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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Dec 23. 2019

일상적인 대화가 괴로워졌다.

그래도 날 위로해 주는 손길이 있어 행복하다.

일상적인 대화가 괴로워졌다.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 언젠가부터 괴로워졌다. 특히 아이를 키우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기 힘들다. 그들이 하는 아이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친척들을 만나는 경우에도 이런 내 감정은 계속된다. 아니 더 심하다. 장애아를 키우는 내 상황을 알고 있기에 날 더 배려해 줬으면 한다. 항상 내 상황을 이해해 줬으면 한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한다. 친구들에 비해 바라는 것이 훨씬 크기에 실망도 크다.


도대체 그들이 무슨 말을 하기에 난 이렇게 상처를 받을까? 도대체 그들이 얼마나 날 이해해 주지 않기에 난 이렇게 속상하고 짜증이 날까?


그저 일상적인 대화들이다. 그들은 아이를 키우며 자신들이 느끼는 고민, 자랑, 감정을 쏟아 낸다. 아이가 몇 이냐? 둘째가 몇 살이냐? 7살이면 다 키운 거 아니냐. 부럽다.  아기 용품은 이 제품이 좋다. 우리 아이는 소심해서 너무 걱정이다. 우리 아이는 너무 적극적이라 걱정이다. 감기에 걸려 걱정이다. 요새 말이 너무 늘어서 귀여워 죽겠다. 퇴근해서 집에 들어가자마자 하는 첫마디가 "아빠! 선물!"이다. 너무 귀엽다. 


아이가 7살인데 아직 말을 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놀이터에서 다른 아이를 밀거나 머리채를 끄집어 당기면 어떡할지를 고민하는 우리에게, 아프지만 말라는 새해 다짐을 5년째 하고 있는 우리에게 이런 일상적인 대화들은 가슴을 긁는다. 그런 이야기들을 거리낌 없이 내뱉는 사람들이 미워지기도 한다.


알고 있다. '나'만 빠지면 이 이야기들은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아니. 문제는커녕 너무나 좋은 대화 주제라는 것을. 나와 그저 대화하고 싶어 꺼낸 주제라는 것을. 그 어떠한 의도도 없다는 것을.


아는데, 다 알고 있는데 속상하다. 짜증 난다. 화도 난다. 대화가 재미없고 지루하다.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 억지로 웃고 맞장구치기 힘들 때가 있다. 거짓 가면을 쓰고 속으로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 아니. 진짜 가면이 있다면 사고 싶다. 항상 웃고 있는 가면이 있다면, 들키지 않을 가면이 있다면 사고 싶다.


마셜 B. 로젠버그는 그의 책 <비폭력대화>에서 분노를 일으키는 것은 상대의 호의나 다른 의도 없는 말들을 받아들이는 내 해석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말한다.

어떤 사람이 약속 시간에 늦었을 때 그 사람이 우리와 한 약속을 중요하게 여겨 주기를 바랐다면 우리는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섭섭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시간을 유용하게 보내는 것이 당시의 욕구였다면 우리는 아마 짜증이 났을 것이다. 그 반면에 30분 정도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면, 그 사람이 늦은 것에 대해 오히려 고마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느낌의 원인은 다른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그 순간의 우리 욕구이다.
......
분노를 일으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바로 내 머릿속에 있는 상대에 대한 생각과 그의 행동에 대한 나의 해석임을 깨달았다.

마셜 B. 로젠버그, 비폭력대화(NVC Nonviolent Communication)


그래. 내 탓이다. 내 감정이다. 내 상황이 달랐다면 난 기분 나쁘지 않았을 거다. 오히려 대화를 이어나가고 상대방에게서 호의를 느꼈을 거다. 그러니 지금 내가 느끼는 불편함은 모두 나로 인해 생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지만 기분은 나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우울감의 끝을 보게 된다. 감정의 심연에 닿는다. 발버둥 쳐본다. 머리 위로 아득히 조그맣게 보이는 빛을 향해 헤엄쳐 올라가고 싶다. 이런 내 욕망과 다르게 내 몸은 가라앉는다. 힘들어 발버둥을 멈추면 정말 바닥까지 가라앉을까 싶어 두렵다. 계속 발버둥 친다.



위로의 손길


집으로 오는 차 안. 룸미러를 보니 찐이잠들어 있었다. 고요하고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 옆에는 창 밖을 바라보는 아내의 옆모습이 보였다. 높은 콧대가 아름다웠다. 첫째의 손을 꼭 잡았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상황이 안했다. 행복했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첫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있어 정말 행복해. 이렇게 손을 잡고 있으니 정말 포근하다. 좋아.


이렇게 말한 나에게 아이는 장난기 어린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네네. 알겠고요. 또 이상한 소리 하시네요~!


약간 섭섭함이 내 얼굴에 묻어났다. 아이는 금세 눈치채고는 "뻥이야. 아빠. 나도 좋아."라고 말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1시간 동안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조금 힘을 주어 손을 빼내려 해도 내 손을 놓지 않다. 내 손을 다시 끌어와 자신의 손에 포개어 놓. 내 감정을 아이는 알았던 걸까?


이 매거진을 시작하면서, 내가 찐이와 가족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자랑할 거리도 아닌 일을 왜 쓰는 걸까? 나 혼자만 보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글을 쓰려는 이유가 뭘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빅터 프랭클은 그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고통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담배 한 개비를 수프 한 그릇과 바꾸어 먹을까?', '조금 더 쉬운 작업반에 낄 수 있을까?', '신발 끈을 대신할 수 있는 철사를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등과 같은 단편적이고 하찮은 질문에는 없다고 말한다.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라는 스피노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생각을 다른 주제로 돌리기로 했다....(중략)... 나는 강제수용소에서의 심리상태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를 짓누르던 모든 것들이 객관적으로 변하고, 일정한 거리를 둔 과학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보고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방법을 통해 나는 어느 정도 내가 처한 상황과 순간의 고통을 이기는 데 성공했고, 그것을 마치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처럼 관찰할 수 있었다.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글을 쓰면서 내 상황과 고통스러운 감정을 마치 제3자의 시선에서 바라본다. 왜 이리 힘들지? 오늘은 퇴근을 일찍 할 수 있을까? 찐이가 말을 잘할 수 있을까? 오늘은 아내와 싸우지 않을 수 있을까? 같은 단편적이고 하찮은 질문을 멈춘다. '마치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처럼 관찰'한다.


첫째가 잡아주는 손, 내 옆에 있는 아내, 찐이의 얼굴이 나에게 위안을 준다. 고통스러운 감정을 글로 쓴다. 그러면 조금 떨어져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설명할 수 있다. 내 고통스러운 감정을 줄여주는 위로의 손길들이다.



Photo by Ian Espinos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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