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깃드는 스산한 생각
···(중략)···
내가 작가로서 처음 모 신문사 단편소설부문에서 입상하여 고료 300만원을 받았을 때의 일이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등단한 셈이었다.
우쭐해질 대로 우쭐해진 나는 그 무렵 일종의 미친 짓들을 연달아 하고 있었다. 대략 한 줄로 세울 수도 없는 행각들이지만, 그 미친 짓들을 굳이 한 꿰미로 만들어본다면 아마 ‘어떻게 고료를 탕진할 것인가’라는 새끼에 엮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내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드는 그 미친 짓들 중 하나가 바로 문신이었다.
이태원의 한 바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웬 사람의 팔뚝을 가로지르는 영어 문장을 보았다. 그 순간 나 역시 충동적으로 내 팔뚝에 내 처녀작의 첫 문장을 새기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미 몸 곳곳에 글귀와 그림을 새긴 친구와 함께 처음으로 찾아간 문신 시술소는 한 낡은 건물의 지하에 작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 작은 문신 시술소는 처음 맡아보는 담배 연기로 가득했다. 우리가 들어가자 물고 있던 갈색 담배를 재빨리 끈 문신 시술사는 마치 두건을 쓴 인도사람 같았다. 나는 그의 팔뚝을 물들인 푸른 무늬가 꿈틀거리는 것을 바라보며 문신 시술을 받았다. 마치 드릴처럼 생긴 기계가 내 팔뚝에 글자를 새기고 있었다.
내 소설을 담게 될 종이들이 느끼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더럽게 아프다는 것만 빼면.
시술이 끝나고 문신 시술사와 안면이 있었던 내 친구와 함께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문신 시술사는 태비라는 이명으로 불렸다. 그의 팔뚝에 있는 무늬는 그의 첫 문신이자 그가 시술한 첫 문신이며 힌두교의 파괴신인 시바를 모티브로 디자인한 무늬라는 사실을 들었다. 그래서 나도 내 처녀작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고.
그러자 그도 자신이 아는 소설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중간 중간 담배연기와 침을 뱉으며.
사실을 말하자면 그 소설가는 그가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검찰에 모 교도소 측 참고인으로 출두했을 때의 이야기다.
#
여러 장의 사진.
사진은 읽기 힘든 문장으로 가득했다. 그 문장을 읽기 힘든 이유는 그 문자가 조악했을 뿐만 아니라, 그 문장이 굴곡진 면에 쓰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말 그대로 흰 것은 종이, 검은 것은 글자였지만
사실
흰 것은 피부, 검은 것은 글자였다.
문신이었다. 괴괴한 느낌의 문신이었다. 그림도 어떤 문양도 아닌 마치 소설책처럼 빼곡한 글이었다. 교도소 측은 이 문신이 결코 어떠한 학대, 즉 타인에게서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문신이 아니라는 것과 이 문신을 한 도구가 결코 불법적인 도구, 예컨대 교도소 안으로 들여올 수 없는 것들, 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싶어 했다.
태비는 그 문신이 손등, 손목, 팔뚝과 허벅지, 종아리에 행해졌다는 점을 미루어 분명 스스로도 충분히 이 문신을 몸에 새길 수 있다고 증언했다. 법정에서 과연 사망자가 스스로 고통을 이기고 자기 몸에 문신을 새길 수 있냐는 사망자 측의 질문에 태비는 자기의 팔뚝으로 증언했다.
또 태비는 이 문신은 아주 조악한 도구, 젓가락이나 못을 갈아서 만든 조잡한 쇠침과 볼펜 잉크로 새겨졌다고 증언했는데 이는 검찰의 부검결과와도 일치했다. 또 태비는 일부 문신, 허벅지에 새겨진 문신은 아직 완전히 상처가 마르지 않았다는 것도 첨가했다. 검찰은 문신의 상태로 보아 사망자가 죽기 일주일 전 쯤 새긴 문장으로 추측했다.
사망자는 교도소의 수감자였다. 사인은 자살이었는데, 사망자의 유가족들은 평소 사망자가 정신적으로 건강했음을 들며 사망자 몸의 문신으로 보아 교도소 내 상습적인 괴롭힘으로 인한 자실이라고 주장하며 국가와 교도소를 상대로 고소했다. 이에 교도소 측은 간수들의 증언에도 다른 수감자들이 사망자를 괴롭혔다는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았으며, 사망자가 교도소로 수감되었을 때 이미 심신이 미약했다는 점, 그리고 문신은 스스로 시행했다는 점을 들었다. 태비는 교도소 측의 이 세 번째 증거에 대한 참고인이었던 것이다.
#
“와, 그런 줄 몰랐는데 태비씨 대단하네? 태비씨가 경찰차 타면 그건 다 대마 때문인 줄로만 알았는데 참고인도 했단 말야?”
친구가 입에서 갈색 담뱃대를 떼며 말했다. 나도 입에서 담배를 떼고 미심쩍은 눈으로 담배를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녀석은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럼 거기서 죽은 놈 빨가벗은 걸 봤단 말에요? 우엑.”
“아, 그거 말이지?”
태비가 씩 웃었다.
“뭐, 죽은 년이었지.”
#
소설: 흙의 시간 초고
L은 사이코매트리다. 물체에 손을 대는 것으로 물건의 역사를 알게 된다. 그는 점점 자신의 능력이 강해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는 유명세를 얻는다. 그는 그것이 만족스럽다. 자신의 손을 경외의 눈빛으로 보는 대중을 보며 L은 머리의 꼭두가 짜릿해오는 것을 느낀다.
어느 날 L은 한 작은 공원의 잔디밭에 걸터 앉는다. 공원에 뛰놀고 있는 아이들과 젊은 남녀들. L은 자신도 모르게 한 줌의 흙을 거머쥔다. 문득 L의 눈 앞에 검은 영상이 스친다. 처음 보는 것이다. L은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사람들이 L을 바라본다. L은 비명을 지른다. 자신의 얼굴을 쥐어뜯다가 쓰러진다.
L은 흙의 시간을 본다. 수없는 죽은 이들과 죽은 것들과 썩은 이들과 썩은 것들을 본다. 거슬러 올라가고 얽혀들어가는 시간 속에서 죽은 것들과 죽인 것들은 뒤엉키고 한데 뒤섞인다. L은 병실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일곱 번의 자살 시도를 했다. 마지막 시도에서 L은 왼쪽 손목을 끊어냈다.
L은 죽기 전 자신이 본 것이 겨우 선사시대 즈음의 풍경이라는 것에 절망했다.
L의 죽음은 단신으로 짤막하게 보도되었다.
#4
글을 쓴다.
종이가 사람 마음을 움직이던 시대가 지났다는 건 알고 있다. 이제 움직이는 건 사람 마음이 아니다. 드라마와 영화 속 배우들이다.
글을 쓴다.
꾸며낸 이야기를 적는다.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게 활자로 꾹 짓누른다. 이야기가 퍼덕이고 퍼덕이다 숨을 거두는 것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마침내 이야기는 움직임을 멎고 종이 위에 말라붙은 글로 남는다.
이 건 내 글이다.
내 이야기다.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다. 아무도 읽지 않아도 된다. 배우도 필요 없다. 허공을 떠돌아다녀야 할 이야기를 잡아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 이건 소유의 문제다. 예쁜 옷과 구두를 사고, 멋진 남자를 사귀는 것과 마찬가지다.
#
슬기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특히나 지금 눈앞의 누리, 속옷 차림으로 널브러져 자고 있는 22살의 누리를 보며. 누리 뱃속에서 술과 효모가 뒤섞이며 내는 냄새가 자취방 공기를 할퀴고 있었다. 누리는 평소에는 잠버릇이 없지만, 꼭 술만 먹으면 저렇게 옷을 벗어댄다. 위험한 잠버릇이라고, 슬기는 혼자 중얼거렸다.
22살. 미모의 여대생. 취하면 반나신으로 자는 잠버릇. 위험.
단어들이 슬기의 머릿속을 통통 튀어 다녔다. 한숨을 쉬며 슬기는 머릿속의 단어들을 쫓아냈다. 손을 휘둘러 모기를 쫓듯이.
이번 누리의 남자친구는 술 먹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다. 어제도 누리는 9시, 11시, 12시 반 그리고 2시에 걸쳐 전화를 했다. 시간이 새벽으로 향할 때마다 점점 목소리는 알코올에 꼬여 갔고. 집에 들어온 건 3시인가.
집에서 술 냄새 풍기지 말랬더니만, 이 기집애.
술을 먹지 않는 건 하나의 약속이었다. 글을 쓰는 것과 술 마시는 것을 동등하게 숭고한 것으로 치는 작가도 있다지만 글쎄, 슬기는 고개를 저었다. 저 쪽 끝에 술과 도박에 미친 도스토옢스키가 있다면 이쪽 끝에는 흔들의자에 앉아 명상에 잠긴 똘스또이가 있는 거야. 그렇지만 동거인에게까지 술을 금지 할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이 곳에서는 술 먹는 것을 삼가달라. 계약할 때 그렇게 슬기와 누리는 약속을 했을 뿐이다.
그때 누리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신입생이었고, 게다가 옆에는 누리와 함께 상경한 부모님까지 있었으니 누리 역시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지금 자기가 이렇게 거실에 대자로 드러누워 모기에게 피를 바치고 있을 줄이야 생각도 못했겠지.
누리의 방에서 홑이불을 끌어오며 슬기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누리의 하얀 몸 위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거실 여기저기 뱀 허물처럼 흩어져 있는 누리의 옷을 주워 모았다. 늘어진 스타킹. 짧은 바지.
그때 누리가 엉덩이를 긁으며 몸을 돌렸다. 이불이 흐트러지면서 다시 슬기의 눈앞에 누리의 몸이 드러났다. 세상에. 많이도 물렸네. 누리의 몸 여기저기 발갛게 부어오른 모기의 입맞춤 자국에 슬기는 얼굴을 찌푸렸다. 구겨진 옷들을 세탁기에 넣고 돌아온 슬기는 물파스를 들고 누리 옆에 털썩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기집애. 진짜 가렵기도 하겠네.
물파스의 둥그런 입술이 누리의 몸을 핥기 시작했다. 화한 파스 냄새가 금방 누리의 몸을 뒤덮었다. 진짜 물리기도 많이 물렸네. 슬기는 어쩐지 피식 웃음이 났다. 누리의 허벅지 부근으로 파스를 움직이던 순간.
슬기는 순간 몸이 움찔하는 것을 느꼈다.
이 기집애가 미쳤나? 아니면 설마, 그 남자애가?
강제로라도 한 건가?
슬기는 다시 한 번 누리의 몸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모기 물린 자국이 아니다. 물파스를 갖다대자 누리가 몸을 씰룩거렸다. 누리의 오른쪽 허벅지에 붉게 부어오른 자국이 있었다. 엄지 한 마디 정도의 넓이. 아스팔트 바닥에 맨살을 벗겨낸 것 같은 상처.
그리고 손톱으로 살을 긁어낸 듯한
글씨.
글씨. 글씨인가? 누리가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슬기는 얼른 누리에게서 파스를 뗐다. 누리가 몸을 돌이키면서 그 상처와 그 ‘글씨’도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순간 슬기는 자신이 두근거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두근.
이상한 일이지. 참. 슬기는 일어나며 마저 누리의 몸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누리는 꿈지럭거리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이제 8시다. 어느새 창 바깥은 하얗게 떠오른 태양이 잔뜩 밝게 빛나고 있었다.
기집애.
다시 한 번 어깨너머로 누리를 돌아보며 슬기는 피식 웃었다. 찬장을 열어 들기름을 꺼냈다. 아침 먹어야지. 누리야. 보글보글, 북어국 끓이는 냄새가 고소하게 원룸 안을 메웠다. 슬기가 간을 보는 동안 어느새 누리가 부스스한 얼굴을 들이댔다.
“어마, 깜짝야. 야! 일어났음 말을 해야지!”
“응······.”
여전히 정신없는 듯한 얼굴로 끓고 있는 북어국을 바라보던 누리가 슬기를 향해 빙긋 웃어보였다.
“고마워, 언니. 나 그럼 씻고 옷 입고 올게.”
“그래. 설거지는 니가 하는 거다?”
누리는 못들은 척 느릿느릿 화장실로 향했다. 슬기는 혼자 피식거리며 마저 국간장으로 간을 맞추고 불을 줄였다. 상에 냄비받침을 놓고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는 동안 츄리닝을 걸친 누리가 나타났다.
“야, 근데 너 어제 뭔 일 있었어? 너 엉덩이······.”
“엉덩이? 머가?”
“너 엉덩이에 뭐 난 거 같던데?”
“그래? 그럼 이따 확인해바야지.”
오전 9시의 아침식사.
원룸에는 북어국 냄새가 아직도 가득했다.
#
10시가 조금 넘어서야 누리가 가방을 챙기고 허겁지겁 2교시 수업을 들으러 갔다.
“야, 야, 지갑 챙겼어?”
머라구?
“지갑 챙겼냐구?”
벌써 골목 저 멀리서 눈을 깜박이고 있던 누리가 방긋 웃으며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오케이 사인.
그렇지만 집으로 돌아온 슬기는 누리의 책상에 놓인 지갑을 보았다. 기집애. 그렇지만 뭐 저 없으면 죽고 못사는 오빠도 있으니까. 혹시나 싶어 슬기는 누리에게 문자를 보내두었다. 혹시 집에서 점심을 먹을지도 모르니까.
이제 텅 빈 집안은 식은 북어국 냄새를 풍기며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싱크대를 정리하고 슬기는 걸레를 들었다. 부엌과 거실. 그리고 세 평짜리 방 두개. 도합 열 평인 집에 쌓인 먼지를 훔쳐나간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려놓고.
조용히 주전자가 수증기를 뿜어내는 소리가 부엌과 거실을 지나 방을 닦고 있는 슬기의 귀에 들린다. 슬기는 일어나 물을 따른다. 원두가 우러나는 냄새가 부엌을 흠뻑 적신다.
커피가 우려 날 때까지 거실의 앉은뱅이책상에 놓인 노트북을 켠다. 거실에 TV는 없다. 다만 슬기가 작업하는 컴퓨터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가만 생각해보면 불평을 할 법한 누리지만 의외로 TV에 대해 군소리를 늘어놓은 적은 없었다. 슬기는 문득 누리가 처음 짐을 들여놓던 때를 떠올렸다.
동그랗게 뜬 눈.
부모님도 돌아가고 나니 더욱 애처로워 보이는 누리의 모습에 슬기는 그만 웃어버렸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슬기는 누리가 중고등학교 시절 여러 응모전에서 입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 정말?
네.
그럼 우리 학교도 그걸로 온거야?
네.
수시로여.
기집애. 그렇지만 슬기는 요사이 누리가 글을 쓰는 일을 본 적이 없다. 술만 안 먹었으면 혹시 모르는 일인데.
컵에서 티백을 뺀다. 첫 모금.
그리고 자판에 손을 올려놓는다. 숨을 고르고. 상 옆에 펼쳐놓은 공책을 보기도 하며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얽혀있는 단어와 문장이 꼬투리를 펴기 시작했다. 천천히 꽃을 향해, 또는 가지 끝의 꼬투리를 향해 글자들이 흰 공백을 메우기 시작한다.
문득 슬기는 책상 옆 책장을 바라본다. 스티븐 킹. 마이클 클라이튼. 존 그리샴.
등의 전집으로 가득 차 있는 책장. 성공한 작가들의 글로 가득한 그 책장을 바라보던 슬기는 다시 자판에 손을 올려놓았다. 집중하자. 언젠간 나도. 언젠가는.
걸레로 방바닥을 훔치는 것처럼 슬기는 공책에 숨겨진 소설 한 장 한 장을 찾아 컴퓨터에 옮기기 시작한다. 자기 전에 또는 버스 안에서 휘갈긴 단어가 문장이 되고 문단이 되고,
글이 된다. 한 가지 생각이 꼬리를 흔들고, 다른 생각이 덩굴손을 펼치면,
하나의 영감이 완성되고 글이 천천히 꼬투리를 펴기 시작한다.
11시가 조금 넘은 아침. 누리를 학교에 보내고 방안에 가득 원두냄새를 풍기며 커피를 먹는 이 순간이 바로 슬기가 글을 쓰는 시간이다.
여성잡지에 연재하기 적당한 소설이다. 사실 슬기는 이미 투고하려는 잡지의 연재소설 코너를 맡은 편집장을 만나본 적이 있다. 졸업하기 두 달 전, 자신의 담당 교수의 방에서. 밖은 겨울이었지만 안에는 콧등에 땀이 맺힐 정도로 히터가 더운 숨을 뱉어내고 있었지만 그 방 안에서 콧잔등에 땀방울이 맺혀 있는 것은 슬기뿐이었다. 어쩌면 단순한 예의의 표시였는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편집장은 슬기의 원고를 마음에 들어하는 듯 싶었다.
이 정도 문체면 괜찮아요. 이야기도 좋고. 진짜로 한 번 투고해보지 그래요?
물론 이런 상업 잡지에 투고하라는 게 조금 기분 나쁠 수도 있지만(예의바른 웃음)
우리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으로.
네. 네. 네!(감격스러운 듯)
기분 나쁠 리 없다. 글을 쓴다는 것만으로도 좋다. 만일 누가 돈을 준다면 더 좋다. 누군가 그 글을 읽고 좋아해준다면.
글을 쓰기 전에 슬기는 여성잡지나 인터넷에서 각광받는 소설들을 숱하게 읽어보았다. 30대, 40대 초반 주부들이 즐겨보는 아침드라마나 미니시리즈 대본도 찾아보았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결국 슬기의 소설은,
드라마나 다름없다.
단 한 명의 배우도 없는 드라마. 얼굴도 목소리도 없는 드라마. 오로지 슬기의 손끝이 빚어내는 대로 춤추는 배우들뿐이다. 납작한 활자 속에 갇혀 있는 배우들. 슬기는 가끔 꿈을 꾸기도 했다. 한 번도 본 적없는, 그렇지만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배우들이 자신의 소설을 토대로 드라마를 찍는 것을.
갓 이혼한 30세의 여자. 전 남편에 대해서는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TV에서 많이 보여 준 이미지를 조금씩만 끌어낸다. 경상도나 해병대 출신의 고급 공무원. 무뚝뚝하고 절대 자신의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의심 많은 성격의 남편
여자는 이혼이 곧 자신의 독립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몇 번의 실패가 이어지고 Jane은 위자료만으로는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3살 난 아이의 어린이방도 보내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오늘 처음 Jane이라는 이름으로 노래방 도우미를 나가게 된 여자. 슬기의 소설은 여기서 시작한다. 그러나 그 날 Jane은 계속되는 취객들의 희롱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가고, 그녀를 따라 나온 H와 이야기를 나누며 위로를 받는다.
이제 Jane은 노래방 도우미를 그만 둔다. 주인공의 추락이 반복되면 타락이 된다. 타락한 주인공은 공감을 얻기 힘들다. 그녀는 일단 아르바이트라도 시작해 본다. 그러면서 편의점 사장인 S와 갓 대학을 졸업한 같은 아르바이트생 K를 만나게 된다.
Jane은 어떤 남자를 선택할까.
자판을 두드리던 슬기의 두 손이 멈췄다. Jane은 과연.
그리고 결국 그 질문은 슬기에게로 돌아온다. 나라면 어떤 남자를 선택했을까. 슬기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Jane에게 겹쳐보았다. 그렇지만.
자신의 얼굴이 이런 아침드라마의 여주인공에 어울리지 않는 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평범하고 평범하고 또 평범한 얼굴. 슬기는 눈을 감았다. 사실 슬기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묘사하고 있는 Jane의 외양이 누리를 닮아가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렇지만 멈추지 않았다.
멈춰야 하는 걸까? 누리에게 사과해야 하는 걸까?
자신이 룸메이트 언니의 글 속에서 이혼한 노래방 도우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 누리는 어떻게 생각할까.
슬기는 고개를 젓고 다시 한 번 모니터에 신경을 집중했다. 나라면 어떤 남자를 선택했을까, 로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작가라 할지라도 소설 바깥의 인물이 소설 내부의 이야기를 결정지을 수 없다.
어느 순간 답이 나올 거야. 어느 순간, Jane이 결정을 내리겠지. 슬기는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동시에,
누리라면 어떤 남자를 선택할까. 하고 혼자 되뇌어 보았다. 결국 Jane은 소설 안의 누리, 내가 타락시킨 누리에 지나지 않으니까. 모니터를 덮었다. 그리고 슬기는 한참, 누리의 책상을 바라보았다.
누리의 책상 옆에 쌓여있는 상업 소설들. 스티븐 킹. 존 그리샴. 시드니 셀던.
일종의 주문처럼 외국 작가들의 이름을 되뇌었다. 성공한 사람들. 그리고 내가 앞으로 그렇게 될 사람들. 오기와 선망이 담긴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슬기는 그들의 이름을 되뇌었다.
애완동물 공동묘지. 그것. 미저리. 샤이닝.
의뢰인. 레인메이커.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
여자는 두 번 울지 않는다. 장미의 환상. 천사의 분노.
책의 제목들을 훑어보던 슬기의 눈이 허공에 멎었다. 문득 슬기의 눈앞에 떠오른 것은 시체였다. 하얀 시체. 발가벗은 여자의. 붉은 피가 마룻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하염없이 피가 빠져 나온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얼굴은······.
슬기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망상에서 빠져나왔다.
아침에 보았던 누리의 가 떠올랐다. 팬티 아래 허벅지에 붉게 돋은 상처. 아니, 상처가 아닌
글씨. 분명 붉게 달아오른. 마치 소에게 찍은 낙인처럼.
아냐. 그건 문신 같은 게 아냐. 보도블록 사이에서 돋아나는 작은 풀처럼, 누리 안에서 돋아난 것이 분명했다. 설령 질병 모기가 문 자국이 부어오른 것처럼. 자연스럽게 인체의 몸에 돋아난.
종기. 고름.
순간 슬기는 역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누리한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슬기는 다시 고개를 저으며, 동시에 그 생각을 이어나갔다. 그 돋아난 ‘상처’가 그리고 있는 글씨.
흘기시간
흘, 기, 시, 간,
라는 그 네 글자가 마치 낙인처럼 슬기의 동공을 고정시켰다. 허공에 뜬 사진을 보는 것처럼. 슬기는 자기도 모르게 허공의 글씨를 어루만지기 위해 멍하니 손가락을 움직였다. 얼핏 손가락이 그 글씨에 닿았다고 생각 순간 그 글씨들은 흘러 내려가 버렸다.
흙의 시간. 흙의 역사. 흙의······.
슬기는 자기도 모르게 책상에 놓여 있던 노트 한 장을 북 찢었다. 그리고 고름을 짜내는 것처럼 한 편의 초고를 완성할 수 있었다.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마치 원래 알고 있었던 이야기. 아니, 몸에서 돋아난······.
슬기는 시계를 보았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었다.
그날 누리는 수업을 마치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이 아닌데도. 꼭 오늘 누리가 집에 일찍 온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누리는 어딘가 흥분해 있었다. 그리고
#
“언니언니언니언니!”
숨도 쉬지 않은 채 누리가 입을 열었다. 부츠를 벗으며.
“왜?”
“이거, 이거.”
슬기는 그 순간 아직도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종이를 구기면서 살며시 등 뒤로 숨겼다. 왜 그랬을까. 만일 슬기가 그 때 그 종이를 보여줬더라면. 나중에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그렇지만 슬기는 자신의 종이를 숨겼다.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짐승이 남의 영역에서 꼬리를 말듯.
슬기의 몸이 알았던 것이다. 이건 내 영역이 아냐.
그래서 누리의 글 앞에 꽁지를 만 것이다. 그리고 누리의 글을 보는 순간. 슬기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슬기 안의 목소리는 낄낄거리며 외치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럴 줄 알았어.
누리의 글은 슬기의 글과 거의 비슷했다. 초고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다만 조금 더 질척하고 조금 더 끈적한 문장들이 미숙한 단어들 사이에서 몸을 뒤틀고 있었다.
나도 알고 있었어.
나도 알고 있었다구. 슬기도 마음속으로 되뇌어 보았지만 온 몸의 떨림은 멎지 않았다. 제목까지 같다. 흙의 시간. 마치 둘이 하나의 글을 보고 쓴 것처럼.
흘기시간.
흘. 기. 시. 간.
순간 슬기의 몸속을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어쩌면.
영감.
몸에서 떠오른 자연스러운.
누리 역시 그 것을 깨닫는데 오래 지나지 않았다. 그 글자들, 살갗이 붉게 벗겨진 곳에 부풀어 오른 그 작은 글씨. 그 글씨들은 이내 딱정이가 앉고 아물어갔다. 쓰라리지 않냐고 슬기가 물어본 적도 있었지만 누리는 그저 미간을 찡긋 했을 뿐이었다.
누리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그 글씨들이 돋아나고 아물어가길 반복했다. 글자의 길이나 개수에도 대중이 없었다. 때로는 거의 소설의 한 문장에 가까운 길이의 글이 척추줄기를 타고 돋아나기도 했다. 때로는 허벅지. 때로는 엉덩이. 때로는 어깨. 주로 옷 안쪽에만 그 글씨들이 돋아났다. 마치 음지에서 자라나는 버섯처럼.
버섯.
포자를 뿌리고 썩은 나무를 먹어치우는 버섯처럼.
그렇지만 이 글씨는 누리와 공생을 택한 것 같았다. 글씨가 간혹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위치, 등줄기나 어깨 뒤편에 돋아날 때면 누리는 슬기를 불렀다. 그리고 슬기는 그 글자들을 읽어주곤 했다. 누리의 따뜻한 살 위에 돋아난 그 글씨.
누리는 신나게 그 글씨들을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그 글씨들은 누리의 노트 위에서 하나의 글로 잡혀갔다. 누리가 신나게 단편 호러소설들을 여기저기에 투고하는 동안, 슬기도 태연히 웃으며 글을 써내려갔다. 다만 슬기와 누리의 생활도 천천히 바뀌고 있었다. 이제 제대로 된 핑계거리를 만났다는 듯이 누리는 날마다 폭음을 했다.
슬기는 더 이상 아침에 글을 쓰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그만 둔 것도 그 이후였다. 집에 도사리고 앉아 슬기는 취한 누리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리고 취한 누리가 벌거벗은 채 드러눕기를 바랐다. 그녀의 몸에 새로 돋아난 글자들을 찾으며.
Jane이 어떤 남자를 택했을까. 그건 이제 슬기 눈 밖에 난 일이었다.
Jane과 H와 S가 삼자대면한 이후로 글은 한 문장도 뻗어나지 않고 있었다.
#
영감.
사냥꾼은 사슴을 쫓고 어부는 고기를 쫓는다. 그리고 작가는 영감을 쫓는다.
사슴이라기보다는 고기에 비유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영감은 돌로 막아 놓은 개울가 안에서 뛰노는 고기처럼 머릿속을 헤집어놓는다. 그렇지만 내겐 그물도 작살도 낚싯대도 없다. 세상에는 물고기를 잡는 수없이 많은 정론과 그보다 더 많은 도구들이 있다. 영감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작가론과 방법용 책들. 그렇지만 영감을 잡는 도구는 아직까지 발명되지 않았다.
그래서 작가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돌 밑에서 생선을 더듬듯, 맨손으로 머리를 더듬고 있다.
아주 지루한 일이다.
그렇지만 영감을 얻고 나면,
제 손으로 단단히 그 퍼덕이는 영감을 붙들고 나면.
아. 그 희열은 설명할 수 없다. 몸에 젖은 물을 털고 물 밖으로 나와 영감을 돌 위에 패대기치는 순간. 점차 영감의 움직임이 멎어간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여유를 갖고 돌 위에 뻗어있는 대가리, 몸통, 지느러미 등을 통해 글의 감을 잡아간다.
우리가 영감을 사랑하는가, 또는 증오하는가.
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지금 눈앞의 영감을 갈가리 찢어 토를 달고 문장을 더하면서 글을 쓰는 일에 집중할 뿐이다. 때로는 아직도 영감이 움직일 때가 있다.
글을 쓰면서 플롯이 가지를 치기도 하고 등장인물이 뜻밖의 일을 저지를 때도 있다. 그렇지만 초고가 끝나고 나면, 붉은 펜으로 수없이 수정의 비늘이 붙고 나면 마침내 영감은 죽은 물고기나 다름없게 굳어버린다.
뻣뻣해진 비늘. 탁한 눈동자.
결국 글은 살아있는 영감을 얻고 그 영감을 갈가리 찢어버리는 것이다. 사실 그 과정에서 무슨 글이 튀어나오던 작가는 알바가 없다. 글을 쓰며 작가는 때로는 울기도 하고 때로는 웃기도 하지만 이 역시 다만 제 손에 단단히 쥐고 있는 그 영감. 그 영감의 물크런 살과 비늘을 찢는 데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
아래의 글들은 모두 사건 현장에 떨어져 있는 노트들에 적혀있는 단어들과 문장들을 꿰매어 만든 일종의 소설 초고다. 알아 볼 수 없거나 훼손된 부분은 중략했다. 노트는 짧은 시, 소설의 초고, 문장, 단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래의 세 글들은 노트를 빼곡히 메운 글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 노트가 누구의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굳이 누구의 것을 밝힐 이유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둘의 소설은 같을 테니까.
<바퀴벌레의 선>
모든 바퀴벌레는 배를 보이고 죽는다.
B는 수없이 많은 바퀴벌레를 죽이면서 그 진리를 깨달았다. 라이터에 그슬려 죽일 때도 물에 빠트려 죽을 때도 바퀴벌레는 항상 등을 바닥으로 한 채 죽는 것이다.
그날도 B는 자취방 구석에서 기어 나오는 바퀴벌레 한 마리를 발견했다. 재빨리 도망가려는 것을 잡지로 내리쳤다. 잡지를 통해 팔로 전달되는, 벌레가 으깨지는 느낌. 잡지를 집어던졌다. 그리고 태오는 혐오스러운 광경을 보았다.
방금 자신이 쳐 죽인 바퀴벌레가 뒤집어지며 떨어뜨린 알집에서 하얀 새끼 바퀴벌레들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B는 다시 잡지를 쥐어말았다. 내리쳤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내리쳤다. 으깨진 바퀴벌레들을 휴지로 닦으며 B는 이 새끼 바퀴벌레들은 등을 하늘로 하고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날 밤의 일이었다. B는 눈이 간질거려 잠에서 깼다. 그 순간 B는 자신의 얼굴을 밟고 달아나는 존재를 느꼈다. 바퀴벌레들이 B의 눈물을 빨아먹고 있었다.
B는 방금 있었던 일이 꿈인지 또는 사실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눈이 아팠다. 그렇지만 눈을 비비면 다음날 분명히 후회할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방의 불을 켰다. 방은 잠잠했다. 다시 불을 끄고 누웠다. 잠이 들었다.
그리고 B는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이번에는 진짜였다. B가 깬 것은 귀에서 들리는 바퀴벌레의 발자국 소리였다. 귀 안에서 바퀴벌레들이 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혀에서 바퀴벌레의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
온 몸에서 느껴지는 바퀴벌레의 느낌이 증식하고 있었다. 온 몸이 따가웠다. 동시에 온 몸이 간지러웠다. 그렇지만 B는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벌레의 독에 중독된 것처럼.
바퀴벌레가 비누, 치약, 고무까지 소화한다는
B는 그제야 자신이 선을 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제나 배를 보이고 죽던 바퀴벌레들. 그게 그들 나름의 죽음의 풍습이었음을.
내리치고 내리치던 잡지와,
등을 돌릴 새도 없이 으깨진 새끼 바퀴벌레들을.
그리고 바퀴벌레들도 선을 넘었다.
<자살병의 노래>
능선 위 적송 가지에 매달려 굽어보면은-
흔들리면서 흔들리면서 흔들리면서-
기역자 랜턴 불빛들이 흔들리면서-
조물주도 가지에 매달려 흔들리면서-
태초가 완벽했다 하리로다.
태초가 완벽했다 하리로다.
<흙의 시간>
사이코메트러(주석)인 A는 어려서부터 홀아버지 밑에서 자라났다.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던 날 A는 아버지에게서 어머니 무덤의 위치를 듣게 된다. 문득 A는 가끔 주말마다 아버지가 등산이라는 이유로 사라졌던 이유를 깨닫게 된다.
어머니 무덤에 앉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보던 A는 끝끝내 아무런 기억도 찾지 못한다. 자신이 만진 사물의 기억은 알고 있는 자신이 정작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모른다는 것에 대해 씁쓸해하던 A는 문득 자신의 능력에 대해 호기심이 인다. 혹시 자신의 능력으로 이 ‘흙의 역사’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어머니가 가진 기억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A는 무덤의 흙 한 줌을 쥐고 호흡을 집중한다. 그러나 그 흙 속에서 떠오른 이미지들은 A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썩어가면서 발버둥치는 낙엽 속 세포들의 절규. 짓이겨지는 곤충들의 비명.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는 새. 시체의 살갗을 뚫고 들어가는 박테리아들의 웃음소리. 녹은 시체들을 빨아먹는 구더기들의 트림 소리. 마침내 그 이미지들은 관 속에 갇힌 청파리에게로 다다르게 된다.
그리고 그 청파리의 다리에 닿았던 어머니의 시신을 통해 A는 마침내 어머니의 기억에까지 도달한다. 자신을 의심하는 남편. 강간에 가까운 성 강요. 반복되는 남편의 구타. 뱃속의 아이에 대한 저주, 음주, 타락 등.
···(중략)···
A는 자신의 눈을 파낸다. 손가락에 뜨뜻한 것이 닿는다. 터져나온 유리체.
A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손가락에 걸리는 것들을 잡아 뽑는다. 그 순간에도 흙의 영상은 끊이지 않는다. 쟁기를 휘두르는 노인. 그 옆을 지나가는 닭. 닭의 항문에서 떨어지는 배설물. 그 배설물에 뒤섞인 기생충과 세균들. 그 것들을 핥아먹는 딱정벌레. 노인의 몸에서 떨어진 각질을 갉아먹는 원충. 닭의 깃털에 매달려 있다가 끝내 온기를 잃고 말라 죽어버리고 마는 새벼룩.
···(중략)···
<기생충>
막막하게 푸른 하늘을 찍은 사진.
아프리카의 하늘을 찍은 그 사진은 희선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었다. 그렇지만 우진은 그 사진을 금방 넘겨버리고 말았다. 사진들을 모두 훑어 본 후에도 우진은 코끼리나 사자 사진은 없냐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희선은 그 중얼거림을 무시하며 아프리카에서 보냈던 한 달의 시간을 다시 떠올렸다.
티 없이 맑은 아이들. 그렇지만 한없이 굶주리고 아픈 그 아이들.
그 한 달 동안의 봉사시간동안 희선은 자신이 성장한 것을 느꼈다. 평생 해외경험이 없는 우진에게도 넌지시 옆구리를 찌르듯 제안해보았지만 우진은 자신은 물갈이가 심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가본 적도 없으면서 그런지 어떻게 알아.
아무튼 그 날은 희선이 아프리카에서 귀국한 후 첫 데이트였다.
카페에서 사진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맛있는 저녁을 먹고.
달콤한 와인바와 멋진 조경의 호텔.
깐깐한 희선마저 우진의 노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완벽한 1박 2일이었다. 아프리카에서 힘들 때마다 생각해보던 그런 데이트였다.
집으로 돌아온 희선은 이제 한창 개강준비에 들어갔다. 한국에서 아프리카를 그리워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영어단어와 전공 책들 사이에서 희선은 가끔 꿈같던 그 시간들을 상상하곤 했다. 심지어 몸살감기처럼 열이 올랐을 때 희선은 웃고야 말았다. 한국에서 물갈이를 하다니! 아프리카에서도 하지 않았는데.
그러나 생각보다 이 물갈이는 오래갔다. 일주일가량 계속된 열에 온몸이 붓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열이 심하지 않았던 탓인지 단순한 피로로 인한 단순한 몸살이라고 했을 뿐이었다. 정말 피로 때문일까. 그날도 희선은 갈증에 시달리며 꿈을 꾸었다.
아프리카. 막막하게 푸른 하늘.
불타는 듯 뜨거운 흙바닥은 갈래갈래 갈라져 있었다. 꿈속에서 희선은 맨발이었다. 몽롱했다. 춤추는 듯 이글이글한 공기를 헤치며 한참을 걷고 난 뒤에야 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강에는 웬 토인 소년이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물을 먹고 싶었지만 희선은 그 소년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소년의 눈은 뿌옇게 바래 있었다. 숨이 막히는 듯 했지만 눈을 뗄 수 없었다. 희선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소년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춤추고 있었다. 눈동자 안에서 춤추는 흰색의 긴 벌레들.
희선은 눈을 돌렸다. 강. 푸른 강에는······.
희선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 벌레들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희선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강. 그 강에는 뭐가 있었지? 들어가서 확인해봤어야 했는데, 하는 엉뚱한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러나 곧 희선은 고개를 저었다. 가이드들에게 수없이 들은 말이었는데. 아프리카에서는 절대 강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절대, 절대·······.
희선은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갈증이 심했다. 땀을 흘린 탓이었다. 온몸이 불타오르는 듯이 뜨거웠다.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물을 따라 마시자 통증이 조금 가라앉았다. 희선은 시원한 강물을 생각하며 잠들었다. 딱 한 번 이었지, 그 토인 소년과 물을 튀기며 놀았었지. 하늘은 막막하게 파랬고, 땅은 불타는 듯이 뜨거웠고.
다음 날 통증은 더욱 심각했다. 희선은 끊임없이 갈증에 시달렸다. 손이 떨릴 정도로 온 몸이 뜨거웠다. 컵에서 물이 흐르면서 희선의 팔을 적셨다. 순간 희선은 고통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희선은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희선은 어떤 ‘충동’을 느꼈다. 대야에 물을 받았다. 발을 담그자 희한하게도 다리를 저리던 통증이 사라졌다. 순간 희선은 자신이 오랫동안 목욕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욕조에 물이 차는 동안 희선은 눈을 감았다. 열이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온몸을 뜨겁게 달구던 열이 사라지더니. 갑자기 피부가 쓰라렸다. 희선은 눈을 떴다. 그리고 비명을 질렀다. 살갗이 제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희선의 몸 곳곳에서 살갗을 뚫고 나오는 희고 긴 벌레들이 욕조를 메우고 있었다. 붉은 피가 욕조를 물들였다.
희선이 응급실로 실려 갔다는 말을 들은 우진은 의아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최근 열이 좀 난다고 하더니 많이 심한 걸까. 희선의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고 난 뒤 우진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최근 우진도 몸살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우진은 꿈을 꾸었다.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아프리카. 막막하게 푸른 하늘. 불타는 듯 뜨거운 흙바닥, 그리고 강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희선······.
#
오랫동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눈이 붉다. 붉은 반점이 흰 자위 여기저기를 물들이고 있다. 눈꺼풀이 서로 맞닿을 때마다 눈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슬기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단지 자신 앞에 놓인 흰 화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슬기의 손이 움직였다. 자판 소리와 함께 Jane이 발걸음을 움직였다. 약간의 취기. 문 앞에서 Jane은 아파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S의 그랜저가 천천히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Jane은 씁쓸하게 웃으며 열쇠를 구멍에 꽂았다. 열쇠를 손에 쥔 채. 손목이 비틀렸다 다시 돌아오면서,
아파트 문이 열렸다.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집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괴괴한 공기가 Jane을 보고 놀라 어디론가 달아나기 시작했다. 애써 Jane은 자연스럽게 신발을 벗었다. 아이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어째서······.
거실에 꺼진 불을 켜며 Jane은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소파가 이물거리며 Jane의 몸을 받아들였다. 어쩐지 불편한 느낌에 Jane은 몇 번이고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리고 소파 앞의 탁자에 놓인 전화기를 보았다. 시어머니, 그러니까 ‘전’ 시어머니에게서 온 전화. 7통.
무슨 일이지.
Jane이 전화기를 집어 드는 순간. 그때 Jane은 무언가를 느꼈다. ‘무언가’. 말할 수 없는, Jane이 문을 열었을 때 달아나던 그 괴괴한 공기 같은 무언가가 가득 집안을 메우고 있었다. 무언가 감추고 있어. 아니, Jane은 ‘처음으로’ 이 집이, 이 공간이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
다시 한 번 Jane이 숨을 크게 들이쉬던 순간.
Jane은 여린 담배 연기를 맡았다. 누군가가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걸까. Jane은 대답을 알고 있었다. 아냐. 아냐. 그리고 애써 지웠던 기억들이 그 담배 향기를 쫓아 어슴푸레 떠오르고 있었다. 몸이 떨렸다. 코트를 벗지 않았는데도. Jane은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안방 문이 열렸다. 조용하게, 삐그드으어어어어어어어억 하고
관이 열리는 소리.
가 왼쪽 고막을 찢어놓을 듯 빈 집을 흔들어댔다. 그리고.
발소리. 맨발바닥이 방바닥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 차닥, 하고 내게 다가오는 소리. 그 소리. 또, 또 시작된 그 소리. Jane이 고개를 들었다.
안방에서 나온 전남편은 묘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아니, 남편이라고도 부르기 싫은 남자. 그리고 지금 그 얼굴을 보는 순간 Jane은 한때 자신이 저 남자와 함께 웃고 살을 섞었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 남자의 입에서 담배냄새가 흘러나왔다. 술냄새는 없었다.
늘 그랬다. 남자는 법정에서 항상 자신이 취해있었다고 주장했지만, Jane이 기억하는 한 남자가 술을 먹고 자신을 때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남자가 노란 황달기가 가득한 눈을 깜박였다. 누렇게 살찐 애벌레의 등 같은 눈. 기름진 눈에 뜬 동공이 Jane을, 겁에 질린 Jane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어떤 생각이 Jane의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보았을까? 과연 저 남자는 Jane이 S의 차를 타고 온 것을 보았을까? 설마······. 설마······.
그렇지만 다시 남자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Jane은 남자가 그 것을 보았음을 확신했다. 보았다. 분명히. 그래서 저렇게 웃고 있는 거야. 마침내 자신이 의심하던 것이 확인되었으니까. 저 미친놈이······. 저 미친놈이·······. 남자가 무어라 인삿말을 꺼냈지만 Jane은 듣지 못했다. 남자의 손이 흔들리고 있었다.
남자는 손에 망치를 쥐고 있다.
Jane은 눈을 감았다. 그 망치를 보는 순간, 어마어마한 소리가,
Jane의 두개골과 살이 으스러지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슬기는 눈을 떴다. 공기에 닿아 썩어버린 눈물. 뜨뜻미지근한 그것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금이 몇 시지. PC방 모니터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벌써 두 시. '새벽 두 시'. 다섯 시간 째야. 다섯 시간 째. 슬기는 글을 저장하고 메일로 보낸 후 일어섰다. 아니, 일어서려고 했다. 그렇지만 슬기는 비스듬하게 일어나려다 균형을 잃고 말았다. 슬기가 다시 제 자리를 바라보았다.
슬기의 자리 앞에는 500ml 맥주 캔 네 개가 텅 빈 채 굴러다니고 있었다. 취할 만도 하지. 아냐, 아냐. 난 취하지 않았어. 슬기는 애써 몸을 가누며 계산을 했다.
밤공기를 마시며 집으로 돌아오면서 슬기는 몇 번이고 헛구역질을 해댔다. 취기 때문인지 또는.
슬기는 고개를 저으며 문에 열쇠를 꽂아 넣었다. 아니, 열쇠를 찔러 넣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손목을 비튼다. 문이 열린다. 정신을 차려야 해. 아직 누리는 자고 있지 않았다. 아니 이미 빌라 밖에서 불이 켜져 있었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집 안은 술 냄새로 가득했다. 슬기는 누리를 노려보았다. 집 안에는 먹다 남은 족발, 맥주 캔 수 개와 소주 병 한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슬기는 갑자기 울화가 치밀었다.
“언니, 왔어?”
비웃는 얼굴.
“야, 박누리. 뭐야?”
“뭐?”
“너······. 너 내가 집안에서는 술 먹지 말랬지?”
“그거? ‘너 내가 집안에서는 술 먹지 말랬지?’”
슬기 목소리를 흉내 내던 누리는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뚝.
웃음이 멎었다. 누리는 여전히 빈정거리는 미소로 슬기를 노려보았다. 슬기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 남자. 그 남자. Jane을 바라보던 그 남자의 얼굴. 누리가 여전히 웃고 있다. 누리가 천천히 팔을 들어보였다. 슬기는 그 팔의 끝에 남자가 들고 있던 망치를 본 듯한 느낌에 빠져들었다. 부들부들.
“이거 봐. 이거 보라니까.”
아니다. 누리는 팔을 흔들어보였다. 순간 슬기는 누리의 팔에 선명한 글씨들을 보았다.
“왜?”
저 표정. 누리의 저 표정.
“부러워?”
누리가 다시 맥주 캔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렇지만 진짜로 맥주를 마시는 건 아니었다.
“이제 다신 안 보여줄 거야.”
선언.
슬기는 천천히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팔을 흔들고 있는 누리. 거실에 있는 앉은뱅이 상. 그 상 위에 놓여있는 소설책들. 스티븐 킹. 존 그리샴. 시드니 셀던. 그리고 다시 스티븐 킹.
덮여있는 노트북. 원고 노트들. 그리고 다시.
누리가 집어던진 갈색 봉투. 뜯겨져 있는 갈색 봉투. 벗겨진 아가리에서 원고지들이 흘러나왔다. 그렇지만 슬기는 원고지를 보지 않았다. 아니,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12부작. 자신이 Jane 이야기 대신 잡지사에 투고한 12부의 호러 소설. 반송되어 있었다. 슬기는 몸을 떨기 시작했다. 부들부들. 부들부들부들부들.
Jane 이야기를 더 써내려갈 필요는 없어. 내가 오늘 Jane을 죽였거든. 아니, 어떻게든 Jane이 살아나왔을지도 모르지만 신경 쓰지 않아. 허겁지겁 단지를 빠져나온 Jane? 음주운전사가 모는 미친 5톤 트럭? 아니, 어디에서 살더라도 Jane이 묵는 방에는 미친 강도가 찾아 들 거야. Jane을 성폭행하지 못한다면 죽이고야 말거라는 결심을 한 미친놈들이 칼을 들고 끊임없이 Jane의 창을 넘겠지. 깊은 강에서는 발을 헛디딜 거야. Jane, 산으로 간다면 부디 그루터기에 앉지 마렴. 그 안에는 오래 묵은 말벌집이 있을 테니까. 바다에서는 파도가 Jane의 몸뚱이를 휘감기 위해 흰 이빨을 갈고 있겠지. 도망가지 마. Jane. 이건 시작에 불과해. 결국 넌 내 글 속에서 죽게 돼있으니까. 데우스 엑스 마키나.
독기서린 침묵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누리가 슬기를 바라보았다. 독기를 가득 빨아먹은 눈. Jane을 바라보는 그 눈빛. 누리의 입이 씰룩거렸다.
말하지 마. 말하지 마. 말하지 마. 말하지 마.
말하지 마.
누리가 입을 뗀다.
말하지 마.
“이 도둑년아.”
누리의 그 한마디가 슬기의 고막을 진동시키는 것과 동시에 슬기도 소리를 질렀다.
설마 옆에서 누가 보고 있었다 하더라도 먼저 달겨든 게 누구인지 모를 성 싶었다. 슬기의 오른손이 누리의 머리채를 잡아 쥔 것과 동시에 누리가 슬기의 뺨을 후려쳤다. 누리의 손톱으로 누리의 볼을 긁어내며 허공으로 빠졌다. 검붉은 핏방울이 슬기의 뺨을 타고 흘렀다. 슬기가 손을 휘둘렀다. 슬기의 손에 단단히 잡힌 누리가 흔들렸다. 비명. 다시 한 번 누리가 손을 휘둘렀다. 목을 맞은 슬기가 켁켁 거리는 순간,
누리의 손이 창살처럼 슬기의 머리를 향해 뻗었다. 두 여자가 서로의 머리채를 붙드는 건 순간이었다. 키가 조금 더 큰 누리가 슬기의 몸을 짓누르며 쓰러졌다. 탁상이 쓰러졌다. 소주병과 맥주 캔, 먹다 남은 족발, 소설책들이 약 맞은 나방처럼 방바닥 위를 굴러다녔다. 그리고 그 위를 둘이 고양이처럼 엉켜 붙어 서로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마침내 누리가 슬기의 위를 올라타기 시작했다. 누리가 오른손으로 세게 슬기의 얼굴을 짓눌렀다. 그 와중에 누리의 손톱이 슬기의 왼쪽 눈자위를 파고들었다.
슬기의 흰자위로 피가 번져갔다.
붉다.
슬기의 한 쪽 세상이 붉게 물들어가는 그 순간.
슬기가 누리의 손바닥을 물어뜯었다. 눈 앞이 아찔한 고통이었지만 누리는 슬기의 몸 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누리는 슬기의 얼굴을 몇 번 후려치고 나서는 두 손으로 슬기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도둑년. 도둑년. 도둑년. 도둑년.
미친 것처럼 누리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슬기가 손을 휘저었다. 그렇지만 누리의 몸에 닿지 않는다. 슬기의 손톱이 애꿎은 허공을 향해 두어 번 맥아리 없이 퍼덕였다. 누리의 팔뚝을 세게 움켜쥐었다. 어느덧 슬기의 손톱이 누리의 팔에 자국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 힘도 천천히 흩어지고 있었다.
붉다.
숨 막혀. 숨 막혀. 숨 막혀, 제발.
붉다.
슬기의 팔이 힘없이 방바닥을 더듬었다.
도둑년. 도둑년. 도둑년.
누리의 중얼거림이 잦아들고 있었다. 누군가가 리모컨으로 TV음량을 줄이는 것처럼.
말 하지마.
슬기의 손이 무언가에 닿았다. 그걸 알아볼 새도 없이 슬기는 재빨리 그걸로 누리의 관자놀이 즈음을 후려쳤다. 비틀하던 누리의 몸이 넘어갔다. 목에서 누리의 조임쇠가 풀어지기가 무섭게 슬기가 다시 그 것으로 누리의 머리를 후려쳤다.
다시 한 번 누리의 머리가 흔들렸다.
슬기는 그제야 손에 들린 그 것을 바라보았다. 스티븐 킹. 미저리.
그리고 다시 슬기가 누리에게로 시선을 옮겼을 때.
누리는 부엌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부엌. 아침에 항상 북어국 냄새가 나던. 그 부엌으로 누리가 기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슬기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무기가 저기 있어.
무기.
누리가 재빨리 수납장에서 칼을 꺼내들었다. 누리는 아직도 일어서지 못한 채 제 눈앞으로 마구 칼을 휘둘러댔다. 누리의 입가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슬기는 숨을 골랐다. 그리고 방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소주병을 들었다. 소주병을 들며 슬기는 어떤 소리를 들었다. 슬기의 손이 병목을 움켜쥐는 그 순간이었다. 그러나 미처 그 소리를 들을 새도 없이
슬기의 오른팔이 큰 호를 그렸다.
그리고 소주병이 누리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순간. 피거품이 튀었다. 그리고 소리.
그 어떤 소리.
살을 으깨고 두개골이 바스라지는 그 소리.
다시 소주병이 호를 그렸다. 이 번에 누리의 머리를 내리치면서 소주병이 깨졌다.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비명은 함께 하모니를 이루며 찬장에 부딪치더니 꺾인 목을 흔들며 방바닥으로 곧장 내리꽂혔다. 어느새 슬기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은 혼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리는 조용했다. 어느새 누리는 칼을 쥔 손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칼은 여전히 슬기의 다리에 물려 있었다. 슬기도 손을 놓았다. 목만 남은 병이 바닥에 떨어졌다. 부엌바닥은 온통 피와 깨진 유리조각으로 가득했다. 그 붉은 호수 한 가운데에서 누리는 다리에 박힌 칼을 뽑아 던졌다. 물린 상처에서 피가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부엌에 흥건한 누리의 피에 섞여 들어갔다.
이겼다.
아직까지 다리에 아무런 고통이 없었다. 아드레날린이 아직도 슬기의 온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다만 목이 답답할 뿐이었다. 침을 삼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방 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미친듯이 펌프질을 해대고 있었다.
이겼다. 이겼어. 이겼어. 이겼어.
내가 이겼단 말야.
“도둑년은 너야.”
“도둑년은 너란 말야!”
슬기도 놀랄 만큼 큰 목소리였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뜨뜻미지근하게 이미 썩어버린 눈물. 슬기의 눈이 예의 그 눈물을 다시 짜내고 있었다. 왼쪽 눈이 따끔거렸다. 눈물을 닦아낸 슬기의 왼쪽 손등은 핏물로 벌겠다. 슬기는 다시 한 번 눈물을 닦아 냈다.
“도둑년은 너야, 이 미친년아.”
“왜, 왜 내가 아닌데? 왜 내가 아니고 넌데!”
“소설을 쓴 건 나잖아! 씨발, 넌 맨날 술만 처마시고 남자 끼고 놀러다녔잖아.”
“근데 왜 넌데, 근데, 근데 왜 넌데.”
이 도둑년아. 슬기는 주저앉았다. 유리조각이 청바지를 뚫고 슬기의 맨다리에 상처를 내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슬기는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영원할 것 같던 울음이 멎었다.
슬기는 이제 멍하니 룸메이트의 주검 앞에서 앉아있었다. 이제, 라는 표현보다는 어느새, 라는 표현이 더 알맞을지도 모르겠다. 꼭 누리가 처음 보는 얼굴 같았다. 누리의 얼굴은 너무 낯설었다. 얼굴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반죽처럼 짓이겨진 머리에 삐져나온 동맥에서 아직도 피가 솟고 있었다.
바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상의도 팔꿈치까지는 거의 피로 젖어있었다. 슬기는 천천히 일어섰다. 갑자기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슬기는 순간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엉덩이가 아팠다. 그리고 다리의 상처가 아팠다. 목이 아팠다. 어깨가 아팠다. 팔뚝이 저려왔다.
순간 슬기의 온 몸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슬기도 비명을 질렀다.
누리가 죽었다.
아니. 슬기 안 속의 누군가가 부정했다.
누리를 죽였다,
고 해야지.
누리를 죽였다. 누리를 죽였어. 세상에. 누리를. 어떻게. 누리를, 내가? 내가. 내가.
거실은 엉망이었다. 거실을 가로질러 슬기는 누리의 옷장에서 홑이불 하나를 끄집어냈다. 이불이 바닥에 질질 끌리며 거실 바닥에 어질러진 잡동사니들을 끌고 따라왔다. 누리에게 홑이불을 집어던졌다. 천천히 누리 위로 내려앉은 홑이불은 말없이 바닥에 번져가는 누리의 피를 빨아먹기 시작했다.
다시 슬기는 주저앉아 누리의 주검 아니, 누리의 주검을 덮은 홑이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팔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말라가는 피. 말라가는 피부. 어느덧 끈적하게 묻어나는 피.
피.
얼마의 시간이 들었을까. 얼핏 잠이 들었던 슬기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창 밖은 어느덧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물들고 있었다. 그리고 슬기는 자신의 팔에 말라붙어있는 누리의 피를 보았다. 갈라져 검게 말라붙어있는 누리의 피,
가 마치 양각 판화처럼 슬기의 팔위에 글자를 그리고 있었다. 어느새 슬기는 일어나 있었다.
그건 원래 내거야. 내거여야 했어. 그리고 지금,
내거가 됐어.
슬기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제 차가워진 누리의 주검에서 옷을 벗겼다. 부엌 바닥에 칼이 놓여있었다. 칼자루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그리고 슬기는 그 칼로 누리의 피부를 벗기기 시작했다. 벌겋게 벗겨진 누리의 피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리가 죽기 전에 어서 이 몸을 빠져나가려는 것처럼. 가라앉는 배에서 쥐 떼가 뛰쳐나오듯이. 불난 집에서 바퀴벌레들이 줄을 지어 날아가듯이.
글자들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
“싸움이지 뭐. 둘이 싸우는 소리였는데, 아주 그냥. 내 저 둘이 자취로 들어와서 처음 있는 일이라 처음에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물론 원래 그러면 안 되지만. 그래도 방세도 꼬박꼬박 내고 참한 처자들이었어. 근데. 근데 어쩌다 그렇게 됐대. 막 비명소리도 나고. 아침에 아무 소리도 안 나고 조용하니까 왠지 수상한거야. 그러다가 생각이 든 게 혹시 간밤에 강도라도 들지 않았나. 여자만 둘 사는 방에. 그것도 1층이니까 강도가 들기 쉽단 말야. 그래서 경찰에 신고를 했지.”
박원춘. 하숙집 주인. 58세.
#
하숙집 주인 박모씨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P씨와 Y씨가 동거하고 있는 방에 들어선 것은 오전 6시 반 경. 사건 현장을 본 경찰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방 안은 온통 피투성이였습니다.” 김원효 경장
방 안은 치열한 격투의 흔적으로 물들어있었습니다. 피해자 P씨는 현장에 있는 둔기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현재까지 경찰은 살해 원인에 대해 취조중입니다. 마포경찰서에서 KBS뉴스, 박인걸 기자였습니다.
#
“사실 가장 끔찍한 건, 물론 피해현장이었죠. 그런데 그것보다 더 끔찍한 건······.”
김원효 경장. 32세
#
슬기는 절규했다.
밖에서 말소리와 열쇠소리가 들린 것을 슬기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다만 슬기는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는 기분으로 누리의 주검을 보고 있었다. 수많은 글자들이 떠올라 있었다. 그 글자 하나하나가 살아 숨쉬는 영감이었다.
순식간에 소설 수십 개의 첫 문장이 머리를 가로지르는 기분.
당구공 수십 개가 자기들끼리, 또는 당구대 여기저기를 부딪치며 만드는 각도처럼 문장들이 서로 교차하고 부딪치고 있었다. 그렇지만 서로 짓이겨지는 문장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살아있다. 살아서 숨쉬고 있었다.
슬기는 환희에 차 있었다. 눈에 담기는 글자 하나하나를 사진으로 찍어두고 싶었다. 글자 하나가 곧 한 편의 소설이다. 이 글자들 중 단 한 글자라도 잊어버린다면 말 그대로 죽고 싶으리라.
다 내 꺼야. 다 내 꺼.
원래부터 내 꺼였고 지금도 내 꺼야.
그래서 경찰들이 슬기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거칠게 일으켜 세웠을 때 그녀는 절규했다. 경찰 둘이 슬기의 팔을 비틀었다. 슬기는 절규했다. 고통의 절규가 아니었다. 그때 슬기가 내뱉은 목소리는 인간의 목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썩은 성대.
썩은 성대에서 바람을 쥐어짜내는 소리 같았다. 살아있는 슬기가 아닌 죽은 누리의 주검이 그렇게 외쳤다면 차라리 경찰들은 믿었을 것이다. 이후 슬기는 다시 그런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 방에서 끌려나가면서 슬기는 줄곧 절규했다.
그리고 방에서 끌려나오자 슬기는 입을 다물었다.
줄곧.
#
“그런데 정말로 피해자 몸에는 글씨 같은 건 없었어요. 피의자 몸에도 피가 말라붙어있긴 했지만 글씨 같은 건 전혀 없었고요. 예. 아. 아. 그렇습니까? 네. 저도 피의자가 자살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몸에 문신을 했다는 건 지금 그 쪽에서 말해서 저도 처음 안 사실이네요. 어쨌건 피해자 몸에 글씨 같은 건 없었어요. 피의자를 주검에서 떨어뜨려 놓는데. 세상에, 전 그렇게 힘 센 여자는 처음 봤습니다. 경찰 둘이서 여자 하나를 겨우 떨어뜨려 놓았어요. 세상에. 그리고 그 목소리. 진짜. 사람 소리가 아니었어요. 썩은 성대에서 무슨 바람 새는 소리처럼. 차라리 피해자가 그런 소리를 냈다면 덜 끔찍했을 겁니다. 어떻게 살아있는 사람이 그런 목소리를······. 나중에 몇 번 목소리 들어보긴 했는데 그땐 전혀 또 그런 목소리가 아니더라고요. 정말 뭐에 씌기라도 했는지. 끌려나오면서 계속 소리 지르더라고요, 등짝을 봐야 된다고. 아직 등짝을 덜 봤다고······.”
김원효 경장. 32세
#
태비는 슬기가 문신을 한 부위, 팔, 허벅지, 종아리 따위가 바로 누리의 피에 묻은 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물론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정확한 건, 슬기의 그 문신에도 슬기의 몸에는 다른 글자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슬기는 영감 대부분을 놓치고 말았다. 아마 문신은 슬기의 머릿속에서 아직 건질 수 있는 글자들로 꾸린 마지막 발악이었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 글자들은 없었던 건지도 모르지만.
#
다음날 아침 문신을 한 팔뚝은 퉁퉁 부어올랐다. 누구의 충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술을 먹고 문신을 하지 말라는 말은 아마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온 충고였던 듯 하다. 게다가 시술사에게도 술을 먹이는 건 더욱 안 좋은 시도였다.
머리가 아팠다.
그날 아침. 가을공기가 창 밖에서 파랗게 불어오던 그날 아침. 차가운 태양빛이 한없이 집안을 쓸어내리던 그날 아침.
나는 내 팔에 새겨진 검은 글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내 안에서도 무언가가 일어나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내 피가 움직여 제멋대로 글자들을 만들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글씨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머리가 점점 맑아졌다. 숙취가 깨는 것처럼. 머리 안의 이물질들이 가라앉고 그 이물질들이 모공을 통해 어디론가 증발되는 것 같았다. 또는 무언가 막혀있던 곳이 뚫리면서 취기와 함께 흐린 물이 흘러 내려가 버린 것처럼.
머리가 맑았다. 차갑고 깨질 것처럼 머리가 아려왔다. 텁텁한 입 안으로 찬 물을 들이키는 순간에도. 내 머릿속에는 아무런 고기도 없었다. 그저 물 흐르는 소리가 멍멍하게 머리를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날 이후 난 단 한 편의 소설도 쓰지 못했다. 어쩌면 팔뚝에 문신을 새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날 밤 일을 후회한 적은 아직 단 한 번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