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를 뿌리기 전
빈 밭을 보며 생각한다
검은 흙에 진 그늘과
희미하게 코를 찌르는 거름의 냄새
밭은 이미 차 있으나
또한 텅 비어 있다
마치 흰 달력과 같이,
흰 달력의 공간에 계획을 적어 넣듯
저 검은 흙의 위에, 그리고 또 밑으로
푸성귀의 잎과 뿌리가 무성하고 또 그득한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 어떤 계획도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듯이-
저 밭에도
생각지 못한 돌부리와 허방다리가 있을 것이다-
가뭄과 폭염이, 응애와 진디와 멸구와 온갖 것의 유충들이,
잎마름이, 장마가, 때로는 고라니, 멧돼지 같은 발굽 달린 것들이,
농촌계에서, 농협 직원이,
또는 저 먼 땅의 소동에서 비롯하여 오르기 시작하는 기름값 따위……
이미 내 계획 이전, 한참 이전에
신이 짜놓은 계획이
저 빈 밭에 가득 차 있다,
그래도 어쩌랴,
나는 내 일을 할밖에,
빈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는데,
어디서 까치 한 마리 짖는다,
빈 밭 위에 그 울음소리 얹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