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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Jul 10. 2020

전화영어, 누구냐 넌.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전화영어, 나에겐 그렇다고.

사사삭. 수풀이 움찔거린다. 사냥꾼의 시선이 조용하고 빠르게 움직인다. 잘못 들었나, 눈을 돌리려는 찰나, 무언가 잎사귀를 헤치며 뛰쳐나온다.

좋은 사냥감이다, 사냥꾼은 생각했다. 조용히 총구를 사냥감 쪽으로 가져간다. 녀석은 아직 수풀 근처에서 풀을 뜯고 있다. 뺨을 차가운 총에 살며시 갖다 댄다. 스코프를 잠시 만지고는 한쪽 눈을 감는다. 녀석이 스코프 안에 들어온다. 빵. 명중이다.


영어를 잘하고 싶었다. 유창하게 원어민과 이야기하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그들과 섞이고 싶었다. 콩글리시를 쓰고 싶지 않았다. 한국어 표현을 그대로 영어로 옮겨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깊이 이해해야만 할 수 있는 표현을 쓰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나에게 영어가 중요하지 않아서였을까?


영어는 나에게 많은 기회를 준다. 강창래 작가는 그의 책 <위반하는 글쓰기>에서 '영문 검색 자료에는 인류가 만들어낸 거의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글쟁이에게는 자료를 읽어내는 능력과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라고 했다. 영어로 된 자료를 자유자재로 검색해서 '읽어내고', '해석'할 수 있다면 조악한 글을 쓰고 있는 나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릴지도 모르겠다.


아들 찐이는 지적 장애가 있다. 아들이 장애인이 되어 보니 불편한 점도 차별도 많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도 느낀다. 찐이가 태어나고 몇 년 뒤, 꿈이 생겼다.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에 가보고 싶다. 장애인에 대한 교육은 어떻게 하는지, 장애인 통합 교육은 문제없이 실행하는지, 장애 인권, 장애인 이해, 인식에 대한 교육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실제 장애인의 생활은 어떤지 피부로 느껴보고 싶다.


이 정도면, 내가 영어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러나 바쁘다는 핑계와 자기 합리화로 영어공부를 하지 않았다. 당장은 영어가 전혀 필요가 없었으니까. 필요 없는 것을 하느라 몸이 불편해지는 것보다는 당장 급한 것을 빠르게 처리하는 편안함을 선택했다. 난 수풀에 누워 편안하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작년 봄, 수풀 밖으로 튀어 나갔다. 정말이지, 맛있어 보이는 '풀'이 밖에 있었다.


"튜** 전화영어"


원어민과 전화로 통화하며 내 영어 실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 방대한 양의 콘텐츠도 가지고 있어 내 영어 실력이 쑥쑥 올라갈 것만 같았다.


1년 동안 240회나 자유롭게 원어민과의 전화 통화를 할 수 있는 상품이 눈에 띄었다. 세상에, 할인율은 70%. 앞으로 일주일이 지나면 이런 할인율은 구경할 수 없을 거란다. 이런 대박 상품이... 게다가, 놀라지 마시라. 스쾃(스쿼트) 기구까지 같이 준다. 정말 멋지지 않나. 스쾃(스쿼트)이라니. 이 운동기구만 있으면 난 '편안히' 스쾃(스쿼트)을 할 수 있다.  실력뿐 아니라 체력까지 쑥쑥 올릴 수 있는 거다. 남자는 허벅지다.


하루에 20분 정도는 쉽게 확보할 수 있다. 이렇게 1년을 외국인과 대화하면 거의 원어민 수준에 도달할 것이 확실했다. 1년 후, 유창하게 외국인과 대화하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하루에 두 번씩 통화를 해서 수강권이 조기 소진 되는 건 아닐까 걱정하며, 결재했다.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 퍼졌다.


첫 3일은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다. 원어민 튜터와도 친해진 느낌이다. 틀린 부분을 바로 수정해 준다. 수업이 끝나면 피드백도 준다. 좋은 질문으로 대화가 끊기지 않는다. 영어로 생각해서 말하는 게 조금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할 만하다.


3일이나 쉬지 않고 달렸다. 하루 정도는 쉬어야겠다. 1년도 채 되기 전에 수강권이 다 없어져 버리면 큰일이니 말이다. 하루 쉬고, 내일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그러나 '3일 수업에 한 번 휴식'이 '3일 쉬고 한 번 수업'으로 바뀌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곧 한 달을 내리 쉬었다. 이 한 달은 두 달이 되고, 두 달은 네 달이 되었다.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11개월이 지나있었다. 수강권은 아직도 160개가 남아있었다. 하루에 4번씩 전화영어를 해도 40개나 남는다. 그때 마법처럼 팝업이 튀어올랐다.


<수강권 30개를 더 주며, '기존 수강권의 기한'도 3개월 늘려주는 '마법의 패스'>가 그려져 있었다. 그래! 4개월이면 할 수 있어. 하루에 1.58개의 수강권을 소진하면 다 끝낼 수 있을 거야, 결재하자. 무언가에 홀린 듯 내 손가락은 움직였다. 이 방법이 지금의 내 수강권을 지키는 유일한 길 같았다. 내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갔고, 내 수강권의 기한은 3개월이 늘어나 있었다.



지금 스쾃(스쿼트) 기구는 내 방 베란다에 있다. 이 녀석이 맡고 있는 역할은 무려 3가지다. 첫 번째는 자리 차지. 베란다 한편에서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두 번째는 통행 방해. 베란다 저편으로 가려면 이 녀석을 넘어야 한다. 세 번째는 무릎 가격. 가끔 내가 실수로 니킥을 날리기도 한다. 진짜 아프다.


수강권은 3개월 전과 똑같은 숫자가 남아있다. 현재일 기준으로 기한이 약 2주 정도 남았다. 소멸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다.




왜 전화 영어에 실패했는가?


나는 왜 전화 영어에 실패했는가? 핑계라도 대야 까맣게 타 들어간 내 속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을 것 같다.


원어민과의 하루 20분 대화만으로는 절대 영어 실력이 늘지 않는다. 대화 시간보다 100배 중요한 것은 전화 영어 전 준비시간과 전화 영어 후 복습이다. 180개의 수강권을 날리고 깨달았다.


한국말로는 하고 싶은 말이 미친 듯이 떠오르지만 이와 매칭 되는 영어 단어나 구문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것이 문제다. 전화영어를 하기 전, 주제를 미리 정하고 스크립트를 써야 한다. 이를 미리 숙지하고 전화 영어를 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더 말을 많이 할 수 있고, 새로운 표현을 의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튜터가 나보다 말을 훨씬 더 많이 하게 된다. 누가 튜터인건지.


전화 영어가 끝나면, 튜터의 피드백을 복습하고 익혀야 한다. 그래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된다. 이를 매 번 반복해야 전화 영어가 의미 있다. 적어도 하루에 1시간에서 1시간 30분을 투자해야 실력이 아주 조금씩 오르기 시작할 거다.


'하루 20분 가볍게 원어민과 대화를 1년간 하면 영어 실력이 쑥쑥 늘어난다?' 아예 접근부터 틀려먹었다. 말도 안 되는 가정을 하고 절대 이룰 수 없는 목표를 향해 깃털처럼 가벼운 의지를 가지고 도전했다. 실패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 스쾃(스쿼트) 기구를 사용하면 '편안히' 스쾃(스쿼트)을 함으로써 허벅지를 두껍게 만들 수 있다, 는 무식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똥과 된장


똥인지 된장인지 확인하기 위해 기어코 찍어 먹었다. 생각해 보니 난 똥을 여러 번 찍어먹었다.


대학교 때 아버지 따라 헬스클럽 1년을 끊었지만 1주일을 채 못 갔다.

고등학교 때 EBS 수능특강 비디오 약 100개를 샀던 기억이 난다. 3편 정도 보고 모두 버렸다.

고등학교 때 '총력 테스트' (1990년대 말 학습지 원탑)도 반도 풀지 못하고 버렸다.

중학교 때 '독서평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을 1년 구독하여 한 달도 채 읽지 않고 모두 버렸다.


이제 곧 40이다. 이제 색깔만 보고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닌가. '남'에겐 '된장'일지라도 '나'에겐 '똥'일 수 있다는 진리를 몸에 새겼길 바란다.



아내에게,

미안해. 용서해줘.

다시는 나에게 전화 영어는 없어.

이제 책으로 영어 공부할게.

오늘 책 몇 권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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