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무엇을 가장 잘하는가? 난 무엇을 가장 원하는가? 난 무엇을 좋아하는가? 난 무엇을 싫어하는가?
이 간단한 질문에 답하기란 쉽지 않다. 난 아직 나를 모른다. 이 사실을 40이 다 되어서야 깨닫는다. 진지하게 이 질문에 대해 고민해 보고 대답해 가는 과정이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내 인생이 좋았는지 싫었는지는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알 수 있겠지. 그렇기에 과거를 돌아보며, 미래를 바라보며, 내 인생이 어땠는지, 내 인생이 어떠할지 고민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단지 매 순간 내 태도를 결정할 뿐이다. 내 삶을, 내 인생을, 지금 마주친 사건을, 지금 내 감정을, 지금 이 순간을 대하는 내 태도를 결정할 뿐이다. 그리고 그 태도가 내 행복을 결정한다.
아내의 카톡
어제 회사에서 아내의 카톡을 받았다. 쉬고 싶다. 그녀는 나에게 쉬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가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을 난 해줄 수 없다. 가슴이 아프다. 심장이 시큰하고 명치끝이 거북해진다. 피는 혈관을 타고 머리로 몰린다. 난 눈을 감고 손바닥을 얼굴에 대고 문지른다. 무력감을 느낀다.
무력감은 이내 한탄으로 바뀐다. 상황을 탓하고 믿지도 않는 신을 탓한다. '왜'냐고 묻는다.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오는 건지. 도대체 왜 내 앞에 있는, 웃고 있는 동료처럼 난 편안할 수 없는 건지. 전생에 죄를 지은 건지. 유전자에 내 시련이 새겨 있는 건지. 단지 통계적으로 튀는 한 부분이 내 인생인 건지. 우주에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불행이 그저 내 차례에 온 건지.
첫째의 태권도 학원 줄넘기 교실
첫째가 방학을 맞이했다. 태권도장에서 초등학생 줄넘기 교실을 열었다.
난 32년 전 파란 띠인지 빨간 띠인지 기억나지 않는 띠를 매고 가기 싫은 태권도 장을 다녔었다. 얼마나 가기 싫었는지 태권도장 가는 길에 10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난 유연하지 않아 다리가 잘 벌어지지 않았다. 힘이 세지도 않았다. 남에게 맞지도 때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태권도 학원에 가야 했다. 그래야 남자다워질 테니.
첫째는 나처럼 태권도를 배우기 싫어했다. 태권도 학원에 가서 아이들과 신나게 뛰어놀았으면 했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이고 활동적인 아이가 되길 원했다. 매일매일 운동을 하는 아이가 되길 원했다. 몸이 약한 아이가 되지 않길 원했다. 난 그러지 않았으면서 말이다.
첫째는 태권도 학원 줄넘기 교실이 시작하기 전 날, 다음 날을 걱정하고 두려워했다. 선생님이 자신을 처음 온 아이 취급을 하며 아이들이 자신에게 집중할까 두려워했다. 다른 아이들은 선생님과 친하고 편하게 지내는데 자신은 그러지 못할까 걱정했다. 태권도 학원을 가며 10번도 넘게 뒤를 돌아보았던 나처럼 말이다.
난 첫째에게 이렇게 말했다. 두려운 마음이 생기는 것을 이해한다고. 당연히 걱정이 될 거라고. 정말 그렇겠다고. 하지만 그런 마음을 가져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고. 지금 걱정을 한다고 해도 선생님이 너와 친해지지는 않는다고. 두려움이 너를 태권도장에 다녔던 아이로 만들어주지 않는다고.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고. 내일 태권도 학원에 갔다 오면 넌 선생님과 조금 더 친해질 거고, 태권도 학원에 다녔던 아이가 되는 거라고. 그러니 지금 걱정되고 두려운 건 잘못된 것도 아니고 당연한 거지만 그러지 않을 수 있다면 그러지 않는 것이 편안할 거라고.
삶을 대하는 태도
빅터 프랭클은 그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고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방법은 '책임을 지는 것' 뿐이라고 했다. 어떠한 시련이 나에게 다가온다고 하더라고 이를 대하는 태도는 그 누구도 아닌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스스로 태도를 결정하고 그 결정을 책임진다. 이 책임으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삶의 의미는 어떠한 시련도 견딜 수 있는 힘을 준다.
난 아이에게 그 태도에 대해 말했다. 해본 적 없는 일을 하기 전 찾아오는 두려움이나 걱정을 대하는 태도. 해보기 전의 두려움이나 걱정은 당연하다. 그 감정은 너를 불안하게 한다고. 그것을 제외하고 걱정이나 두려움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그러니 굳이 두려울 필요 없다는 태도에 대해 말했다. 나도 취하지 못하는 그 태도를 아이에게 조언이랍시고 했다.
아내의 카톡을 받고 내가 느꼈어야 할 감정은 무력감이 아니었다. 무력감에 이은 짜증과 화는 더더욱 아니었다. 무력감에 이은 '짜증과 화'. 그리고 이를 따라 이어진 '한탄'도 아니었다. 그 당시 난 태권도장에 가기 싫은 6살 아이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를 알아챘으니 그래도 조금은 성장한 건가?스스로 위로하며 그저 아내의 마음을 느낀다. 정혜신이 말한 것처럼 마음은 언제나 옳으니. 그녀의 소모되는 감정, 외로움, 힘듦, 아픔,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노력을 생각해보고 느껴본다. 일단 여기까지 해본다. 여기까지만이라도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