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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Jan 20. 2020

사람을 온전히 담을 만큼 큰 직업은 없다.

김혜진, <9번의 일>, 한겨레출판, 2019.10.10

요사이 소설을 많이 읽는다. 착해지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한 없이 착해지고 한 없이 깨어 있음을 느낀다. 누군가의 삶에 몰입하고 공감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소설을 읽는 것이다. 그와 함께 숨을 쉬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마음속 진심 어린 생각을 읽는다.


김혜진 작가의 <9번의 일> 읽는 내내 '소설을 읽는 이유'를 곱씹게 했다. 작인 <딸에 대하여>를 몰입해서 읽었다. 그 후 나올 신간을 주목하고 있었다. 어떤 주제로,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낼지 기대했다.


전작인 <딸에 대하여>는 사회적 약자인 성소수자를 딸로 둔 엄마의 눈으로 시간 강사라는 비정규직 노동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번 작품은 탄탄한 공기업에 다니던 주인공의 눈으로 회사와 노동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주인공인 그는 통신 공기업에 다녔다. 통신장비를 설치하고 유지 보수하는 일을 했다. 그의 직장은 안정적이었다.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회사에 기여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회사는 그의 이러한 '자부심'이나 '회사에 기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퇴직을 권유했으며 거부한 그는 시골의 영업부서로 배치되었다.


회사는 실체가 없다. 회사를 뜻하는 '법인'이라는 말은 법적인 인간이라는 뜻이다. 법적인 지위를 갖지만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무언가를 지시하지만 내 눈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런 회사가 상사의 입을 통해 나에게 지시를 한다. 그 상사는 상사의 지시를 받았고 그 상사도 상사의 지시를 받았다. 부당하다고 항의하면 위에서 시킨 일이라며 자신도 어쩔 수 없다고 한다. 회사가 하라고 했다는 그 말은 권위를 갖는다. 도전할 수 없는 지엄한 명령으로 들린다. 상사의 상사의 상사는 그를 지방의 영업부서로 배치했다.


말이 영업부서지 사람을 쫓아내기 위한 괴롭힘이나 다름없는 일이 이어진다. 사람이 없는 곳으로 영업 구역을 지정한다. 민원을 구실로 판촉활동을 금지한다. 회사의 이미지를 높이고 매출 향상을 불러일으킬 법한 서비스도 금지한다.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따로 있기 때문다.


황여사는 상담부서에서 일했다. 상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통신시설을 유지 보수하는 곳에서 일하고 있다. 실가 무엇인지 궁금한 지방의 영업소에서 버틴 그는 황여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녀에게 짜증이 나면서도 자신의 몫을 하려고 하는 그녀에게 연민을 느낀다. 여자가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처음 하는 일을 배우고 잘하려고 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회사를 향한 오기가 느껴진다. 기에 가득 찬 녀는 높은 곳의 통신장비를 보수하려 그곳에 올랐다. 그는 그녀를 만류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 그녀는 오르던 중 무서워 주저앉았다. 그리고 울부짖었다. 나도 다른 일은 잘한다며, 미안하다며, 더 오를 수 없겠다며. 회사라는 거대 권력에 결국은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가련한 노동자의 모습이 보인다.


이 소설에서-현실도 마찬가지인듯하지만-사건을 일으키는 원인은 회사에 있다. 그러나 눈 앞에서 그를 괴롭히는 건 회사라기 보단 같은 노동자다.


왜 이리 버텨서 더 젊은 사람이 퇴사할 수밖에 없이 만드세요? 자기 일만 하지 왜 남의 일까지 넘보고 그러세요? 왜 하지도 못하는 일을 잘하려 해서 자신을 괴롭힙니까? 왜 퇴사 권유를 자꾸 받아들이지 않고 버티세요? 저도 죽겠습니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아니잖아요?

.

그가 버티면 다른 사람이 잘리는 상황을 만든 건 회사다. 자신이 하는 일을 침범하지 못하게 싸워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상황도 회사가 만들었다. 내가 지금껏 해온 일과는 상관없이 지금 내 가치를 증명해야만 회사의 부속품으로 존재가치를 증명하게 만든 것도 회사라는 괴물이다. 내가 당연히 가져야 할 인간적인 권리를 없애버린 건 회사다. 한 꺼풀만 벗겨내면 결국 회사의 잘못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지금 당장 나를 불편하게 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건 회사의 말을 듣지 않는 내 옆의 그와 그녀다


회사는 그를 통신탑을 설치하는 곳으로 보냈다. 통신탑 설치는 본사에서 하지 않는다. 설치를 전담하는 기업이 있으며 이 기업에 하청을 준다. 본사는 이 하청기업에 절대 지시를 하지 않지만 하청기업의 직원은 본사의 지시를 따른다. 그는 이 기업에서 자신에게 할당된 통신탑을 모두 세우면 다시 본사 정규직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약속과 함께 떠난다.


이 통신탑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전자파는 사람을 파괴하나 보다. 사람이라곤 노인들밖에 없는 시골마을에 통신탑이 세워진다. 마을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막는다. 작업장으로 가는 길은 마을 사람들이 항상 막고 있다. 경찰이 동원된다. 경찰이 길을 조금 터주면 그는 동료들과 작업장으로 내달린다. 작업을 진행하기 전 마을 사람들이 세워놓았던 움막을 치워야 한다. 중장비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중장비에 몸을 매달아 놓은 마을 사람들을 쫒아 내야 한다. 밤까지 기다려 지치길 기다린다. 마을 사람들이 지친 틈을 타 전자파를 품은 통신탑은 올라간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욕한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거냐. 최소한 당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는 알고 있지 않느냐. 아무리 회사가 시켰다고 마을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짓을 하고 싶은 거냐.


친구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들도 나중에 알게 될 거라고. 네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그땐 뭐라고 말할 거냐고.


그 자신도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난 그저 회사가 시킨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나에게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말고 회사에게 말해라.


그에겐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회사와 함께 자라온 자신의 지난날이, 자신의 추억이 모두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 아닐까. 가장 믿었던 존재에게서 배신당한 순간 치솟는 분노 오기처럼 버텨온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렇게 자신을 가로막는 마을 사람들과 대치한 건 아닐까. 감정은 담지 않더라도 회사가 시켰기 때문에. 난 이 회사가 시키는 일은 무조건 해야만 하는 노동자이기 때문에.


짜증과 분노가 조금 더 크게 담긴 어느 날. 그는 트럭을 운전한다. 잠시 위협을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그 트럭에는 사람이 매달려 있었다. 사람이 다쳤다. 다친 사람은 결국 죽었다. 그리고 아들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아빠. 나 합격했어. 이 소리가 그를 깨운다. 그는 지금 하고 있는 이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던 거라 생각한다.


이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 일을 지속하기 위해 바라지고 않고 원하지도 않는 일을 계속하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바뀌어버리는지 깨닫게 될 거였다. (......) 혼자 힘으로는 결코 부서뜨리거나 망가뜨릴 수 없는 철과 쇠로 무장한 거대한 구조물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몸을 숨기듯 언급했던 회사라는 것의 실체가 마침내 눈앞에 드러난 것 같았다. 그래 너로구나. 너였구나. p252


그는 너트를 풀어 통신탑을 무너뜨린다.


회사는 감정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회사가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나를 이해해 줄 거라, 내 처지를 생각해 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회사는 감정이 없다. 이를 잊어서는 안 된다.


회사는 옆 사람과 날 싸우게 하는 데 능숙하다. 회사가 잘못했음에도 나를 옆사람과 싸우게 만든다. 통신탑에서 뿜어 나오는 전파를 과연 누가 만들어 낸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진다. 그 통신탑을 세우기 위해 도구를 들고 달려오는 자와 이를 막기 위해 그를 막아서는 자. 이 두 사람을 싸우게 만든다. 달려오는 자들에게 죄책감을 지우고 그들이 서로 반목하게 만든다.


회사에 감정을 가질 필요는 없듯하다. 회사가 우리에게 그리하는 것처럼. 단, 기억해야 한다. 김혜진이 책의 맨 앞장에 말한 것처럼.


사람을 온전히 담을 만큼 큰 직업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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