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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밤, 10시 39분, 은평 한옥마을, 난 혼자다

찐이의 각성.. 어떡해야하지...

by 성실한 베짱이

밤 9시 20분. 눈 앞이 얼룩져 운전이 쉽지 않았다. 보는 사람이 없어 입에서는 '꺼이꺼이' 소리가 나왔다.


도착한 곳은 은평 한옥마을 채효당이다. 고풍스러운 한옥에서 1박을 묵고 갈 예정이다. 능숙하게 공터를 찾아 능숙하게 차를 대고 능숙하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고 들어간다. 능숙하게 이층으로 올라 능숙하게 수건이 놓인 장의 문의 연다. 단번에 화장실을 찾아내곤 볼 일을 보고 샤워를 한다. 능숙하게 서재 책상에 맥북을 올려놓고 글을 쓴다.

채효당

불과 몇 시간 전에 난 채효당에 있었다. 공터를 찾아 헤매다 공영 주차장에 차를 댔고, 채효당이 어딘지 몰라 다른 집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문자로 온 비밀번호를 한 번 더 확인한 후 문을 열었으며, 조심스레 문을 열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았다. 이렇게 도착했던 한옥 게스트 하우스에서 2시간 만에 둘째 찐이를 안고 나와 다시 집으로 갔다.


안고 가는 동안 찐이는 거침없이 날 때렸다. 머리를 때리고 뺨을 때리고 눈을 찔렀다.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찐이는 조금 각성된 상태였다. 엄마의 새 옷을,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곤 했다. 한옥마을에 도착해서는 마음대로 뛰어갔다. 찻길과의 경계가 모호한 곳이라 얼른 뛰어가 아이의 손목을 잡아챘다. 찐이는 소리 지르며 주저 앉았다. 손목을 비틀어 빼내려 했다. 누나와 손을 잡고 뛰어가다 누나를 때리고 잡아당겼다. 다시 누나를 꼭 껴안고 손을 잡다가도 누나에게 발길질을 해댔다. 본인도 어찌할 바 모르는 듯했다.


어찌어찌 아이를 데리고 채효당에 들어섰다. 내부 계단을 올라가니 사진을 보고 상상했던 것보다 좁았다. 길쭉한 방이 4칸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오른쪽은 서재, 제일 왼쪽은 안방인 듯했다. 낯설고 꽉 막힌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찐이는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소리를 지르고 웃다 울다 이 방 저 방을 뛰어다녔다.


아내는 숙소가 왜 이리 좁은지, 문은 왜 열리지 않는지 불만이었고 찐이가 이것 저것 만지고 부술까봐 전전긍긍했다. 이런 아내에게 큰 아이 빤뽀는 엄마 제발 불평불만은 그만 하고 오늘 한번 잘 지내보잔다.


각성이 올라간 찐이를 데리고 채효당으로 오는 내내 빤뽀는 잘해보려 애썼다. 평소와는 달랐다. 찐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주려 했고, 찐이에게 던지는 말과 행동에는 웃음과 사랑 그리고 친절이 담겨 있었다. 찐이가 소리를 지르고 때릴 때도 짜증을 내거나 함께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한옥 숙소에 도착해 빤뽀에게 숙소가 어떤 지 물었다. 빤뽀는 너무 마음에 든다고 하더라.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이는 집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내가 실망할까 너무 좋다고 대답했다.


서재에 세팅되어 있는 다기 세트를 보고 찐이랑 같이 마시면 깨질 수도 있겠다, 라고 어른스럽게 말했다. 찐이를 달래보려 차분하게 만들기 위해 말도 걸고 안아 주었다. 빤뽀는 온 힘을 다해 애쓰고 있었다. 나도 몆 번이나 참지 못하고 온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고 싶었던 상황이었다.


아내의 입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는 소리가 나왔다. 빤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왜 찐이만 맞춰주냐며, 제발 그만하라며 나에게, 아내에게, 찐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빤뽀는 집으로 가겠다며 계단을 내려갔다.


"너가 장애인이라고 다 너 한테 맞춰줘야 하는 거야!?"
"나는 너를 죽이고 싶어!"
"나도 정말 죽고 싶다고! 나 죽으면 엄마가 책임 질거야!"


1년 6개월 만에 떠나는 여행이었다. 성동구에서 은평구로 가는, 여행이라 부르기에 민망할 수도 있지만 여행이라 생각했다. 밝은 분위기로 가족여행을 가기 위해 무던히 애썼던 빤뽀였다.


가슴에 가습기가 있는 건가? 습기인지 연기인지 모를 안개가 가슴에 가득 찼다. 걷어내고 싶었지만 통 나가질 않는다. 아무래도 이 연기가 나갈 곳은 눈뿐인 듯 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니 찐이는 안정을 찾았다. 요새 정말 애정 하는 삼양 비건 라면을 2개 끓였다. 아내도, 빤뽀도, 나도, 요새 이 라면의 힘으로 살아나간다. 지금도 그 힘이 필요하다.


"아빠! 왜 울어! 응!"
"왜 울긴, 아빠가 우리 집에서 제일 감상적이잖아!"


힘든 하루였다. 그래도 다 같이 모여 라면을 먹으니 힘이 난다.


아내는 돈 낸게 너무 아깝다며 나에게 한옥 숙소로 갈 것을 명령했다. 가서 글도 쓰고 편하게 잠도 자란다. 라면에 눈물을 말아먹고 집을 나섰다. 사실 밥도 말아 먹긴 했다.


<모두 다 꽃이야>
산에 피어도 꽃이고 들에 피어도 꽃이고
길가에 피어도 꽃이고 모두 다 꽃이야
아무데나 피어도 생긴 대로 피어도
이름 없이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
봄에 피어도 꽃이고 여름에 피어도 꽃이고
몰래 피어도 꽃이고 모두 다 꽃이야
아무 데나 피어도 생긴 대로 피어도
이름 없이 피어도 모두 다 꽃이야

요새 찐이의 최애곡이다. 우리 찐이도 꽃이다. 산이건, 들이건, 이름이 있건 없건, 몰래 피어도, 아무 데나 피어도 찐이는 꽃이다. 너와 나와 같은 꽃이다.


"빤뽀, 오늘 참 속상하다. 빤뽀가 정말 애쓴 거 느꼈어. 고마워. 감동했어."
"난 항상 감동이거든~"
"아직도 찐이 죽이고 싶어?"
"ㅋㅋㅋ 무슨 소리야~! 나 그런 소리 한적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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