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실한 베짱이 Nov 11. 2020

술, 널 마시면 행복해지는 거니?

내가 행복을 느끼는 순간 10가지

머리에 통증을 느끼며 침대에서 일어난다. 입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진다. 온몸의 수분이 다 빠져나간 것만 같다. 머리는 파리 몇 마리가 휘젓고 다니는 것처럼 웅웅거린다. 입안에는 어제 마지막으로 먹었던 오징어가 자기 차례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 오징어보다 먼저 들어간 녀석들은 내 위에 있기 싫다고 아우성이다.


어제 술자리는 재밌었나? 젠장. 이런 걸 생각할 겨를도 없다. 위를 비우고 또 비워도 울렁거리니. 뇌를 꺼내 깨끗이 씻어 다시 넣어놓고 싶다. 머리에 본드를 짜 넣은 듯하다. 엉겨 붙어 당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샤워를 해 보고, 물을 마셔보지만 소용없다. 버티고 버텨 지하철에 오른다. 꽉 찬 지하철 마스크에 튕겨 다시 돌아오는 술냄새. 회사에 도착하는 20분이 하루 같다



내가 다시 술을 마시면 개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아픈 속과 머리가 조금은 진정되기 시작한다. 아주 조금씩 잦아드는 통증과 함께 평소와 다르게 이 질문이 머리에 계속 맴돈다.

어제는 재미있었나?
어제는 행복했었나?


따라주는 첫 잔에 서로 경계를 조금 늦추자고 암묵적으로 합의한다. 두 번째 잔에 서로에 대한 궁금증을 가득 채운다. 세 번째 잔에 대답을 담아 살며시 잔을 부딪히고 목 뒤로 술을 넘긴다. 과함이 없는 부딪힘, 과함이 없는 목 넘김이다. 너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고, 조금씩 신뢰를 쌓는다. 이 신뢰는 앞으로 일을 할 때 윤활유 역할을 하겠지.


네 잔, 다섯 잔... 목구멍을 타고 술이 술술 넘어간다. 기분이 좋아지며,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한다. 너의 얼굴은 빨개졌고, 내 얼굴도 눈에 띄지 않게 붉그스름하다. 의리를 담아 한 잔 더 마시고, 이젠 사랑까지 담는다. 서로에 대한 극도의 호감을 한 가득 따라 마셔버리면, 이제 내 안의 술이 에 담긴 술을 빨아들인다.


그래, 기분이 좋았지. 즐겁긴 했지. 옆에 돌이 굴러가도 웃겼지. 지금은? 다시 술을 마시면 개가 되겠다 선언하고 다짐하고 있다. 지금 머리를 싸매고 내 자리에 버로우하고 있다. 안 되겠으면 빈 회의실로 들어가 쪽잠이라도 잘 예정이다. 팀장님이 갑자기 회의를 소집하거나 일을 시킬까 불안하고 두렵다.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잖아.


술을 마시면 기분이 일시적으로 좋아진다. '도파민'때문이다. 에탄올은 뇌의 쾌락 중추인 중변연계에서 도파민을 분비하게끔 한다. 임무를 완수하거나, 스포츠 게임에서 이겼거나, 글을 하나 완성시켰다거나 했을 때 도파민이 분비된다. 분비된 도파민은 행복감을 선사한다. 술을 마시면 어떠한 노력도 없이 도파민이라는 행복 물질을 얻을 수 있다.


계속 술을 마시면, 계속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해 봤지만, 숙취에 찌든 지금 내 상태를 보고 접었다. 게다가 기분마저도 계속 좋아지지 않는다. 도파민이 과다하게 분비되면 우리 뇌는 도파민과 결합하는 수용체를 늘린다. 늘어난 수용체만큼 더 많은 도파민 필요로 한다. 필요한 만큼 도파민공급되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이는 우울감으로 이어진다. 이를 중독이라 한다


우울해서 술을 마시고 그 술 때문에 우울해져 다시 술을 마시는 악순환에 빠진다.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은 함께 걸리는 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내가 행복을 느끼는 순간 10가지


술은 아니다. 술은 날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돈이 있으면 매일 술 마시고, 친구들 만나고, 내가 가진 것 자랑하고, 어디 놀러 가고, 게임하고, 예능 보고, 유튜브 보고, 영화 보러 다니려고 했다. 언뜻 너무 좋아 보만 술과 같다. 매일매일 자극을 즐기면 내 뇌는 점점 더 큰 자극을 원하게 될 거다.


1. 아침에 일찍 일어났을 때

일어나는 순간은 짜증이 난다. 자고 싶다는 욕망에 힘들디. 불행하다 느끼기도 하지만 잠만 깨면 된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새벽에 책을 읽고, 명상을 하고, 일기를 쓰면 행복감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오롯이 나와만 현재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다. 가끔 일어났다 다시 잠들 때의 꿀맛을 느끼기도 한다.


2. 잠들기 전 아이에게 해주는 마사

시작하고 5분 정도는 죽을 맛이다. '아직 안 자나', '잘 기미가 안 보이네...', '빨리 자면 스타나 한 판 해야지.' 이런 생각이 머리에 가득하다. 5분이 지나고 마사지 자체에 집중하면 잡생각이 사라진다. 아이의 부드러운 허벅지의 촉감, 탱글한 얼굴을 쓰다듬을 때의 짜릿함, 귀엽고 조그마한 손과 발을 꾹꾹 누를 때 아이의 표정이 날 행복하게 한다.


3. 한 달에 1번 정도의 술자리

최근에는 코로나로 술자리가 없어지다시피 했지만, 한 달에 1번 정도의 술자리는 정말 꿀맛이다. 접대는 뺀다. 친구들이나 동료들과의 술자리가 좋다.


4. 가족들과의 저녁 식사

아내와 아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먹는 저녁 식사 자리도 충분히 행복하다. 맛있으면 더 행복하겠지만 약간 맛이 떨어지는 음식이라도 괜찮긴 하다.


5. 아이와 아내가 서로 바라보며 웃을 때

아내가 아이를 바라보며 웃고, 아이도 엄마를 사랑스러운 눈 길로 바라볼 때 정말 행복하다. 이 순간이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한다.


6. 글을 쓰는 순간

글을 쓰고, 포스팅을 하고 반응을 지켜보고 소통하는 게 행복하다. 가끔 귀찮기도 하고, 글감이 없거나 문장이 잘 써지지 않을 때는 불행한가?,라는 생각이 잠시 스치기도 한다.


7. 점심시간에 카페에서 책을 읽을 때

다른 사람들도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가끔 누군가(편하든 편하지 않든)와 밥을 먹고 들어오면 피곤하고 기운이 없을 때가 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맞장구 치며 이야기 한다는 건 감정을 소모하는 일이다. 책 읽기는 감정을 채워주는 행위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소모된 감정을 채워주면 정말 행복하다. 


8. 주말 예능

말해 뭐 하겠는가. '놀면 뭐하니?'는 토요일 저녁마다 날 행복하게 한다. 매일 본다면 즐겁지 않을 거다. 예전엔 당연히 '무한도전'이 날 행복하게 했다.


9. 책을 살 때

김영하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라, 사놓은 책 중에 읽는 거다.' 그래. 맞다. 그래서 난 책을 사러 간다. 아내는 지금도 안 읽은 책이 집에 쌓여 있다면 온갖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회유도 해보지만 어쩌랴. 책을 사면 기분이 좋은 걸.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하는데... 아직 부족하다.


10. 알아차릴 때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을 '나'라 착각하고 산다. 생각하고 있음을 알아채는 존재가 본연의 '나'라는 것을 문득 알아차릴 때가 있다. 알아채는 순간 소유나 인정에 대한 욕구가 가라 앉는다. 짜증, 화, 분노도 가라 앉고 현재를 살게된다.


덧.

돼지바 블랙을 먹을 때, 광화문 뚝배기 감자탕을 먹을 때, 미진의 메밀 소바를 먹을 때도 엄청 행복하긴 하다.




※ 술과 도파민에 관련된 이야기는 <전문가의 세계-뇌의 비밀 우울해서 한잔, 술 깨면 더 우울 ‘도파민의 덫’>, 구자욱 한국뇌연구원 책임연구원, 경향신문 2016.12.16 기사를 참고하였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전화영어, 누구냐 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