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들을 위한 이야기(11)

by 엽서시

이야기가 끝나자 공주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공주가 말하였다.

“이제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해 알았다. 그대는 내게 있어 아무 것도 아닌 노래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내가 그대에게 곧 아무 것도 아닌 것의 피라미드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제 내가 듣고 싶은 것은 그대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그대는 어떻게 폴로를 이 곳에 인도할 수 있었는가? 그대는 전에 이 칸발릭의 궁에 온 적이 있었던가? 그대는 어째서 나를 사모하는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희미한 어느 시간 중에 나를 이미 본 적이 있었던가?”

공주는 이미 그가 북아프리카 출신의 투항한 포로였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공주의 아름다운 얼굴을 본 후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어갔다.

“저는 위대하신 알라의 뜻을 받들어 싸우는 전사였습니다. 누구는 시장에서 저울로 사람들과 싸우고 누구는 법정에서 혀와 머리로 사람들과 싸웁니다. 누구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때리는 막대기와 경전으로 사람들과 싸우고 누구는 성전에서 엄숙한 진실과 숨길 수 없는 진리로 사람들과 싸웁니다. 그렇지만 알라께서는 제가 말 위에서 창과 칼로 적과 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저는 위대하신 알라의 뜻 그대로, 제 말 위에서 저의 창으로 알라의 뜻을 거부하는 모든 것과 싸웠습니다. 낮에는 역겹고 오만한 냄새를 풍기는 이교도들의 칼을 막아내며 그들에게 제 창을 휘둘러댔습니다. 낮의 전장이 끝나고 밤이 오면 저는 꿈속에서 알라의 뜻을 비웃는 용과 마신들, 북쪽의 요정들과 남쪽의 정령들과 싸웠습니다. 그래서 저의 싸움은 끝이 없었지만 저 역시 알라께 싸움의 끝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는 제 싸움이 하나로 이어진 끝없는 전장이 되어 알라께 영원한 영광을 바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IMG_20150929_213511.jpg "저는 하나의 전장에서 알라의 모든 적들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저의 원대로 낮과 밤이 뒤섞이는 순간이 왔고, 이제 저는 하나의 전장에서 알라의 모든 적들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온갖 이교도들과 괴물, 마신들이 지평선을 메우며 몰려왔습니다. 그들의 입은 더러운 말과 욕설과 저주로 가득했습니다. 철로 몸을 두른 불사의 이교도, 눈이 다섯 개인 탐욕스러운 거인, 썩은 팔을 휘두르는 북쪽 무덤의 귀신, 누런 이빨로 어린 아이의 시체를 파먹는 흰 머리의 마녀, 바다에 가라앉은 베네치아 선장의 망령, 사막에서 길을 잃은 상인들의 시체를 조종하는 정령들이 온갖 이교도의 상징을 든 채 제게 몰려왔습니다. 저는 그들을 찌르고 베었습니다. 그들의 목과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하늘을 검게 물들일 지경이었습니다. 하늘에 뜬 태양도 제 싸움에서 눈을 돌렸고, 별과 달도 제게 용기를 주는 것을 두려워할 지경이었습니다.

아무런 빛이 없는 싸움이 꼬박 아흐레를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저의 말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저의 하나 남은 창마저 부러뜨렸습니다. 저는 이미 구부러지고 낡은 칼을 빼내어들었지만 워낙 닳아버린 그 칼로는 건초조차 썰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들은 알라를 모욕하고 저의 명예를 더럽히려는 수작으로 온갖 음탕하고 저속한 노래를 부르며 다가왔습니다.

상상해보십시오. 저는 제게 닥칠 고통의 두려움보다, 아직까지도 알라의 적들이 이처럼 수없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떨었습니다. 제 아흐레에 걸친 싸움이 고작 장난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저를 거의 좌절시킬 뻔 했습니다. 그렇지만 알라의 뜻을 따르는 이들이 언제나 그렇듯이 저의 믿음이 저를 구했습니다. 저는 고함을 지르며 일어났습니다. 그 순간 저는 알라의 적들이 괴물의 형상 속에 감추고 있는 본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만, 편견, 부조리, 가난, 고통, 혼란, 무절제, 탐욕, 질투, 간음, 파멸, 모욕, 절망, 저주, 시련 등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저는 낡은 칼을 겨누며 곧장 그것들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제가 달려든 것은 이른바 사람들이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던 겁니다.

제가 세상과 부딪쳐 나가떨어지는 순간, 알라께서 저를 구하셨습니다. 새벽과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이 섞여 있던 하늘에서 무지개가 제 앞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무지개의 등을 타고 밤색 털에 윤기가 흐르는 거대한 말이 위풍당당하게 갈기를 흔들며 나타났습니다. 말에게는 튼튼한 검은 날개가 달려 있었기 때문에 저는 그 말을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그분께서는 세상이 괴성을 지르며 달아나는 것을 보시고 제게 그 중 하나를 추격하여 거꾸러뜨릴 것을 명하셨습니다. 저는 달아나고 있는 적들 중 가장 멀리 달아나고 있는 운명이라는 놈을 쫓아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운명이라는 놈을 쫓아 셀 수 없는 낮과 셀 수 없는 밤을 하늘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놈을 잡아 목을 따고 가죽을 벗겼습니다. 그로 인해 이 세상의 사람들은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을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순간 운명이라는 놈은 불사의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운명은 다시 저를 비웃으며 달아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운명이 이 세상의 운명이 아니라 고작 제 운명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알라께서는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위해 싸우기보다는 제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좇아 싸우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저는 다시 칼을 꼬나들고 제 운명을 찾아 세상을 떠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저는 알라의 전사였던 옛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대신 이 세상의 온갖 진귀한 것들을 얻게 되었고 값진 이야기들을 듣고 보았습니다. 또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되었고 모든 말과 단어를 잊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떠돌아다닌 곳은 바로 사막이었습니다. 길도 시간도 없는 그곳은 저와 어울리는 곳이었습니다. 돌처럼 굳어진 저는 사막에서 인간이 견디지 못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초원 위를 걸어가는 폴로의 일행을 보았습니다.

폴로가 제게 말하길 그는 새로운 이 땅의 지배자인 쿠빌라이 카간의 궁전이 있는 카라코룸으로 향하는 도중 길을 잃었다고 말했습니다. 순간 저는 폴로의 말에 담긴 제 운명의 발자국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폴로에게 자청하여 이 곳까지 그를 안내했습니다. 저를 제 운명에게 안내하는 대가로 말입니다.

공주님. 공주님께서는 들을 수 있는 모든 진리를 들으셨고 볼 수 있는 모든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 덕에 알라께서는 공주님을 세상이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얼굴로 빚어놓으셨고, 하늘의 목소리와 대지의 향기를 선물하셨습니다. 공주님께는 출렁거리는 머릿결이 있고 산들거리는 발걸음이 있습니다.

저는 제 긴 여행에서 공주님을 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아는 것은 그것을 이전에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번도 보지 못한 자석이 서로 달라붙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공주님을 보는 순간 당신이 제 운명임을 알았습니다.

저는 공주님께 제가 이 세상에서 찾아낸 가장 진귀한 것들을 바쳤습니다. 이제 저는 미천한 손을 내밀어 공주님의 운명과 함께하고자 합니다. 만일 공주님께서 거부하신다면 저는 다시 저의 말을 타고 운명을 찾아 떠날 것입니다. 그렇지만 공주님께서 이 더러운 손을 잡아주신다면 저와 공주님은 저의 말을 타고 이 세상을 찾아낼 것입니다.

저는 공주님의 한 마디를 듣기 위해 이 세상을 뒤진 것과 다름없으며,

공주님께서는 제게 한 마디를 해 주시기 위해 칸발릭의 궁전에서 저를 기다리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제 공주님의 한 마디가 이 모든 이야기를 맺는 온전한 마침표가 될 것입니다.”

공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공주가 말하였다.

“너는 내게 눈이 멀어버린 소년이구나.”

“그렇습니다. 공주님.”

그리고 공주가 말하였다.

“너는 나를 만나기 위해, 짐을 지고 기어온 달팽이구나.”

“그렇습니다. 아름다우신 공주님.”

그리고 공주가 말하였다.

“너는 내게 뜰 안의 제비꽃을 주기 위해 이 세상을 떠돌아다녔구나.”

“그렇습니다. 아름다우시며 지혜로우신 공주님.”

그리고 공주가 말하였다.

“너는 나를 위해 거짓말을 하고 덫에 걸린 오리구나.”

“그렇습니다. 아름다우시며 지혜로우시고 향기로운 공주님.”

그리고 공주가 말하였다.

“너는 나를 위해서라면 나를 떠날 수 있는 거북이구나.”

“그렇습니다. 아름다우시며 지혜로우시고 향기로우며 완전하신 공주님.”

그리고 공주가 말하였다.

“너는 나를 위해 그늘을 드리우고자 뻗은 넝쿨이구나.”

“그렇습니다. 아름다우시며 지혜로우시며 완전하신 나의 공주님.”

그리고 공주가 말하였다.

“너는 아무것도 아닌 노래요, 나는 아무것도 아닌 피라미드구나.”

“그렇습니다. 나의 공주님.”

그리고 공주가 말하였다.

“나는 너를 위해 움직이지 않는 초원이고 너를 뒤덮는 바다이고 너를 기다리는 공주이며 참나무에 사는 다람쥐고 네가 보고자 한 아름다움이며 네가 떠나가는 것을 지켜본 고양이고 너의 텅 빈 피라미드이다. 나의 운명은 너의 운명이다.”

“공주님.”

IMG_20150929_213732.jpg "무지개가 사라지고 밤색 말은 그와 공주를 태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는 일어나 공주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공주의 손을 이끌어 궁전의 발코니로 향했다. 갑자기 하늘에서 거대한 무지개가 꿈틀거리며 나타나 카간의 궁전 뜰에 떨어졌다. 모두가 놀라고 있는 때에 그 무지개의 등을 타고 검은 날개가 달린 거대한 밤색 말이 나타났다. 그가 공주를 데리고 그 말을 타는 것을 본 카간은 병사들에게 활을 쏘아 맞출 것을 명령하였다. 그렇지만 감히 어떤 화살도 무지개의 거대한 몸을 꿰뚫지 못했다. 마침내 무지개가 사라지고 밤색 말은 그와 공주를 태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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