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가 없는 인간은 없다. 크냐 작냐의 차이만 있을 뿐 각자 장애를 가지고 살아간다. 물론 그 크기도 상대적이고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장애를 만나기도 한다. 갑자기 눈 앞에 커다란 벽이 나타나기도 하고, 갑자기 무언가가 나를 들이받기도 한다.
장애를 만나면 남 탓을 한다. 신을 욕하고 세상을 욕하고 옆사람을 욕한다. 아무 잘못도 없는 나에게 이런 시련을 내려준 신이 밉다. 세상의 부조리가 나에게 이런 아픔을 주었다. 세상을 부숴버리고 싶다. 옆에서 자꾸 나를 자극한다. 너만 아니면 난 조금이라도 행복할 거다.
내 안의 장애, 내가 만난 장애
7년 전. 봄. 찐이가 태어났다. 그 환하던 봄날이 이리도 지독하게 '찐'할 수 있을까. 그때는 몰랐지만 그랬던 봄날이었다.
태어나면서 아팠고, 크면서 더 아팠다. 병원에 있는 날이 많아졌고, 응급실에 뛰어가는 날이 늘어났다. 주변을 둘러볼 정신이 없었다.
정신없는 시간이 흐른 뒤 정신을 차렸다. 나를 좀 추스를 새도 없이 장애가 나타났다. 찐이는 '발달 장애'였다.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 시선이 나에겐 장애물이 되었다.
커다란 벽이 나타났다. 넘으려 시도했다. 넘을 수 있겠다, 싶으면 벽이 더 높아지고, 넘으면 벽이 또 있었다. 돌아서라도 가보려 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날 들이받기 시작했다.
아프고 두렵다. 담낭에 커다란 결석이 차 있는 것처럼 목구멍이 묵직하고 명치끝이 답답하다. 머리에 파리가 돌아다니는 것처럼 웅웅거린다. 짜증이 나고 화가 난다. 날 가로막는 건 부수고 싶은 욕구가 솟구친다.
하늘을 쳐다보고 소리 질렀다. 난 아무 잘못도 없는데 이게 뭐하는 짓이냐, 물었다. 하늘도 신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욕을 쏘아 올렸다. 그 욕은 하늘에도, 신에게도 닿지 않았다. 자유 낙하하며 세상으로 떨어졌다. 형편없는 장애인 복지 제도를 욕하고, 날 동정하는 사람들을 욕하고, 날 무시하는 사람들을 욕하고, 관심 없는 척 신경 쓰는 사람들을 욕했다. 내 옆에서 함께하는 아내까지 욕하고 나니 이제 욕할 대상이 없어져 버렸다. 기분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찐이만 없었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찐이가 없는 세상이 꿈에 나타났다. 죄책감에 시달렸다. 아내도 힘들었다. 힘들다, 는 말로는 충분치 않을 정도일 거다. 죄책감에 억울함까지.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고 힘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내를 지지하고 버틸 힘이 없었다.
장애를 헤쳐나가는 3가지 습관
지금은? 당연히 힘들다. 그러나 나의 일상은 크게 문제가 없다. 예전엔 하루에도 몇 번, 지옥과 천국을 오갔다. 일상이 흔들렸었다. 흔들리는 일상을 지킨 건 3가지 습관 덕분이었다.
<책읽기>
힘든 시기, 날 가장 많이 위로해 줬던 건 책이다. 원래 책을 좋아했었냐고 묻는다면 책을 좋아하는 '척' 했다는 표현이 가장 정확할 것 같다. 1년에 1권도 제대로 책을 읽지 않았지만, 취미는 책읽기였으니까.
아내와의 싸움이 지겨워 신물이 날 즈음, 지치고 지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 즈음, 육아휴직을 했다. 육아를 하고, 집안일을 하고, 가족들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여행도 간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는다면 책도 읽고, 생각도 하며 자기 계발을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을 한 회사가 무산시켜버렸다.
넷플릭스는 첫 한 달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한 달은 두 달이 되었고, 두 달은 네 달로 이어졌다. 휴직기간 내내 난 넷플릭스와 함께 했다. 단연 내 시간을 가장 많이 가져간 건 워킹데드였다.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영상을 쳐다보는 것 만으로 재미와 만족감을 얻을 수 있었다. 효율만 따지면, 그 어느 것도 이를 따라갈 수 없을 거였다.
만족감은 길게 지속되지 않았다. 정말 딱! 넷플릭스를 보는 그 순간만 내 상황을 잊을 뿐이었다. 책은 그렇지 않았다. 책을 통해 얻은 만족감은 오래갔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서 너무 일찍 철이 든 제제는 날 위로해 주었다. <비폭력대화>는 대화의 방식을, 브라이언 트레이시의 책과 <감정코칭> 같은 육아 서적에서 아이는 내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움받을 용기>에서 행복을 위해 필요한 건 단지 나의 결정이라는 것을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에서는 단지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 전부라는 사실을 알았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를 읽으며 내가 너무 애쓰며 살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며 편안해질 정도의 위안을 얻았다.
<달리기>
3년 전 10월 31일. 달리기를 시작했다. 분홍색 코끼리를 절대 생각하지 마,라고 말하면 머릿속엔 분홍색 코끼리가 가득 찬다. 분홍색 코끼리의 바다에서 헤엄쳐 나오려 해도 절대 나올 수 없다. 이 상황에서 코끼리를 몰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집중의 대상 중에 가장 좋은 건 단연코 달리기다.
2006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심리학자 메건 오튼과 켄 쳉은 '의지력이 훈련으로 강화될 가능성이 있는가'에 대한 연구를 했다. 처음 그들이 한 연구는 18세에서 50세까지의 성인 24명에게 두 달 동안 체력 단련 프로그램을 실시한 것이었다. (...) 그들은 건강이 좋아진 것은 물론, 흡연량이나 음주량, 카페인과 정크푸드 섭취량은 줄고 집안일을 돕는 시간은 늘었으며, 스트레스도 훨씬 덜 받고 있었다.
-김은경, <습관의 말들>-
나 역시 그랬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나서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 집안일을 하는 시간이 늘어났고 스트레스도 훨씬 덜 받았다. 날 미친 듯이 괴롭히던 뒷 목 통증이 사라졌다.
<아침 일기>
나는 나다. 나는 나이기에 나는 나에 대해 잘 안다고 착각한다. 생각해 보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 기분이 어떤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 물어본 적이 없다. 생각보다 우리는 나에 대해 잘 모른다.
그리고 이 물음은 생각만으로 되지 않는다. 쓰지 않으면 물어볼 수 없고 쓰지 않으면 답을 할 수 없다. 쓰지 전까지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다.
'나'를 알지 못하면 '남'의 인생을 살게 된다. '나'를 알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일기를 쓰는 것이다. 한 지인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기를 쓰고 싶은데, 일기장을 열면 쓸 말이 없다고. 매일매일 특별한 일이 있는 게 아닌데 일기를 대체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다고. 일기는 있었던 일을 쓰는 게 아니다. 내 생각을 묻고, 내 생각을 쓰는 자리다. 일단 일기장을 열고 질문해 보면 일기를 쓸 수 있다.
책읽기, 달리기, 아침 일기는 날 수렁에서 건져주었다. 이 3가지 습관이 없었다면, 매일매일 남 탓만 하며 지옥과 천당을 오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