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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엽서시

빈 밭을 보며

by 엽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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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를 뿌리기 전

빈 밭을 보며 생각한다


검은 흙에 진 그늘과

희미하게 코를 찌르는 거름의 냄새


밭은 이미 차 있으나

또한 텅 비어 있다


마치 흰 달력과 같이,

흰 달력의 공간에 계획을 적어 넣듯

저 검은 흙의 위에, 그리고 또 밑으로

푸성귀의 잎과 뿌리가 무성하고 또 그득한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 어떤 계획도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듯이-

저 밭에도

생각지 못한 돌부리와 허방다리가 있을 것이다-

가뭄과 폭염이, 응애와 진디와 멸구와 온갖 것의 유충들이,

잎마름이, 장마가, 때로는 고라니, 멧돼지 같은 발굽 달린 것들이,

농촌계에서, 농협 직원이,

또는 저 먼 땅의 소동에서 비롯하여 오르기 시작하는 기름값 따위……


이미 내 계획 이전, 한참 이전에

신이 짜놓은 계획이

저 빈 밭에 가득 차 있다,


그래도 어쩌랴,

나는 내 일을 할밖에,


빈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는데,

어디서 까치 한 마리 짖는다,

빈 밭 위에 그 울음소리 얹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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