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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Oct 24. 2021

찐이의 작은 냄비

장애를 고치려 애쓰지 않기

장애를 고치려 애쓰지 않기

침대에 누워 TV를 켠다. 웃고 떠드는 아이와 아빠의 모습이 보인다. 슈퍼맨이 돌아왔나 보다. 그 모습이 불편해 채널을 돌려보지만 이 불편함을 없애줄 프로그램은 없는 듯하다. 눈물을 흘릴 정도로 배를 잡고 한바탕 웃어젖히면 좋으련만 이미 불편해진 마음은 다시 돌아올 줄 모른다. 


TV를 끄고 단톡방의 메시지를 본다. 친구가 아이와 캠핑을 갔다며 사진을 참 많이도 올렸다. 계곡에서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의 모습을 참 정성스럽게 찍고 심혈을 기울여 골라 단톡방에 올렸다. 과식을 하지 않았지만 명치끝이 답답하다.


사무실도 답답하다. 잠시 산책이 필요하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문이 열리길 기다린다. 우연히 만난 타 부서 부장님이 결혼은 했냐, 아이가 몇이냐, 몇 살이냐 묻는다. 야... 이제 다 키웠네. 걱정이 없겠어! 일찍 결혼해서 아이까지 다 키워 놓고 말이야!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나에게 말을 건넨다. 꿀밤이라도 한 대 주고 싶다.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는 찐이는 8년을 키워도 힘들다. 성인이 되어서도 많은 부분을 챙겨주고 도와주어야 할 거다. 이제 다 키웠다느니, 걱정이 없겠다느니 따위의 말을 들으면 부아가 치민다. 너네가 뭘 안다고 떠드냐고 쏘아붙이고 싶다.


나도 다 키워놓은 애들을 옆에 두고 편안하게 걱정 없이 지내고 싶다. 그러려면 찐이의 장애를 치료해야만 한다. 어떻게 하면 아이가 말을 할까? 언어치료를 더 늘려야 할까? 인지의 문제이니 인지 치료를 늘릴까? 인지를 늘리려면 감각이 중요하니 감통 수업을 늘려야 하나? 감각도 대근육 발달이 우선이니 체육 수업을 늘릴까? ABA라는 게 있다던 데 그걸 한 번 알아볼까? 조금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언어치료가 효과가 좋다는 데 그것도 한 번 알아봐야 하나?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8년간 했더니 그래도 하나는 알게 되더라. 장애는 '제거'하는 게 아니다, 라는 사실을.

이자벨 카리에의 <... 아나톨의 작은 냄비 La petite casserole d‘Anatole>라는 책이 있다. 아나톨은 작은 냄비를 몸에 달고 태어났다. 땅에 질질 끌리는 무거운 냄비는 아나톨을 불편하게 만든다. 불편한 냄비를 달고 다니는 아나톨을 사람들은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따돌리고 무시하고 차별한다. 아나톨은 결국 숨어버리기로 했다. 그러면 편해질 것 같았으니까.


https://youtu.be/PxyAzNtdo38


다행히 세상에는 아나톨 자체를 봐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아나톨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고 냄비를 가진 채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냄비를 가지고 노는 방법을 알려주고 냄비를 넣어 편하게 다닐 수 있는 가방을 만들어 주었다. 아나톨은 가방에 냄비를 넣고 친구들과 마음껏 뛰어놀 수 있었다.



찐이의 냄비

찐이도 작은 냄비를 하나 달고 세상에 나왔다. 냄비 때문에 찐이는 불편하다. 아이가 가지고 있는 이 불편함을 병이라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든 그 병을 치료해 주는 게 부모의 당연한 의무라 여겼다. 아이보다는 냄비에 집중하고, 어떻게 해서든 냄비를 끊어주려 했다. 그게 아이를 위한 일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진짜 끊어야 했던 건 장애를 병으로 보는 내 생각이었다. 진짜 끊어야 했던 건 냄비만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었다. 진짜 끊어야 했던 건 장애를 극복해야만 하고 완전히 고쳐야만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었다. 진짜 끊어야 했던 건 장애인을 자신도 모르게 차별하고 혐오하는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인식이었다.


다행이다. 아나톨이 나에게 작은 냄비를 보여준 이후로 난 더 이상 찐이의 장애를 고치려 애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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