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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May 08. 2020

'정우성' 아빠가 아닌 '찐'이 아빠에 도전하다.

영화배우 '정우성'이 아닌

슬램덩크 '정우성'이다.


나에게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만화책을 딱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일말의 주저함 없이 슬램덩크를 고른다. 처음 슬램덩크를 접했던 게 11살 때였으니 3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대사 하나하나가 그대로 떠오른다.


왼손은 거들뿐
포기하면 그 순간이 바로 시합 종료예요.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난 지금입니다.
그래 난 정대만,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




주인공 강백호, 단지 가까워서 북산고로 진학한 서태웅, 불꽃남자 정대만, 매니저 한나를 좋아하는 포인트 가드 송태섭, 고릴라 채치수, 이들의 라이벌 윤대협, 이정환, 황태산 등등 수많은 입체적인 캐릭터가 나온다.


수많은 라이벌 중 끝판왕은 산왕, 그중에서도 '정우성'이다(만약 슬램덩크 2부가 나왔다면 그는 NBA에서 선수로 뛰고 있을 거다). 정우성이 농구를 잘하는 이유는 바로 '아빠'때문이다.



정우성의 아빠는 아이가 기기도 전에 농구공을 줬다. 집에 미니 농구대를 만들어 줬다. 시시해 지자 정원에 코트가 있는 집을 지었다. 매일매일 아들과 마당에서 농구를 했다.





'정우성'의 아빠처럼 사는 꿈이 있었다.


난 '정우성'의 아빠처럼 살고 싶었다. 내 유전자의 50%를 물려받은 아들과 함께 매일 농구를 하는 모습.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었다.

결혼을 조금 일찍 하고, 아이도 일찍 낳는다. 너무 늙으면 아들과 농구를 하기 힘들다. 적당한 시기에 농구공을 선물로 준다. 미니 농구대가 시시해진 아들을 위해 교외에 마당이 넓은 집을 산다.

농구대를 마당 한편에 설치하고 아들과 매일 농구를 한다. 농구가 끝난 후 난 맥주를 한 잔 하고 아들은 사이다를 한 잔 한다.

중학생이 된 아들은 처음으로 아빠를 이긴다. 엄마는 고기 파티를 명령하고, 아빠는 시무룩한 얼굴로 바비큐 장비를 꺼낸다. 아들이 대견하면서도, 내가 늙었냐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아들은 무럭무럭 자라 고등학생이 된다. 술은 아빠한테 배우는 거라며 곱창집에 데려간다. 아들에게 소주를 한 잔 따라준다.

부장 승진에 또 누락한다. 오늘 아빠랑 술 한 잔 할래? 치킨과 맥주를 앞에 놓고 아들에게 힘들다고 투정을 부려본다. 아들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듣다가 나에게 한 마디 한다. 아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치킨이나 먹자.




'찐'이 때문에 다 망했다.


오랜 시간 이런 삶을 꿈꾸어 왔다. 뭐... 간절히 바라고, 이를 위해 절실한 노력을 한 건 아니었다. 막연히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다면 이렇게 살고 싶었다. 그저 마음 한편에  생각을 옅게 스케치한 그림을 한 장 품고 있었을 뿐이다.


찐이가 태어나는 순간, 병원을 들락날락 거리는 순간, 아이가 목을 잘 가누지 못하는 순간마다 스치는 불길한 생각을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러나 서로 예상은 하고 있었을 거다. 다만 그 예상이 틀리기를 '절실히' 바랬다.


부분의 세상사가 그렇듯, '절실한 바람'은 통하지 않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결국 찐이는 장애 등급을 받았다.


난 품고 있던 옅은 스케치 위로 색을 입힐 수 없었다. 농구장이 있는 집도, 농구를 하며 느끼는 아들의 거친 호흡도, 아들이 쥔 소주잔에 따라줄 소주도, 아들에게 할 수 있는 투정도 이젠 다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찐'이가 원망스러웠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내가 꿈꾸던 삶은
박살 나 버렸어.




장애는 병이 아니다.


내 아이가 지적 장애가 있음을 커밍아웃(?)하면 비슷한 반응이 돌아온다. 먼저 약간의 침묵이 흐른다.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떤지 물어본다. 마지막은 '그럼 이제 어떻게 해?'라고 묻는다.


이렇게 사람들은 아이의 장애를 '어떻게 고칠 수 있는지' 물어본다. 장애를 치료가 필요한 병으로 생각한다. 특히 지적장애는 더욱.


나도 그랬다. 어떻게 하면 발달을 빠르게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병원에 지적 능력을 향상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항상 물었다. 나에게 한 동안 '찐'이는 남들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수준이 낮은 존재였을 뿐이다. 그래서 난 '찐'이를 내 스케치를 망쳐버린 주범으로 보았나 보다.


장애는 병이 아니다. 장애인은 남들보다 수준이 낮은 존재를 칭하는 말이 아니다. 장애는 그저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 수학을 못하는 아이, 내성적인 아이, 하체가 발달한 아이와 같이 아이가 가진 특성일 뿐이다.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 부모는 아이를 '있는 그대로의 축복'으로 여기면 된다. 장애아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진정한 '찐'이 아빠에 도전한다.


퇴근을 하고 대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찐이가 신발장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장난감 기타를 매고 장범준의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 향이 느껴진 거야>를 따라 부르면서. 내 얼굴을 보더니 함박웃음을 짓는다. 어린이집에서 배운 한결같은 인사를 한다. 따려, 공슈, 아빠, 아니하시우, 사아해어(차렷, 공수, 아빠 안녕하세요. 사랑해요).



모두들 가슴속에 그려온 삶이 있다. 그게 아들과의 삶이든, 아내와의 삶이든, 입신양명이든, 퇴근 후 여유롭게 취미를 즐기는 삶이든. 자신의 상황에 맞춰 그 그림을 수정하기도 하고, 새로운 스케치를 가슴속에 보관하기도 한다. 내가 장애 아이의 아빠라서, 찐이가 장애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그려온 삶이 망가진 것이 아니다. 그저 장애라는 특성을 가진 우리 '찐'이가 선물처럼 나에게 왔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난 오늘 새롭게 내 꿈을 스케치한다. 찐이에게 기타를 사주고, 마당이 있는 집을 사고, 마당에서 채소를 키우고, 곤충을 구경하며, '농구' 대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고, 소주 대신 사이다를 따라준다.


이 스케치를 가슴속에 품는다. 스케치 위에 하나씩 하나씩 색을 입혀가고 있다.


나는 이제 진정한 '찐'이 아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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