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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Jun 17. 2020

내 팔자에 무슨 바다냐!

출발 전 날

안 좋은 일, 힘든 일, 짜증 나는 일이 있다. 견뎌보다 조금 벅찰 때는 바다를 봐야 한다. 드라마에서도 그러지 않나. 힘들면 갑자기 바다로 떠 난다. 00야! 힘내!라고 혼자 외치고 힘을 얻지.


바다를 본다면 동해다. 서해는 청량한 맛이 없다. 서해를 폄하하는 건 아니다. 그냥 개인적인 취향이다. 어쨌든, 그래야겠다. 동해로 가야겠다.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동해는 양양. 카카오 맵을 열어 양양 해수욕장을 찍었다. 2시간 27분. 지금이 밤 11시라 차가 없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다녀올 만하다. 그래 내일 바다로 떠난다.


어서 자고 6시에 일어난다. 고슬고슬하게 밥을 짓는다. 마트에서 사 온 야채와 해물이 듬뿍 들어갔다고 주장하는 푸레이크를 듬뿍 넣는다. 슬슬 비빈 후 꽉꽉 뭉쳐 주먹밥을 만든다. 적당히 참기름을 넣는 걸 잊지 않는다.

고구마를 꺼내어 흐르는 물에 씻는다. 호박고구마도 밤고구마도 안 된다. 꿀 고구마를 씻어 에어 프라이기에 돌린다.

슈퍼 100 요구르트 2개와 윌 2개를 챙긴다. 빨대 5개도 챙겨 넣는다.

에티오피아 커피콩을 간다. 짙은 첫 향과 약간 크리미 한 끝 향을 음미한다. 필터에 커피 가루를 넣고 중간부터 물을 붓는다. 주전자를 잡은 손에 집중하며, 물줄기를 조절한다. 텀블러 3개에 나누어 담는다.



이렇게 준비를 마치면 7시 정도 되겠지. 7시에 출발해서 9시 30분에 양양 해수욕장에 도착. 바다 보고 낙산사 다녀와서 12시에 다시 서울로 출발. 서울 도착 2시 30분. 아무도 모르게 다녀올 수 있어. 그래. 가자.


빤뽀(첫째 딸)는 할머니네에서 잔다고 했으니, 찐이(둘째 아들)만 데리고 슉 다녀오는 거야. 계획대로만 된다면 구겨진 내 일주일, 소모된 내 감정은 다시 충만해질 수 있어!




가자.바다.

아내에게 이 스페셜한 계획을 말한다. 격한 반응을 예상했지만 미지근하다. 코로나 19 걱정이다. 이런 상황에 어딜 가는 게 맞는지. 걱정 말라고, 그냥 찍고 오자고, 아무 데도 가지 말자고, 실내는 화장실도 가지 말자고, 빈 페트병 3개 정도면 우리 셋, 충분하다고, 그냥 가서 바다 보고 낙산사 갔다가 회나 떠가지고 집에 와서 먹자고. 아내는 그럼 그러잔다. 화장실 정도는 마스크를 쓰면 괜찮을 듯 하니 빈 페트병은 챙기지 않아도 된단다.



그래 그러자. 우리 힘들잖아. 바다는 우리에게 무한한 에너지를 줄 거야. 파도 소리를 생각해봐. 저 멀리서 너울너울 몰아오다 내 앞에서 하얗게 흩뿌려지는 파도를 생각해봐. 멀리 수평선이 보이고 그 너머에서 몰려오는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니. 바다에 내려놓고 탁 털어내고 오자. 눈시울 정도는 붉어져도 되지만 펑펑 울진 말자.




출발 당일

6시에 일어나려 했지만 30분 늦잠을 버렸다. 괜찮아. 7시 30분에 출발해도 충분해. 낙산사 시간을 조금 줄이면 돼. 주먹밥, 고구마, 요구르트, 커피를 준비한다. 1시간으로는 조금 부족하다. 괜찮다. 원래 계획은 틀어지기 마련이니까. 낙산사를 빼면 된다. 힘든데 거기까지 올라가서 뭐해. 바다를 보고 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거야.


아내를 깨운다. 왜? 몇 시야? 바다 가자. 바다가 우릴 기다려. 속삭인다. 뭐? 뭔 바다? 진짜였어?


그래. 도시락은 그냥 내가 먹으면 된다. 베란다에서 먹자. 바다는 아니지만 앞의 회색 상가가 꽤 운치 있다. 초밥집, 정관장 홍삼 간판도 다른 관점에서 보면 감상에 빠지기 충분해. 그래... 주먹밥을 입에 하나 욱여넣는다. 밥이 고슬고슬해서 맛있다. 적당히 들어간 참기름 향이 주먹밥에 풍미를 더 한다.


잠시 후 아내가 나온다. 가자 신랑. 조금 늦었지만 괜찮지? 그럼! 지금 충분해. 미소가 번진다. 주먹밥을 괜히 먹었다. 손이 분주해진다. 내 심장은 지금 겁나 뛰고 있다고.




간다.바다.

지금은 못 가. 찐이 똥 싸야지!


아... 그러네... 똥을 생각 못했다.  찐이는 매일 아침 일정한 시간에 똥을 싼다. 차에서 똥이 마렵다면 처리가 쉽지 않다. 어른과 똑같이 먹기에 어른과 똑같은 똥을 싼 


찐이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래. 그거야. 밀어내. 무사히 마무리하고 드디어 바다로 출발한다. 8시 30분. 그래 아직 괜찮아. 조금 밀릴 수도 있지만 세 시간이면 갈 수 있을 거야!


양양으로 가는 차 안에서 할머니네 집에 있는 빤뽀에게 전화가 온다. 어디냐는 질문에 바다로 가는 중이라고 말한다. 실망하는 빤뽀. 점심을 식당에서 먹어도 되냔다. 코로나 19 로 식당은 아무래도 위험하니 배달을 권유한다. 죄책감이 밀려온다. 아... 이렇게 양양에 오는 게 아닌데. 바람처럼 갔다 오려했는데. 아무도 모르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서울로 돌아오려 했는데.



차가 밀린다. 양평에서도, 춘천에서도. 뒷 좌석에서 찐이가 엄마 머리채를 잡고 휘두르고 있다. 찐이에게 밀리는 차 안은 너무 힘들다. 나도 힘든데 그 조그만 녀석은 얼마나 힘들겠다. 그래서 엄마 머리채를 잡고 휘두르고 있다.


애먼 찐이에게 그만하라고 소리를 지른다. 찐이는 룸미러에 비친, 괴물로 변해 버린 아빠의 모습을 보고 있다. 괴물을 보고 무서움에 눈이 휘둥그레진 찐이가 룸미러에 비친다. 



못난 놈.

아이에게 화풀이를 하다니.

젠장.

내 팔자에 무슨 바다냐.



그 날, 바다

4시간이 걸렸다. 1시에 더 가까운 시각에 양양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꾸역꾸역 도착한 바다는 크고 넓다. 내 고통을 다 털어놔도 그냥 그렇게 파도가 잘 실어 태평양으로 데려갈 듯하다. 그렇게 그렇게 내 고통을 다 가져가도 바다는 괜찮을 것 같다. 플라스틱 섬보다는 저마다의 고통과 부담이 모인 섬이 더 낫겠지. 그렇게 마음속의 고통을 바다에 버린다.


아이를 등에 업고 바다에 힘든 마음을 투기하고 나니 좀 낫다.


그래 난 지금 바다에 있다.




에필로그.

회를 뜨러 간다. 한 바구니에 삼만 원. 광어에 우럭, 오징어까지. 멍게도 2개나 끼어 있다. 서울에서 8만 원은 줘야 할 듯하다. 벌써 군침이 돈다. 얼른 집에 가서 먹어야지.


마스크를 쓰지 않은 분들이 보인다. 아내는 잠시 나가잔다. 그리고 회를 꼭 떠야 하냔다.


그래 그냥 가자 내 팔자에 무슨 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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