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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Jan 12. 2019

#15 아내의 일상

[12주 차] 나는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아내의 하루

지금 이 순간 난 아내가 되어 보려 한다. 내가 그녀가 아니기에 조금 과장될 수도 사실과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건, 사실이던 아니던 내가 그녀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시도라는 것이다. 잘 될진 모르겠지만... 좋아! 시작해 보자.

자... 주문을 외워 보자.
야발라바히기야 핫!
(난 이제 그녀가 되었다.)

아침은 전쟁이다. 이 이상 내 아침을 잘 표현하는 낱말은 없다. 둘째 때문에 밤잠을 설쳤다. 일어나려 해 보지만 무거운 몸이 나를 침대로 잡아 끈다. 이대로 다시 잠들고 싶지만 가까스로 떨쳐내고 일어난다. 둘째가 전용 변기에서 엄마를 애타게 찾는다. 똥이 마렵단다. 말은 못 하고 엄마만 부르고 있다. 7살이 되도록 말을 못 하는 게 짠하다.


둘째 응가를 처리한다. 밥을 먼저 할까, 첫째를 먼저 깨울까. 고민이다. 첫째를 깨우는 건 너무 부담스럽다. 아침이라 짜증을 받아낼 마음의 그릇을 아직 준비하지 못했다. ‘그래 일단 밥을 먼저 하자.’ 오늘 메뉴는 어제 생각해 놓았던 ‘굴국’이다. 둘째가 잘 먹어 자주 하는 편이다. 밥을 짓고 무를 썬다. 찬물에 굴을 씻어 굴국을 끓인다. 겨울이라 손이 시리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시린 손으로 첫째를 깨우러 간다.


역시 짜증이다. 매일 아침 반복되는 이 짜증이 지겹다. '짜증 내지 않고 일어날 수는 없는 건가?' 신랑에게 하소연해보지만 자기도 어렸을 때 그랬다며 당연한 거라고 한다. 참고 견디란다. '내가 이런 말이나 들으려고 너한테 말한 거냐?'라는 생각이 든다. 연애할 때 몰랐던 게 한이다. 어렸을 때 우리 엄마는 깨워 주지도 않았다. 짜증을 내면 돌아오는 건 등짝 스매시였다. 너무 오냐오냐 키우는 거 같기도 하다.


첫째를 준비시켜 학교를 보내면 이제 둘째 어린이집이다. 차근차근 잘 따라와 주면 좋으련만 오늘은 웬일인지 똥을 한번 더 쌌다. 그것도 바지에다... 밥을 차려줘도 먹지를 않더니 속이 안 좋았나 보다. 한바탕 똥 빨래를 하고 나니 시아버님이 오실 시간이다. 시아버님이 매일 아침 어린이집까지 우리를 데려다주신다. 너무 감사하다. 아버님은 늦는 걸 매우 싫어하신다. 어제도 늦었는데 오늘도 늦으면 시아버님을 뵐 면목이 없다. 시간에 맞춰 나가고 싶지만 아이가 잘 따라 주지 않아 늦기 일수다. 조금만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는데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거다.


오늘도 역시 늦었다.

"둘째가 똥을 싸서요 죄송해요 아버님."

이렇게 말해보지만 싸늘한 정적이 흐른다. 둘째의 똥이 원망스럽다.


둘째를 간신히 어린이 집을 데려다주면 복지관 엄마들과 잠시 만난다. 정보공유를 해야 한다. 둘째는 발달장애가 있어 이런저런 치료를 많이 받는다. 치료, 특수 또는 일반 학교 진학, 심리, 장애인 정책에 대한 여러 정보가 엄마들의 입에서 한데 모아진다. 경험까지 어우러져 양질의 정보가 형성된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가끔씩 참여해 네트워크를 형성해 놔야 한다. 그리고 복지관 엄마들과 있으면 많은 위로를 받는다. 내 마음도 잘 알아주고, 서로서로 도움을 많이 주고받는다. 우리 모임의 이름은 '유니세프'다. 한 엄마가 이렇게 말한 데서 기인했다. "다른데 기부할 필요 없지 뭐! 우리끼리 이렇게 도우면 되지. 유니세프가 그런 거 아냐?"


최근 몸이 안 좋아져서 운동을 하고 싶다. 그러나 요새 운전을 배우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왼쪽 오른쪽이 헷갈렸다. "좌회전!"이라고 누군가가 외치면 어느 쪽인지 헷갈린다. 긴박한 상황이 닥치면 머릿속이 하얘진다. 그래서 평생 운전을 안 하려 했지만 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있더라. 내가 운전이라니… 내가 운전이라니...

신랑과 아버님은 그것도 못하냐며 쉽게 쉽게 이야기 하지만 나에겐 인생 최대 사건이다. 쉽게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라고 말하는 신랑과 아버님에게 서운한 감정이 생긴다. '기필코 운전을 마스터해서 코를 납작하게 해 줘야지'같은 종류의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그냥 무섭기만 하다. 운전연수를 마치니 1시가 다 됐다. 오늘도 점심은 먹지 못할 거 같다.


첫째가 학교에서 돌아온다. 바로 학원으로 가면 좋으련만 그렇게 하기엔 너무 피곤하단다. 집에서 쉬고 가고 싶다고 한다. 바로 학원을 가면 내 시간이 생겨 카페에서 수다라도 좀 떨며 스트레스를 풀 텐데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집으로 돌아와 밝은 모습으로 첫째를 맞이 한다. 간식을 주고 학원을 보낸다. 쉴 틈도 없이 둘째를 데리러 간다. 오늘은 둘째의 운동 치료가 있는 날이다. 선생님 말로는 인지가 많이 늘었다고 한다. 규칙도 조금 지키는 모습을 보였다. 모방 능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오랜만에 듣기 좋은 소식에 절로 웃음이 난다.


집으로 돌아오니 5시가 넘었다. 첫째가 오기 전 조금 쉬고 싶지만 둘째가 그림을 그려달란다. 삐비(비행기), 끼하(기차), 빼(배)를 그려달라고 한다. 힘들지만 스케치북에 슥슥 그리며 아이와 상호작용을 한다. 그래도 나와 함께하는 그림 시간 덕분에 아이의 인지 능력이 많이 향상된 것 같아 뿌듯하다. 힘내야지.


남편에게 카톡을 보내본다. '오늘 늦어?' 남편에게 전화가 온다. 불길하다.


팀장님이 저녁 먹자는데...
그놈의 팀은 맨날 회식이야?
그럼 그냥 갈까?
술 먹고 싶어서 전화한 거 아니야? 다 정해 놓고 무슨 전화야? 마음대로 해!


이렇게 전화를 끊고 나니 마음이 편치 않다. 나도 그냥 쿨하게 허락해 주고 싶은데 잘 안된다. 오늘 하루도 조금도 쉴 시간 없이 긴박하게 돌아갔다. 너무 힘들어서 기분 좋게 술자리를 허락해 줄 여유가 없다. 남편도 힘들겠지만 내가 더 힘들다. 이건 팩트다.


남편에게 문자가 왔다. '팀장님이 말하는 거라 그냥 가기 뭐하네... 밥만 먹고 빨리 갈게. 미안해.'

'이렇게 까지 말했는데 혹시 그냥 오지 않을까'라고 잠시나마 생각한 내가 미친년이다. 매일 밥만 먹고 온다지. 우리 남편은 밥을 자정까지 먹는다. 이런 문자가 오는 날이면 항상 새벽에 술이 취해서 들어온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는다. 나만 희생하는 것 같아 너무 가슴이 아프다. 눈물도 나지 않는다. 이놈의 세상, 다 사라졌으면 좋겠다.


첫째가 날 안으며 쳐다본다. 둘째가 초롱한 눈으로 날 쳐다본다. 그 눈을 보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머리 끝까지 치솟는 화를 그 눈이 눌러놓는다. 밥을 한다. 저녁을 먹는다. 둘째를 재운다. 첫째를 재운다. 씻지도 못하고 잠든다. 내일 숙취에 헤롱 헤롱 댈 남편의 모습이 꿈에 나타날까 무섭다.


결심

아내가 되어 상상으로나마 하루를 살아 봤다.

힘들고, 답답하고, 서운하고, 억울하다. 왜 나만 희생해야 하는 건지, 이놈의 세상이 글러먹은 건지, 세상이 나에게만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모든 게 원망스럽다.

아내의 하루를 상상해 보면서 이런 감정을 고스란히 느꼈다.


이 글을 쓰면서 아내를 조금 알 것 같았다. 눈시울도 붉어졌다. 아내를 도와줘야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을까?


그녀도 꿈이 있다. 화가가 되고 싶었고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었고, 한복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그녀도 직업이 있다. 잘 나가는 공무원이고, 그 누구보다 승진도 빨리 했다.


그 누군가의 아내, 엄마가 아닌데, 나는 아내에게 '여자'라는 이유로, '엄마'라는 이유로 육아를 강요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강요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속이고 설득했다. 난 좋은 남편, 좋은 아빠라고.


아직도 난 멀었다. 도와준다니... 누가 누구의 무엇을 도와준다는 말인가? 내가 아내의 육아를 도와준다는 말인가? 회사에서 공동 업무를 하면서 도와준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상사의 지시로 두 사람이 함께 경쟁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들게 되었다. 이때 파트너가 집에 가면서 '미안해, 내일은 더 도와줄게'라고 말한다면 바로 '미친놈!'이라는 말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육아는 아내의 일이 아니다. 내 일이다. 파트너와 함께 하는 공동 작업이다. 난 그동안 내 일을 와이프에게 맡겼던 거다. 아내는 그동안 내 일을 대신하느라 자신을 희생했다.


결심했다. 내 일을 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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