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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엽서시

긴 밤

잠이 달아나고 만 날의 밤

by 엽서시

잠이 달아나고 만 날의 밤은

길다 하염없게 길기만 하다

긴 밤은 내 옆자리에 누워서는

잠이 달아나고만 이유에 대해

나와 함께 고민을 한다

그러나 그 고민은 풀리지 않는다

자신 없는 시험의 맨 마지막 문제처럼

아무리 시간을 주어도 풀리지 않는 문제 같다


누가 욕을 한 것도 아니다

고함을 친 것도 때려서 쫓아낸 것도 아니다

어째서 잠이 달아난 것인지

우리는 이내 말이 없어지고

말이 없던 밤은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네 얘기를 한다

나는 말없이 밤이 지껄이는 것을 그냥 듣는다


너를 처음 본 날의 날씨,

네가 나를 마주 보며 뒷걸음치던 그 거리,

너와 벽에 기대 앉아 깔깔 웃던 TV프로 같은 것,

따위를 나는 잠자코 듣는다

한참 지나고 나서야

밤은 내가 말이 없어진 것을 안다

밤은 내 어깨를 가만 두드린다


눈을 감는다

잠이 달아나고만 이유는 알 수 없다

감은 눈꺼풀 안으로

달아난 잠의 발자국 같은 것이 가만가만 돋아난다

따라가 잡을 수 있을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저 발자욱이 향하는 방향에

네 집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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