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피아노 학원에서 주최하는 연주회가 있었다. 부모님을 모셔놓고 나 이만큼 열심히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리 무겁지 않은 자리였다. 순위를 매기지도, 어려운 곡을 선정해서 매일매일 연습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난 아이가 이 대회에 당연히 나갈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딸아이는 나가지 않았다.
아이는 무섭다고 했다. 사람들 앞에 서기 무섭다. 틀릴까 봐 무섭다. 못할까 봐 무섭다. 이를 본 사람들이 비웃을까 무섭단다.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의 연주회다. 대부분 틀릴 것이고, 치다 멈추는 아이, 심지어 우는 아이들도 나올 수 있다. 관객이라고 해봤자 다 부모들 뿐인데 뭐가 무섭다는 말인가.
'아... 못난 것. 틀릴까 봐 대회를 못 나가? 못할까 봐 못하겠다고? 이런... 정말... 바보 같으니라고.'
이렇게 생각했다. 내 자식이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다니 화가 나고, 짜증이 났다. 아이를 다독여 보기도 하고, 피아노 학원 다니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기도 하며 설득했다. 그러나 결국 아이는 연주회에 나가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연주회에 나가지 않기로 결정한 후 며칠이 지났을 무렵 아이는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빠... 내가 대회 안 나가서 속상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가 화가 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조금 미안한 감정을 가지며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듣고 아이는 나에게 부탁을 하나 했다.
"아빠... 미안한데... 나 친구들 연주회 보러 가면 안 될까?
아... 복잡한 감정이 명치끝에서부터 솟아올랐다. 얼마나 연주회에 나가고 싶었으면 보러 갈 생각을 했을까 하는 안타까움과 두려움을 이겨 내지 못해 친구들 연주나 보고 있어야 하는 짜증이 한데 뒤섞였다. 뒤석인 감정이 가슴을 쳤다. 가슴을 치니 물결이 일어났다. 얼마나 속상했을까. 이렇게 나가고 싶었는데 안 나가기로 결정한 아이의 마음은 얼마나 새까매 졌을까. 연주회에 나가라고 회유와 협박(?)을 하는 아빠를 보며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마음을 몰라주는 아빠가 얼마나 미웠을까.
난 아이와 함께 연주회를 보러 갔다. 아이는 주의 깊게 연주회를 보는 듯했다. 아이들은 피아노를 어떻게 치는지, 얼마나 틀리는지, 자기보다 잘 치는지, 못 치는지 보며 자신이 나갈 수 있는 자리인지 가늠해 보는 듯했다. 난 지루함을 이기기위함 이기도 했지만 일부러 아이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손가락을 세우는 게 좋겠어. 눕혀서 치니까 모습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치? 재는 누구야? 힘이 있어서 그런지 감정이 잘 전달되네. 재는 어리지? 너무 약하게 쳐서 강약이 느껴지지가 않는다. 그치?
아이는 내 이야기에 호응하며 주의 깊게 연주회를 쳐다봤다. 선생님의 움직임, 아이들이 연주하는 모습, 관객석의 반응을 주의 깊게 살피는 듯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이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다음에 하면 나가는 쪽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고. 난 아이를 응원했다. 아이와 함께 연주회를 보러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2년이 흘렀다
아이는 11살이 되었고, 연주회에 나가기로 결정했다. 이번 결정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연주회를 앞두고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연주회 당일, 리허설 직전에 아이는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드레스를 입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아이의 모습은 눈부셨다. 나도 나름 밴드를 하고 있기에 아이들이 연주하는 걸 보면 연습량이 부족한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는 구분이 가능하다. 우리 아이는 엄청난 연습을 한 게 확실했다. 악보를 매우 잘 숙지하고 있기에 속도 조절, 강약 표현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아이는 연주에 몰입하고 있었다. 다음에 누를 건반, 계이름을 생각하는 게 아닌 몸이 기억할 정도로 연습을 한 게 분명했다.
아이의 연주가 끝나고, 문득 초등학생인 '나'가 떠 올랐다. 초등학생 '나'는 무서워서 계단 2칸을 뛰지 못했다. 선생님의 질문에 틀릴까 봐 대답을 하지 못한 적도 있다. 선생님이 추천한 대회에 상을 타지 못할까 봐, 그러면 친구들이 비웃을까 두려워 나가지 않았다. 대회에 안 나가기로 결정하고 안도감과 아쉬움을 함께 느꼈던 두려움 많던 11살의 '나'와 '내 아이'가 겹쳐 보였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2가지 방법
이번 연주회에 참여하면서 아이는 두려움을 이기는 첫 발을 내디뎠다. 무엇이 아이를 한 발 내딛게 했을까? 아이는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첫 번째는 '정보의 획득'이다. 내가 무언가 하는 것이 두렵다면 그 일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이 일이 무엇인지, 내가 이 일을 했을 때 어떻게 되는 것인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나는 얼마만큼의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나는 얼마큼 이 일을 하고 싶은지 안다면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 일을 하기로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아이는 연주회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지 못했다. 자신에게 얼마나 부담을 주는 일인지, 내가 할 만한 일인지 가늠하기에 정보가 너무 없었다. 그래서 두려웠고 이 두려움이 자신이 이 일을 하고 싶은 욕구를 집어삼켜버렸다. 그러나 연주회를 가보고,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분위기는 어떤지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두려움의 상당 부분을 떨쳐낼 수 있었다.
두 번째는 '경험'이다. 두려움은 해보지 않은 일을 직면했을 때 증식하고 변이 한다. 일단 해 보면 '별거 아니네.', '할만한데.'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된다. 단언하건대 모든 일이 그렇다. '나와 맞지 않는 일'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맞지 않을 뿐이지 그 일을 대하는 두려움은 반드시 줄어든다.
경험은 우리 몸에 예방접종을 하는 것과 같다. 예방접종을 하면 수많은 '두려움 바이러스' 변종들이 나타나지만 결국 견디어 낸다. 처음에는 조금 힘들 수 있지만 우리 몸은 이겨낸다. 증상이 나타나지도 않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봄바람처럼,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이겨낸다.
아이는 이번에 '연주회 경험'이라는 예방접종을 맞았다. 다음 연주회는 문제없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대회에 나가도 거부감이 훨씬 덜 할 것이다. '일단 해 보니 별것 아니네, 해 볼만 하네, 틀려도 괜찮네.'라는 인식이 이 경험으로 아이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우리 몸의 면역 체계가 한 번 만난 바이러스를 견디어 내 듯 'Just Do It 면역 체계'는 재차 다가올 '두려움 바이러스'를 견딜 수 있게 해 준다.
상사에게 인정받지 못할까 두렵다. 돈을 벌지 못할까 두렵다. 집 값이 떨어질까 두렵다. 회사에서 잘릴까 두렵다. 회사를 어쩔 수 없이 계속 다니게 될까 두렵다. 나쁜 습관을 계속 가지고 살까 두렵다. 아플까 두렵다.
세상엔 두려운 것 투성이다. 50개고 100개고 더 쓸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두려움일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Just do it, 그냥 하는' 거다. 그냥 하려고 하니 너무 두렵다면 책을 읽든, 인터넷을 보든, 찾아보든 정보를 얻어보자. 두려움을 훨씬 완화해줄 거다. 그러나 너무 많은 정보는 역효과가 날 수 있다. 명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