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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Oct 10. 2020

클릭 Click 역량

법인 영업 부서에 7년 있었다. 내 경험 제일 중요한 건 '의사결정권자'다. 개인이 상대라면 의사결정권자가 바로 앞에 앉아있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 내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이나 서비스를 구매할 것인지 아닌지를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결정한다. 법인영업은 그렇지 않다.


의사결정권자는 보통 임원이나 회사의 대표다. 이들을 실무자가 만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소위 '급'이 맞아야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우리 쪽 임원이 떠야, 그쪽 임원이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영업이란, '의사결정권자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겨루는 싸움'라 봐도 무방하다.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내가 경험한 방법은 3가지 정도로 압축된다. 첫 번째는 내가 만나는 팀장, 과장 등 실무자를 '협력자화'해서 우리에게 유리한 부분을 강조하여 의사결정권자에게 보고하게 '만드는' 것이다. 실무자와 신뢰를 쌓는다. 쉽게 말하면 친해지는 시간을 갖는다. 신뢰 형성 후 우리 제품 혹은 서비스를 써야 함을 설득한다. 설득을 했다면, 그럴듯한 명분을 쥐어 줄 차례다. 명분이 좋을수록 의사결정권자를 설득할 가능성이 커진다.


두 번째는 의사결정권자를 직접 설득하는 방법이 있다. 의사결정을 하는 위원회가 구성되어 있거나 의사결정권이 분산되어 있는 경우다. 제안서를 제출하거나,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하는 경우 직접 설득한다. 이때 정보를 얻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에게만 알려주는 정보를 획득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세 번째는 의사결정권자의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방법이다. 내외부 인맥을 이용하는 방법이 대표적이다. 의사결정권자가 내 삼촌의 친구라거나, 우리 측 임원의 친구라면 일이 쉽게 풀릴 가능성이 크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 임원과 상대방 임원이 친해지면 된다. 이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골프'다.

 

이 세 가지 방법 중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다 중요하다. 세 가지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고 서로 보완적이다. 질문을 바꿔 세 가지 방법 중 가장 쉬운 방법이 무엇이냐 물어본다면 '인맥'이다. 우리 쪽 임원과 상대방 임원이 친하고, 이를 실무자가 알고 있다면 일은 쉽게 풀린다. 무조건 성공한다고 할 순 없지만, 항상 경쟁자보다 우위에 서서 대부분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된다.


의사결정권자끼리 서로 약속을 잡아 골프를 친다는 건 꽤 큰 일이다. 몇 억, 아니 몇 백억이 왔다 갔다 할 수도 있는 일이다.


이 골프가 날 힘들게 했다. 그 날 하루 속된 말로 '줘 털렸다.'


정식 업무는 아니지만 임원의 골프장을 예약하는 업무가 있다. 별거 아닌 듯 보이지만 스트레스가 엄청나다. 다행스럽게도 내 업무는 아니었는데, 동기가 교육을 가며 나에게 예약을 요청했다.


예약 방법은 이랬다.


10시에 해당 슬롯이 오픈된다. 경쟁자가 많으므로 9시 55분에 미리 로그인 해 놓는다. 새로고침 버튼을 눌러 지속적으로 화면을 업데이트한다. 10시에 해당 슬롯이 뜨면 클릭하여 예약한다.


쉽고 간단한 방법이다. 그런데 실패했다. BTS콘서트 티켓을 예매해 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이럴 듯했다. 약 1~2초의 시간 동안 수많은 동접자가 달려들어 클릭을 했고 난 0.1초 정도 늦은 듯하다.


자... 이제 보고다. 보고를 하러 임원실로 들어가려는 찰나 옆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부장님이 말했다.


 "이거 생각보다 꽤나 시리어스한 상황이야. 전무님이 잡은 골프 약속이면 거래처 사장님일 가능성이 크단 말이지. 그러니 보고하러 들어가서... 이런 말 조금 그렇지만 매우 잘못했다는 태도를 취하는 게 도움이 될 거야."


이게 뭔 개소린가 했지만, 부장의 경험을 무시하진 않기로 했다. 나보다 임원 보고가 10배는 많은 사람이니까.


임원실로 들어갔다. 최대한 죄송스러운 눈 빛으로 골프장 예약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임원의 얼굴 빨개졌다. 도대체 왜, 어떤 이유로 하지 못한 거 냔다. 죄송하다는 말이나 내 태도는 그의 화를 풀어주기에 부족했다. 죄송하다는 말 대신 왜 예약을 못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보란다. 도대체 뭘 어떻게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야 할지 어이가 없었지만... 난... 해냈다.


"5분 전에 미리 로그인을 해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예약 화면이 나오자마자 원하셨던 시간대를 선택하고 예약 버튼을 눌렀지만 실패했습니다."


보고를 하면서도 내가 도대체 무슨 보고를 하는 건지 헛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마스크의 힘을 빌려 넘어갔다. 여러모로 고마운 마스크다.


전무는 이 예약을 해본 적 있느냐고 물었고, 네가 버벅댄 거 아니냐는 의문점을 제시했다. '예약일이 화면에 뜨면 예약 버튼을 누르다'는 간단한 과정에 버벅이 낄 자리가 있을지 의문이라,  버벅대지는 않았다 답했고 그럼 '클릭 역량'이 떨어진다고 봐도 되는 말이 돌아왔다.

"클릭 역량"


다시 한번 헛웃음이 나왔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다행이었다. 다시 한번 마스크에 고마움을 표했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하는 골프장 예약을 너희는 왜 못했냐, 클릭 역량이 떨어진다, 이런 작은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너희들과 무슨 일을 하겠느냐, 이 골프가 얼마나 중요한 지 잘 알 텐데, 왜 좀 더 '잘'하지 못했느냐, 정말 실망스럽다, 등등 정신교육이 이어졌다.


서두에서 길게 말했지만 임원 간 골프는 중요하다. 그 중요성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난 '클릭 역량'을 키워야 하는 걸까? 회사는 도대체 나에게 뭘 원하는 건가? 난 어디까지 경쟁하고 얼마나 역량을 키워야 하는 걸까? 클릭 역량마저 최고가 되면 난 행복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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