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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May 23. 2020

난 화가 나지 않습니다만...

화와 짜증을 다루는 3가지 방법

부장 : 이게 뭐니?
나 : 네?

부장 : 지금 올린 거 이거 뭐냐고?
나 : 그거 00에서 취합을 요청해서 각 사별 내용받아서 모은 겁니다. 지금 00으로 이메일 발송 결재 올린 거고요.

부장 : 이게 뭔지'는' 알고 있니?
나: 2016년에 추진하다 멈춰져 있던 걸 지금 다시 추진하려고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장 : 에휴. 알겠어. 이거 확인해서 다시 올려.


이 대화는 이랬어야 한다.


부장 : 이 부분 확인해서 다시 결재 올려줘(세요)
나 : 넵넵!


첫 번째 방식으로 대화가 오고 가면 짜증이 난다. 이런 일이 몇 번 일어나는 재수 없는 날이면 집에 들어가기 전에 내 감정은 고갈되고 만다. 현관문을 연다. 집에는 육아와 집안일로 감정이 고갈된 또 다른 한 사람이 있다. '내 소모된 감정을 네가 채워줬으면 좋겠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서로를 바라본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는 그 기대감을 접는다.




아... 짜증 나 미치겠네. 젠장.


명치에 모래알이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답답해진다. 온몸의 혈액은 얼굴로 몰린다. 얼굴은 빨개지고 관자놀이와 뒷목은 따끔거린다. 귀는 웅웅 거리고, 삐이이잉 하는 파열음이 고막을 때린다.



그때 아이가 불씨 하나를 들고 나에게 온다.


아이에게 이제 씻어야 할 시간이라고 말한다. 아이는 듣는 둥 마는 둥 텔레비전만 보고 있다. 다시 한번 씻으라 말한다. 아이는 '알았다고!'라고 말하며 방으로 간다. 평소라면 감정을 알아차려 잘 보듬어 주었을 상황이다. 그러나 가스가 가득 차 있는 내 머리는 터진다. 펑.


아이에게 무서운 눈빛을 쏘아 보낸다. 언성을 높인다. '내가 화를 낸 건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다', '올바른 생활 습관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괜찮다. 그러니 내가 화를 낸 건 정당하다.


이런 못난 생각이 머리에 들어온다. 아이는 부모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님에도 아이를 위해서라는 비겁한 변명을 한다. 난 단지 화를 내고 싶었을 뿐이다. 전무, 부장같은 강한 존재에게 화를 낼 수 없다. 가장 연약해서 내가 화를 내도 괜찮을 존재에게 내 화가 미쳤을 뿐.




짜증과 화를 다스리는 방법 3가지


1. '짜증과 화의 원인은 나에게 있다'는 것을 안다.


'00 때문에 짜증 나 죽겠네.'

내 입에 찰싹 붙어 있다. 하지만 짜증의 원인은 나에게 있다. 화를 내고 싶은 타이밍에 누군가가 나를 툭 건드렸을 뿐이다.


마셜 B. 로젠버그는 그의 책 <비폭력 대화>에서 화와 짜증의 원인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말한다. '상대방이 약속 시간에 1시간 늦었기 때문에 짜증이 났다.' 만약 이 문장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같은 짜증이 나야 한다. 그러나 '상대방이 늦은 덕분에' 평소에 보고 싶었던 <블랙 미러>를 볼 수 있었다면, 화가 나지 않았을 거다.



마음속에는 짜증, 화, 분노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담는 그릇이 있다. 이 그릇은 사람에 따라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다. 그 그릇이 넘치면 짜증과 화가 외부로 분출된다. 넘치는 순간 나와 마주친 어떤 누군가에게 내 화와 짜증의 책임을 넘길 필요가 있을까?



2. 짜증과 화는 내 선택일 뿐이다.


화나 짜증 같은 어떤 자극을 받았을 때 바로 반응이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빅터 프랭클은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고 한다. 위에서 말한 감정의 그릇처럼 이 공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반드시 그 공간은 있다.


짜증을 외부로 분출하려는 바로 그 순간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러면 다음에 이어지는 반응은 오롯이 내 선택이 되어버린다. 어떤 반응을 선택할 것인가? 내 앞에 있는 약자에게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부드럽게 상황을 이어나가는 사람이 될 것인가?



3. 내가 짜증이 났음을 그저 알아차린다.


마음 챙김 명상에 나오는 '알아차림'은 내 감정을 다루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알아차림'을 통해 3자의 시선에서 내 마음을 바라볼 수 있다. 내 마음'에서' 보지 않고 내 마음'을' 본다.


마음'에서' 본다는 건 짜증 선글라스를 끼고 세상을 보는 것과 같다. 당연히 세상은 짜증으로 가득 차 있다. 마음'을' 본다는 건 그 짜증 선글라스를 잠시 벗고 그저 잘 살펴보는 거다.


아... 지금 내가 짜증이 나 있구나. 내 감정 그릇이 지금 넘쳤구나. 그래서 내 명치에 모래알이 가득 찬 것처럼 답답하고, 땀이 나는구나. 얼굴로 피가 쏠리고 머리가 웅웅거리는구나. 아... 그렇구나...



이렇게 알아차린다. 그리곤 상상해 본다. 내 머리 위로 연기가 나는 모습을. 짜증과 화가 연기로 변해 내 정수리 위로 연기처럼 뻗어 나가고 있는 모습을. 잠시 눈을 감아도 좋고, 심호흡을 한 다면 더 도움이 된다.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그저 생각만 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짜증, 화. 없애버려?


짜증이나 화라는 감정을 내 인생에서 없애버릴 수는 없다. 감정을 없앤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정적인 감정은 날 힘들게 하지만 가져서는 안 되는 감정이 아니다. 중요한 건 이 감정을 어떻게 다루느냐다.


짜증이나 화가 나는 원인이 대부분 나에게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공간이 있음을 알아차린다. 내가 짜증이 났다는 것을 그저 바라본다. 짜증 난 마음에서 보지 않고, 짜증 난 마음을 바라본다.


헛소리 하지 말라고? 속는 셈 치고 한 번 해보시라.


꽤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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