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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Mar 31. 2021

나는 네 인생의 토핑이야

아보카도 덮밥

아보카도 덮밥은 내가 했던 요리 중에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요리다. 파프리카 간장 양념장과 함께 내놓으면 한 그릇을 금방 비운다. 어제는 퇴근했더니 이미 다들 저녁을 먹은 터라, 간단히 아보카도 덮밥을 만들어 먹기로 했다.

오이 고추 토핑을 올린 버전은 사진을 찍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올린 토핑이라 그렇다. 즉흥적인 작곡이 차트를 1위하는 것 처럼 즉흥적인 토핑이 더 맛있다.

아보카도를 손질하여 따뜻한 밥 위에 올린다. 간장과 시럽을 2:1로 넣고 파프리카를 쫑쫑 썰어 넣어 양념장을 만든다. 쓱쓱 비벼 입에 넣으면 아보카도의 부드러움과 간장에 흠뻑 빠진 파프리카의 달콤 짭짤 시원한 맛이 입안에 퍼진다. 절반 정도 먹었을까, 방금까지 배가 아프다던 아내가 자기도 한 입 먹어도 되냔다. 숟가락을 건넸고, 실수임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아내는 다섯 입을 먹었고 밥그릇은 텅 비어있었다.


그냥 먹어도 이렇게 맛있는 아보카도 덮밥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물론 배고플 때 먹으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겠으나 이는 다른 음식에도 적용되기에 패스). 바로 '오이 고추' 토핑(오고토핑)을 올리는 것.


오이 고추를 잘 씻고 얇게 썰어 아보카도 덮밥에 올리면 아삭한 식감이 아보카도의 맛을 올려준다. 아보카도의 느끼함을 오이 고추의 아주 약간의 매운맛이 잡아버린다. 양념장의 달콤 짭짤한 맛과 오이 고추의 청량함이 잘 어우러진 어울림 마당에서 아보카도가 미끄덩거리며 춤을 춘다. 숟갈도 덩실덩실 춤을 추며 밥을 퍼 입으로 총알 배송한다.


'오이 고추' 토핑

오고토핑은 카레와도 잘 어울린다. 아이들 덕분에(?) 항상 부드럽고 달콤한 카레를 만든다. 카레에 우유를 첨가하여 부드러움을 높이기도 한다. 아이들은 좋아하지만 어른 입맛에는 매운맛이 없기 때문에 개운한 맛이 떨어질 수 있다. 이를 단번에 해결해 주는 것이 바로 이 '오이 고추'다.


카레는 라면보다 귀찮을 뿐 전혀 어렵지 않다. 라면의 귀찮음 버전이라고나 할까? 잘 달궈진 팬에 기름을 듬뿍 뿌리고 파를 아주 많이 넣고 파 기름을 낸 후 야채를 볶거나, 편 마늘을 기름에 살짝 튀긴 후 카레에 뿌려주면 평범한 카레의 맛이 업그레이드되긴 한다. 그러나 "그냥 카레 만들기도 귀찮은데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면 야채를 볶을 필요도 없다. 물 500m를 넣고 야채를 잘라 넣은 후 야채가 익으면 카레가루를 넣으면 된다.


귀찮긴 하지만 파 기름을 내거나 편 마늘을 튀겨내면 뭔가 있어 보이기 때문에 난 귀찮음을 택했다. 편 마늘 까지는 아니라도 파 기름 낸 후 야채를 볶았고 감자 대신 단호박을 넣었다. 단호박을 넣으면 카레는 더욱 달콤하고 부드러워진다.


물을 넉넉히 넣고 밥을 짓는다. 찰현미를 섞어주면 더욱 쫄깃한 밥이 되는데, 카레와 은근히 잘 어울린다. 넓은 그릇에 밥을 담고, 그 위에 카레를 올렸다. 식탁에서 오랜만에 TV를 보며 먹으려 하는데 아내가 오이 고추를 넣어 보잔다. 음... 꽤 괜찮은 생각이라 대꾸한 후 오이 고추를 잘라 토핑으로 올렸고 우리는 탄성을 질렀다.


아삭아삭 오이 고추의 식감이 식욕을 자극했다. 단호박 때문에 조금 퍽퍽할 수 있었지만 오이 고추의 청량함이 이 답답함을 해소해주었다. 카레의 짭짤한 맛과 너무 부드러워 느끼한 맛을 오이 고추가 중화시켰다.


알리오 올리오에도, 짜장에도 오고토핑은 아주 잘 어울렸다.

(좌) 짜장면을 빙자한 짜장소면 (좌)알리오올리오를 빙자한 고추가루 파스타


나는 네 인생의 토핑

오이 고추는 보통 된장을 찍어 먹었다. 장아찌 간장에 담가 놓았다가 밥반찬으로 먹기도 했다. 아보카도와도 카레, 짜장, 파스타와도 잘 어울리는 오이 고추는 토핑으로도 손색이 없었다. 오이 고추는 메인 요리로도 토핑으로도 아주 좋은 식재료다.


생각해 보니 카레도 부침개에 토핑처럼 넣으면 부침개의 감칠맛을 돋궈준다. 아보카도도 샐러드에 토핑으로 넣거나 짜장에 잘라 얹어 먹어도 매우 훌륭하다. <기생충>에 나온 채끝살 짜파게티도 그랬다. 메인 디쉬의 최강자 채끝살은 짜파게티의 토핑으로도 손색이 없었다. 짜파게티의 맛을 해치치 않으며 맛에 중량감을 더해줘 토핑의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


오이 고추 토핑이 올려진 카레를 먹으며 아이들의 얼굴을 봤다. 아이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메인 디쉬다. 지금도 그들의 삶을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 누구의 삶이 아닌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난 '토핑'이다. 아이들이라는 메인 디쉬 위에 살포시 내려앉아 그들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아내의 인생에도 '남편이라는 토핑이 올려진다. 서로 내가 메인 디쉬라며 싸우기도 하지만 이제 서로의 토핑이 되는 삶이 뭔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기꺼이 서로의 토핑이 되어준 덕분에 인생이 다채롭다. 오고토핑이 아보카도와 카레의 새로운 맛을 이끌어 낸 것처럼 말이다.


아내와 아이들 역시 내 인생의 토핑이다. '나'라는 메인 디쉬 위에 '아내'라는 토핑, '아이들'이라는 토핑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혼자서 살아가다 자칫 가벼워질 수 있는 내 인생에 묵직한 중량감이 생겼다. 여기저기에서 바람이 불어와도 난 흔들리기 않는다. 며칠 전에 만든 단호박 크림 수프처럼, 너무 느끼해서 몇 숟갈 입에 넣지 못할 수 있었던 내 인생에 청량감과 깔끔함을 더해주었다. 난 질리지 않고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다.


난 메인이야? 토핑이야?

도대체 난 메인 디쉬인 거냐? 토핑인 거냐? 이러다 그냥 토핑으로만 살다 인생 끝나는 거 아니야?


뭐... 그럴 수도 있지만, 메인 일지, 토핑 일지 고민할 필요는 없다. 양자역학에서 원자는 입자이자 파동이다. 누가 보면 입자처럼 행동하고 누가 보지 않으면 파동이 된다. 우리 몸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원자가 상반되는 2가지 성질을 지니고 있듯 우리도 그렇다. 우리는 메인이며 동시에 토핑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어디서 약을 파냐고? 이렇든, 저렇든, 어쨌든, 저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최소한 우리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메인인지, 토핑인지가 아니라 메인이어도 즐겁고, 토핑이어도 행복할 방법이다.


오늘 식탁에 앉아 '오이 고추' 토핑이 뿌려진 아보카도 덮밥을 한 숟갈 가득 떠 입 안에 넣고, 입 안에서 어우러지는 오이 고추와 아보카도 그리고 양념장과 함께 부서지는 밥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면, '메인이어도 즐겁고, 토핑이어도 행복할 방법'이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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