한 날, 편의점에서 인스턴트 음식을 잔뜩, 사다 놓았다.
나를 찾는 전화는 거의, 없었다. 한 번 집주인이 전화를 해서, 최근 정권의 문제와, 커져가는 안보의 위협과 야당의 문제점과, 노후의 불안함 따위를 늘어놓더니, 계약 기간이 만료되면 권리금과 월세를 올리겠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하라고, 중얼거리고 전화를 끊었다.
지구는 여전히 팽창하고 있었다. 지구가 팽창하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는 것 같았다. 나는 거의, 침대에 누워서 하루를 지냈는데, 천장은 눈을 뜰 때마다, 더욱 높아져 있곤 했다. 어느덧, 이 세상에서 나는, 가장 작고 왜소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던 어느 날은,
나도 사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턱을 매만졌다. 수염이 꺼칠했다. 피식 웃었다. 꺼칠하다니, 아마, 다른 사람이 만져보면 다람쥐 털처럼 보드랍게 느껴질 것이다.
나도 사람일까. 나는 아직도 사람일까. 무엇이 사람일까. 어쩌면 사람의 정의 중에는 생각하고 사랑하고 꿈을 가지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제 일을 하는 것만큼이나 사람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동물 사전을 보면 모든 동물의 몸길이가 적혀 있는 것처럼.
나도 아직 사람일까.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무엇일까. 모두가 자라고 있을 때, 달려가고 있을 때, 이렇게 혼자 멈춰 있는 것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에 대답할 수 없었다.
딱 하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도 거실 한 켠에 쌓여있는 인스턴트 음식만큼은 부족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자라고 있었다. 내가 먹는 만큼, 그것은 다음날 다시 불어나 있었다. 언젠가, 힘겹게 몸을 끌고 기어 올라간 책상 위에서, 자로 재어본 내 손바닥의 길이는, 3Cm 남짓했다. 밀리미터의 눈금은 더 이상 내게 자세한 정보를 주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나는 웃어버렸다. 아마 지금 내 손은 다른 사람의 눈에 백반집 순두부찌개 속에 익어가고 있는 작은 쭈꾸미처럼 보일 것이었다.
그날 나는 집을 나왔다. 밤이었다. 더 이상 집에서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참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아니었다. 이러다보면 나는 벌레와 싸워야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누군가 이 집에서 나를 발견한다는 것은 어쩐지 싫었다. 집주인 아주머니의 그 화장이 두꺼운 얼굴이, 어머, 이 게 뭐야, 영호 총각, 왜 이렇게 됐어, 따위의 말을 하는 것은 듣기 싫었다. 그렇다고 내 모습을 가족들에게 보여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족에게 연락을 한지가 얼마나 되었을까. 마지막으로 집에 전화를 한 게 언제였지.
그래서 집을 빠져나왔다. 현관문 손잡이를 돌릴 수 없었기에, 우유 투입구를 통해서 빠져나와야 했다. 투입구를 통해 빠져나오면서도 마치 개나 고양이가 된 기분이 들어,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밤이었다. 당연한 얘기였다. 낮에, 혹시, 누군가의 눈에 띈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식은땀이 흘렀다. 잡혀갈까. 실험대상이 되는 걸까. 포르말린 같은 것에 절여져 표본이 되는 건 아닐까. 아니면 그냥 다들 무시하고 지나갈까.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밤에 집을 나섰다. 우습게도 나는 양복을 입고 있었다. 양복에 구두 차림이었다. 무슨 신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른 것처럼 자라나지 않아, 내 몸에 맞는 옷이 이게 전부였다. 양말은 없었다. 등산 스틱 한 쌍도 그나마 제 크기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런데도 하나는 내 키에 가까운 장대 같은 크기여서, 다른 것을 짚고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따 올라올 때는 어떡하지, 따위의 생각을 하다가, 그만두었다.
오랜만에 걷는 길은, 생각보다, 훨씬 유쾌했다. 가로등의 가장자리를 따라 걸어 다녔다. 당신은, 종아리까지 오는 민들레를 본 일이 있는가. 가끔 길에서 마주치는, 풀벌레라기에는 너무나도 시커먼, 벌레들이 있었는데, 팔뚝만한 벌레들은 나를 보면 마치 기계와 같은 움직임으로 달아나고 했다. 나는 그런 벌레들을 마주할 때마다 오싹한 소름이 돋았고, 그때마다 웃었다. 마치 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어떤 외계의 혹성에 불시착한, 홀로 남은 그런 주인공.
웃었다.
왜, 그런 영화가 있지 않은가. 외계의 혹성인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결국 먼 미래의 지구였다던.
나도 그런 영화의 주인공과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싶었다. 그리고 이런 외계 영화에서는, 언제나 상상도 못할 곳에서, 상상도 못할 생김새의 외계 포식자가 나타나는 법이지, 하는 생각을 할 때.
나는 실제로 그런 포식자와 맞닥뜨리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내가 그쪽으로 길을 들어선 것이 잘못이었다. 내가 방금 발로 걷어 찬 것이 혹시 고양이 사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 저음의, 묵직한, 주위의 공기를 침묵하게 만드는, 짐승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야우우우웅.
5.
‘나비’였다. 나비가 아닌 ‘나비’. 동네 길고양이 ‘나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단순히 생각해도 내 키가 6분의 1, 즉 30cm 남짓하게 줄어드는 동안, ‘나비’의 몸길이는 여섯 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몸무게로 생각해보면, 6의 세제곱만큼은 늘어났을 것이다. 평소 고양이 몸무게 따위는 알 바 아니었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것은 마치 표범이나 호랑이나 다름없었다. 노릿한 냄새가 풍겼다. 노릿한 냄새 말고도 알 수 없는, 음식물 쓰레기 냄새 같은 것과 삭은 토사물 같은 냄새가 들쭉날쭉하게, 바람에 실려 오는 것까지 느껴졌다. 고양이 몸에서 냄새가 풍긴다는 것이, 그리고 그게 느껴진다는 것이, 내 몸을 떨게 만들었다. 저 ‘나비’가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법한 표범이나 호랑이라면,
나는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법한 사슴, 토끼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차라리 낮에 나왔을 걸, 따위의 후회를 하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설령 누군가 ‘나비’를 쫓아내고, 나를 구한다 쳐도, 어쩌면 그 ‘사람’이 ‘나비’보다 내게 더 심한 짓을 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르릉, ‘나비’의 목에서, 마치 동굴에서나 울려 나올 법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등산 스틱을 치켜들었다. 닳고 닳았지만, 그래도 끝은 여전히 뾰족했다. ‘나비’는 자동차 밑의 그늘에서 노릿한 냄새를 풍기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둥그런 윤곽이 나를 향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근육과 발톱이 가득 찬, 그 둥그런 몸이, 내 움직임을 따라 조금씩 움직이는 것을 보며 나는 절망했다.
나는, 고양이에게 노려지는 신세였다.
쥐나 다름없이.
그러나 그럴 수만은 없었다. 나는 쥐와 달랐다. 꺼져. 나지막이 외쳤다. 손바닥에는 땀이 고였다. 고인 땀이 주먹 안을 채웠다. 그럴 때마다 나는 미끈미끈하고 또 한 편으로 끈적끈적해진 손바닥을 옷소매에 닦았다. 손에 쥔 등산 스틱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다시 손에 힘을 주었다.
이게 없었다면. 눈 앞의 시커먼 그림자가 허리를 둥글게 말았다. 그르릉, 하고 그것이 숨을 몰아 쉬었다. 공기가 낮게 떨렸다. 으스스한 냄새가 퍼졌다. 그것은 나를 견주어보고 있었다. 그것의 입장에서 나는 처음 보는 대상일 것이며, 아마, 먹잇감에 가까워보이는, 그런 모습일 것이다.
다시 등산 스틱을 쥐었다. 꺼져. 이 번에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 것이라도 없었으면, 나는 이미 그것의 호기심에 희생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정말로, 나는 그것의 예상대로 먹잇감에 알맞았을 지 모른다. 내 목소리에 둥근 그림자가 들썩였다. 나는 다시 한 번 스틱을 높이 겨누었다. 그러자 그림자는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연이은 자동차의 그늘 속에서 나는 내 눈을 의심하고 의심했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 그 그림자가 사라졌다는 것이 분명하도록, 지루할 만큼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래도 나는 스틱을 든 채로, 한참을, 그 그늘들을 노려보았다.
어깨가 아려왔다. 어깨가 아려오고, 손에 들린 스틱이 이제 더 이상 감출 수 없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스틱을 놓았다. 주저앉고 싶었다. 발을 내딛었다. 발등에 채이는 것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겨우 몸을 일으키고 다시 스틱을 더듬어 쥐었다. 내 발등을 잡아챈 것은 민들레 줄기였다. 억울하다는 듯, 억센 이파리가 검은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다.
민들레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새삼 주위의 것들이 더욱 거대하게 느껴졌다.
그르릉, 다시 공기가 낮게 울렸다.
지구는 팽창하는 소리였다. 지구는 팽창하고 있었다. 이제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이 있었다. 나는 팽창하지 않았다. 그래서 약자였다. 이 팽창하는 지구 위에서 홀로 팽창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는 의미였다. 하여 더욱 분명한 사실은, 밤거리에 놓인 나는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사방에서 야웅야웅, 고양이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나는 사실상 호랑이와 사자가 날뛰는 사파리 공원에 맨몸으로 놓인 관광객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관광객도 아닌, 그냥 토끼나 사슴에 불과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원래 이 도시에 살고 있던 비둘기, 까치 따위와 나는 하등 다를 바 없었다.
뒷골이 선득한 것은 그때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다시 스틱을 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냄새가, 흘렀다. 노릿한 냄새. 그리고 음식물 쓰레기 냄새 같은 것과 삭은 토사물 같은 냄새. 들쭉날쭉히. 바람에 실린 채로. 소름이 천천히 등줄기를 따라 내려왔다.
출근길 길가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던 비둘기나 까치의 시체 따위가 떠올랐다. 다음날 어느 누구는 출근길에 작은 난쟁이의 시체를 보게 될까. 아니, 어쩌면 그런 것도 없을지 모른다. 이 도시의 하수구나 보일러실, 배수로 따위에서 얼마나 많은 쥐가 고양이에게 죽어갈까.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 되면 그런 것들은 누가 치운 것처럼 사라지지 않던가.
사라진다, 는 생각이 들자, 이상하게도,
팔에 힘이 붙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히죽거리는 웃음이 돌았다. 어쩌면 죽기 전에 솟아오른다는 뭐, 그, 아드레날린,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왜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쥐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무언가가 희끗 날아들었다. 나도 모르게 스틱을 내질렀다. 스틱 끝에 무언가 물컹하고 단단한 것이 닿았다. 몸을 쭉 뻗었다. 내 안에 숨겨져 있던 동작이었다. 마치 그 동작은 논산 훈련소에서 배운 총검술과도 같았는데, 그래, 꼭 찔러 총! 같은 동작이었다.
그렇지.
나도 모르게 외쳤다. 외침이었다. 내가 찌른 것은 ‘나비’의 앞발이었다. 내 외침보다도 더 크고 높게, 나비는 마치 이 세상이 찢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울부짖었다. 그 울부짖음만큼이나 짐승의 근육에서 쇠붙이를 뽑아내는 것은 낯설었다. 그 쇠붙이가 뽑히는 순간,
무언가 묵직한 것이 내 얼굴을 후려쳤다. 왼쪽 얼굴이었다. 가죽으로 싼 철퇴가 머리를 후려친다면 이런 느낌일까. 아니면 유리조각이 박힌 권투글러브로 후려 맞는 느낌. 사실 무엇으로도 비유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왜냐면 나는 살면서 가죽으로 싼 철퇴나, 유리조각이 박힌 권투글러브에 맞아본 일이 없었으니.
알 수 있는 것은 얼굴에 느껴진 묵직한 충격과, 고통과, 그리고 피가 흐른다는 것이었는데, 이상하게도 피가 흐르는 것만큼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세 가지 사실을 알게 된 순서를 다시, 자세히 말한다면, 묵직한 충격에 정신을 차리고 나니 무언가가 흐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손으로 만졌을 때 비로소 고통이 느껴졌으며, 그 후 손바닥을 보고서야 얼굴을 흐르는 무언가가 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왼쪽 눈이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눈이 터져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사실을 확인할 용기는 없었다. 아까 왼쪽 뺨을 만졌을 때, 벌어진 상처 사이로 단단한 것이 만져졌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처음엔 그것이 뼈인가 싶었는데 어쩌면 이빨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고통은 덜했다. 이상했다. 한 쪽 눈이 터지고 이빨이 드러나게 얼굴이 베였는데도, 나는 두 발로 일어선 채 스틱을 들고 있었다. 그르릉, 고양이는 앞발을 핥고 있었다. 그 앞발에는 내가 찌른 상처가 있었고, 또 그 앞발은 내가 상처를 낸 무기이기도 했다. 원래 이런 것일까. 아니, 사실 이상한 것은, 지구가 팽창하고 있다는 것이고, 더 이상한 것은, 나만은 그 팽창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이지만. 그래도. 아니, 언젠가 본, 글이었나, 아니면 SF영화였을까, 우주의 모든 것은 팽창하고, 팽창하고, 팽창하다가 소멸한다는 것, 정말로 모든 것들은 팽창하고 사라지는 것일까,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 팽창하지 않은 것들도 결국 사라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일까, 따위의, 점점 커지고 길어지는 물음은 집어던진 채,
나는 오직 내가 단단히 쥐고 있는 스틱의 촉감을 느낄 뿐이었다. 눈앞의 ‘나비’는 웅크린 채였다. 그새 ‘나비’는 더욱 거대해보였다. 아니, 거대해져 있었다. 또 세상이 팽창해 버린 것일까. 마지막 순간, 내 귀에 들린 것이 ‘나비’의 울음소리였는지, 아니면 내가 집어던진 주마등이 깨지는 소리였는지는 모른다. 모든 것이 팽창을 멈추고 나를 지켜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우렁차게 고함을 지르며 스틱을 쥐고 ‘나비’에게 달려들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