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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엽서시

오이지

그래도, 그래, 오이지!

by 엽서시

스물다섯부터 근(近) 10년을,

눈칫밥으로 먹고 살았더니,

남은 것은

단추 하나가 떨어진(오늘 오후 실밥을 당겼더니, 아뿔싸.) 양복,

하도 낡아 닦아도 광이 나질 않는 구두 한 켤레,

그리고 저 전철 창에 비치는

짜겁게 절여진 내가 전부다.


이렇게 10년, 20년, 30년을 살면은,

행복할까,

창에 비치는 내가 묻는다. 흔들리면서 묻는다.

신 웃음만 나온다.

다섯 시 오십오 분에 집을 나서 밤 열 시 집에 이르기까지

‘내 멋대로 고른 것’이란 하나도 없이,

남이 주무르는 대로만 살았더니,

그렇지, 나는 오이지를 닮었다,

오늘 점심 구내 급식, 눈칫밥 위에 올려진 오이지를 닮었다.


세상은 짜겁고, 나는 시기만 한 웃음이 전부다,

누르고 주무르는 대로 물기란 물기는 다 빠지고 말아서,

나도 이제는 짜겁고 또 시기만 하다.


그래도, 그래, 오이지,

오늘 네게서 배운다, 네가 내게 그랬듯,

이 세상이라는 놈이, 언젠가, 누름돌 같은 어금니로 나를 씹어댈 때에는,

그때는 나도,

빠드득!

시원하게 부러져라 외쳐볼 것이다.


오이지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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