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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Aug 29. 2020

사람의 가치, 노동의 가치

좀 여기저기 많이 데리고 다니세요.
통제가 전혀 안 돼서 수업을 진행하기 힘들어요.


찐이의 언어, 인지 치료 선생님이 아내에게 한 말이다.


복지관 치료를 다시 시작합니다.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복지관 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만약 아이가 치료 중 변을 보았다면 밖에서 해결하실 수밖엔 없어요.


도대체 어쩌라는 말인가. 엄마들 사이에서는 캠핑카를 사서 복지관을 다녀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는 항의했다. 대책이 필요하다 말했다. 복지관의 팀장이라는 사람에게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그렇게 항의하시면 열지 말라는 말씀이세요?


그렇다.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위해 일을 하는 사람들조차, 이렇게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우리가 쓸모없는 너희들을 위해 호의를 베풀어 힘든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문을 열어 주었는데 무슨 불평불만이 그렇게 많니?


자격지심인가? 피해의식인가? 내가 못난 건가? 호의를 베베 꼬인 마음으로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가?



사람의 가치, 노동의 가치

경쟁사회에서 노동의 가치는 돈으로 매겨진다. 연봉 3천만 원짜리, 8천만 원짜리, 3억짜리로 사람의 가치가 정해진다. 연봉이 적으면 생산성이 낮고, 상대적으로 사회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높은 연봉을 받기 위해 스펙을 쌓는다. 내가 가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어떻게 해서든 입증해야 하기 때문에.


이 기준으로 보자면, 발달장애를 가진 우리 찐이는 가치 없다. 오히려 보호를 위해 비용이 발생하니 해를 끼친다. 배제하고 격리하고 결국 없애버린다. 만약, 장애인을 없애는 데 성공했다면, 그 후 어떻게 될까? 다음 격리 대상이 필요해진다. 돈으로 가치가 결정되는 경쟁사회에서 상대적으로 가치가 없는 사람은 항상 명확하다. 바로 당신이 다음 차례가 될 수도 있다.


사람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돈으로 교환할 수 있는 행위만이 가치 있는 일은 아니다. 육아나 집안일은 돈으로 바뀌지 않지만 가치 있다. 각종 취미 활동, 봉사 활동이 그렇다. '존재' 만으로도 가치 있다. 보건복지부의 공무원들, (언어, 감통, 특수체육 등) 교육 종사자들, 복지관의 직원들, 택시, 버스, 장애인 이동수단 등 모두 우리 찐이가 만들어낸 일자리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쓴 김원영은 골형성부전증으로 휠체어를 탄다. 연극배우이자 변호사이기도 하다. 배용진 작가의 <권리는 호의가 아니다>라는 책에 김원영 변호사의 인터뷰가 실렸다.



Q) '김원영'은 그대로 있고 장애만 빼낼 수 있다면

명확히 대답하지는 못하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모든 것이 똑같고 장애만 없앨 수 있다면 제거할 것 같다. 그런데 과거로 돌아가서 장애를 없앤다면 그 '김원영'은 다른 사람이다. 지금보다 훨씬 색깔 없고 재미없는 인간일 것이다. 추정컨대 세상에 피해를 주는 안 좋은 인간이 돼 있을 것 같다(웃음).




찐이는 '사람'이다.

그래, 니가 제일 행복하다.


회사에서 힘든 일을 겪고 오거나, 집에서 아내와 다투거나, 큰 아이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을 때 해맑게 웃고 있는 찐이에게 건네는 말이다. 이렇듯 가끔 나 조차도 찐이가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잊는다. 단지 나와 다른 개성을 가지고, 다른 특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자신만의 세계가 있고 그 안에서 살고 있는 다른 존재라는 생각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찐이를 이렇게 본다.

자신과의 경쟁 상대가 아닌 존재
단지 내가 호의를 베풀어 보호해야 하는 대상



나도 가끔 잊곤 하지만, 찐이도 나와 같은 사람이다. 매일매일 성장하고, 배우고, 웃고, 울고, 떼쓰고, 고마워하고, 때리기도 하고, 맞기도 하고, 남을 위로해주기도, 남에게 해를 끼치기도 하는 사람이다. 곱슬머리와 생머리가 같이 사는 것처럼, 사람들이 찐이와 그냥 함께 살기를 원한다. 머리가 큰 사람과 머리가 작은 사람이 개의치 않고 관계하듯 그냥 그렇게 살면 좋겠다.


이렇게 된다면 주변에서 장애인을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쉽게 장애인을 접할 수 없다면, 그건 우리의 눈빛 때문일 수도 있다. 그들을 가치가 낮은, 우리와는 다른 존재로 치부해버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장애가 아닌 사람을 보는 새 장애인 마크

원래 마크는 ‘장애인’이라는 사실에 방점을, 새 마크는 ‘인간’이라는 사실에 방점을 찍고 있다.


다운증후군 아들을 둔 보스턴의 미술운동가 사라 핸드렌(Sara Hendren)은 새로운 장애인 마크를 만들었다. 2009년 핸드렌은 함께 거리미술운동을 하던 고든대학 교수 브라이언 글레니와 함께, 새로운 장애인 마크를 기존 장애인 마크에 덧 붙이기 시작했다.


2014년 뉴욕에서 처음으로 이 마크를 공식 장애인 마크로 채택했다. 그 이후 콜로라도, 독일 등 에서 공식 마크로 채택 되었다. 또한 장애인을 뜻하는 'Handicaped'라는 단어는 과거 많은 장애인들이 손(hand)에 모자(cap)을 들고 구걸을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담고 있으니 쓰지 말고, 장애인의 접근이 가능하다는 뜻의 'accessible'이란 단어를 쓴다.


우리나라에서는 평창올림픽에서 장애인 편의시설 우수업소 공식 마크로 새로운 표식을 사용했다.


원래 마크는 ‘장애인’이라는 사실에 집중한다. 새 마크는 '사람'에 초점을 맞춘다. 원래의 마크가 장애인을 항상 수동적이고 불쌍하고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로 보았다면, 새 마크는 독립적이고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모습을 담았다.


표식의 변화처럼, 찐이의 장애에 집중하지 않고 찐이라는 사람에게 집중하는 변화를 바란다. 2009년에 만들어진 마크는 무려 7년이 지나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국제 장애인 마크는 아직 바뀌지 않았다. 마크하나 바꾸는 것도 이렇게 어렵다.


'그냥 그렇게 같이 사는 일'은 누군가에게는 무척 쉽지만 누군가에게는 평생 단 한번도 누리지 못하는 어려운 일이다. 온 세상의 우리 '찐이'에게 이 어려운 일을 선물로 주는 날이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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