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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화가 나는 이유; 마음의 여유 공간을 넓히는 방법

by 성실한 베짱이

"야!"

"왜!"


오늘 아침 큰 아이(빤뽀)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이는 0.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되받아쳤다. 소리를 지르며 이유를 물었다. 자기를 왜 불렀냐고.



아내가 복직한 5월부터 내 아침은 이렇게 돌아간다.


5시에 일어난다.

나만의 시간을 1시간 30분 정도 갖는다.

둘째 찐이가 일어난다. 똥! 하는 외침과 함께.

밥을 안치고 아침 상을 차린다.

밥을 다 먹고 찐이에게 묻는다. "아빠가 이빨 닦아줄까? 아니면 찐이가 닦을래?"

그럼 찐이는 "찐이!"하고 대답한다.

이빨을 다 닦으면 7시 30분. EBS를 틀면 월화는 두다다쿵, 수목은 뽀로로를 한다.

그 사이 아이 옷을 입히고 집안을 정리한다(집안 정리는 못 할 때가 많지만).

8시 정도 첫째 <빤뽀>를 깨운다.

빤뽀 밥을 따로 차려 놓는다.

빤뽀가 등교 준비를 마치면 8시 30분에 함께 학교로 출발한다.

교문 앞에서 실무사 선생님께 찐이를 부탁하고 출근한다.


예전과는 다른 패턴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이니, 고단한 것이 당연하다. 이 정도면 잘 적응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영 적응되지 않는 것이 있다. 큰 아이 <빤뽀>의 밥을 따로 챙겨주는 것.


정확히 말하면 "한 번 차리기도 힘든 아침밥을 두 번 차리는데, 선호하는 메뉴가 달라 고민 고민해서 다른 종류로 차려놓은 아침을 한 숟갈도 뜨지 않고 그냥 학교에 가버리는 아이를 보는 것'에 영 적응되지 않는다.


평소 아이는 키가 크지 않으면 어떡하냐고 걱정을 달고 산다. 키 크는 법은 잘 먹고, 잘 자고, 운동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이 3가지를 다 해도 안 크면 그건 유전이라고 아무리 말해줘도 밥을 잘 먹지 않는다.



부모의 욕망 vs 아이의 욕망

"아침밥" 을 사이에 두고 오늘 2개의 욕망이 부딪혔다.

(부모의 욕망) 아이에게 아침밥을 먹이고 싶다. 그래서 아이가 학교에서 배가 고파 집중력을 잃는 것도, 영양이 부족해 키가 크지 않는 것도 막고 싶다.
(아이의 욕망) 아침밥을 먹어야 한다는 건 알겠다. 근데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밥이 들어가지 않는다. 자꾸 먹으라고 하니까 더 먹기 싫다.



밥을 차려놓고 아이를 깨운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을 줍는데, 뜨끔하다. 젠장. 허리다. 본격적으로 달리기를 해보려 했는데 허리가 아프다니... 불쾌하다. 큰 일은 아니길 빌며 다시 빨래를 집어 들었다.


콩나물 무침을 잘게 잘라 밥에 넣고 간장과 참기름을 넣고 비빈다. 메추리알 세 알을 밥 위에 올려 단백질을 추가해 영양에 빈틈을 메운다. 이걸 먹고 학교에 가면 든든할 거다. 아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니 잘 먹겠지...


5분 후, 아이는 한 숟가락도 뜨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 빤뽀야, 아침 안 먹을 거야?

- 하..... 아니야 먹을게.

- 아니야. 먹기 싫음 안 먹어도 돼.

- 아... 아니라고! 먹는다고!

- 아니야 진심이야! 먹기 싫음 먹지 마.

- 밥은 맛있는데, 정말 밥이 입에 안 들어가! 힘이 하나도 없어서 못 먹겠다고!


난 밥을 가지고 싱크대로 간다.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밥을 버리며 이렇게 말한다.

- 이제 아침은 준비하지 않을게.

- 그럼 그러던가!


참고 참았던 짜증이 차오른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공간이 있다던데, 이 때는 조금의 공간도 없이 화가 튀어나온다. 난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아이는 나에게 소리를 지른다. 눈을 똥그랗게 뜨고 매서운 얼굴로 날 쳐다본다.


내가 소리를 지르면 대부분 눈물을 흘렸던 아이였다. 울지는 않더라도 삐져서 자기 방에 들어가는 정도로 반응하곤 했다. 그랬던 아이가 나에게 소리를 지른다. 두 손을 불끈 쥐고 눈을 무섭게 뜨고 날 째려본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화내는 아이의 표정이 너무 과장되고 웃겨 웃음이 터질 뻔한다. 웃음을 꾹 참고 나니, 처음으로 대드는 모습에 당황한다. 아빠에게 하는 태도가 너무 예의 없는 것 같아 화가 올라온다.


화난 눈으로 5초간 눈빛 교환을 마치고, 난 아무 말 없이 싱크대로 돌아선다. '아빠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네가 아침을 안 먹으니 아빠가 화를 낸 거지!'라는 클리셰 덩어리가 떠오르지만 다행히 입 밖에 내지 않는다.



내가 화가 난 이유

찐이는 소리 지르는 아빠와 누나를 보며 더 불안해한다. 그렇지 않아도 학교 가는 걸 불안해하는 찐이다. 불안감을 줄이기 위해 학교 가는 길에 학교 후의 일정을 수십 번 묻지만, 오늘은 한 번도 물어보지 않고 내 눈치만 본다. 교문 앞에 선 아이의 눈에서 지난 주보다 3배는 큰 불안이 보인다.


빤뽀는 현관문을 열고 함께 집에서 나왔다. 그러나 나와 찐이를 기다리지 않고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학교로 가버렸다.


왜 이렇게 된 거지?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난 왜 소리를 질렀지? 뭐가 이렇게 날 화나게 만들었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아이에게 아침밥을 먹이고 싶다는, 아이를 건강하게 만들고 싶다는 내 욕구 속의 진짜 욕구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본다.


난 아이를 내 마음대로 하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아이를 움직이고 싶었지만 아이는 내 말을 따르지 않았다. 이 욕구가 좌절되었기 때문에 난 화가 났다.


난 내 노력을 인정받고 싶었다. 아침에 2가지 종류의 아침을 따로 차린 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다. 이 노력은 아이가 밥을 맛있게 먹음으로써 인정받을 수 있다. 난 내 인정 욕구를 채우지 못했다.


아이의 키, 영양, 집중력을 위해서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봐도 <아이를 내 마음대로 하려는 욕구>, <인정 욕구>라는 2가지 욕구가 충족되지 못했기 때문에 난 화가났고,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게 본질이다.



알아차림과 반성

알아차림은 마음에 짜증이 '욱'하고 올라오는 순간, 그 감정을 바라보는 것이다. 알아차림이 습관이 되면 몸이 반응하기 전 내 감정을 알아차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 공간이 커진다. 오늘처럼 몸이 즉각 반응을 내놓지 않게 된다.


반성은 일이 벌어진 후,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내가 했던 행동을 바라보는 것이다. 내가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든 것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 발 떨어져 생각해본다.


오늘 아침, 난 내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음의 여유 공간이 좁아서 알아차릴 새도 없이 감정이 넘쳐버렸다. 이미 다른 부정적인 감정이 쌓여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때 그때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버리지 못한 탓이다.


'욱'하는 순간 짜증과 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반성을 해 본다.


내가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원인은 아이에게 있지 않고 내 욕구의 좌절에 있음을 되뇐다. 아이를 내 마음대로 하려는 욕구는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본다.


'인정'은 결과다. 결과는 얻는 순간 과거가 되며, 바라는 순간 미래가 된다. 결과는 절대 현재가 될 수 없다. 인정 욕구를 채우기 위해 살면, 과거에 갇혀 현재를 살지 못하고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한다.


밝은 얼굴로 집으로 돌아가 아이에게 사과한다. 미안하다고. 그리고 함께 요새 아이가 즐겨 먹는 '레드망고 요거트 빙수'를 하나 시켜먹자.


요거트 빙수.jp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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