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퇴를 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아내가 웃으며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칼퇴를 한 너에게 선물이 있다! 짠!
펭수 마카롱. 맛있다. 반을 베어 무니 보기 조금 힘들어 입에 털어 넣었다.
펭수 마카롱을 내놓는다. 펭수를 좋아하는 날 위해 준비했단다. 난 펭수를 좋아한다. 펭수 유튜브를 보며 설거지를 하고, 출퇴근 길에 새로운 영상이 없나 검색해 본다. 펭수 마카롱까지 먹었으니 여한이 없다. 물론 한 입 베어 문 마카롱을 보는 건 힘들었다.
난 살면서 무언가에 꽂힌 적이 별로 없다. 그러나 펭수는 달랐다.
'기며니' 작가의 '펭수는 자폐아를 닮았다.'
'기며니' 작가의 브런치 글 '펭수는 자폐아를 닮았다.'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기며니 작가는 펭수의 행동이 자폐아동, 발달장애아동과 닮아 있다고 한다. 시선이 없는 눈, 공공장소에서 소리 지르기, 큰 소리로 흥얼거리는 멜로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과격한 행동들이 그렇다.
작가는 펭수를 보살피는 EBS 제작진과 발달장애아동의 부모를 대비시킨다.
커팅식에서 가위를 집어던지고, 뽀로로 인형을 쳐서 떨어뜨리고, 매니저를 발로 찬다. 제작진은 펭수가 이러한 행동을 보였을 때 미안해하지 않는다. 당당하다. 사람들에게 설명한다. "펭수는 열 살이라 아직 금전 개념이 없고 회사의 직급체계를 몰라요", "지금은 펭귄어를 하는 거예요!"
기며니 작가는 이러한 제작진 덕분에 사람들은 펭수를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백점 만점에 천 점짜리 발달 장애인 활동 보조자의 모습'이라고 했다.
내 아들은 펭수
내 아들 찐이는 발달장애아동이다. 9살이지만 말을 잘 못 한다. 단어나 문장 몇 개를 사용할 뿐이다. 그마저도 부모가 아니면 알아듣기 힘들다. 그래서 난 펭수가 좋았나 보다.
찐이는 과하게 즐겁다. 누군가 자신의 뒤에 줄을 서거나, 쫓아오는 것을 좋아한다. 보통 좋아한다고 하면 깔깔대고 웃는 정도인데, 찐이는 주체할 수 없어 자리에 주저앉으며 숨이 넘어갈 듯 웃는다. 과한 즐거움은 놀이를 방해한다.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행동이 과격하다. 찐이는 선천적으로 자신의 몸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능력이 부족하다. 상대방을 쓰다듬는 행동, 잡는 행동이 아이들을 밀거나 꼬집는 행동으로 비칠 수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면 심하게 소리를 지른다.
종합해보면 이런 상황이 연출된다. 찐이는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에게 자신을 쫓아오라고 말한다. 아이가 자신을 쫓아오면 찐이는 자리에 주저앉으며 숨이 넘어갈 듯 웃는다. 아이가 이상함을 느껴 더 이상 쫓아오지 않으면 찐이는 소리를 지른다. 많은 시선이 찐이에게, 나에게 꽂힌다.
찐이와 밖으로 나가는 일=전쟁
찐이의 이런 특성 때문에 함께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큰 결심이 필요하다. 기며니 작가의 말처럼 전투를 하러 나가는 군인의 심정으로 나간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잘 피한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사과' 수류탄을 가슴에 꼭 몇 개 달고 나간다. 이 수류탄을 쓰는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보통 못해도 하나 정도는 쓰는 듯하다.
소리를 지르고 자리에 주저앉는 찐이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다. 찐이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이 밉기도 하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1~2년 전만 해도 난 꼭 선글라스를 끼고 나갔다. 시선을 맞았을 때의 당혹감과 분노를 감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장애 앞에 당당하려 애쓰지 않는 법
한국사회는 격리에 능하다. 사회적 약자에게는 더욱 가혹하다. 장애인에 대한 관점도 여성이나 성소수자에 대한 관점도 그렇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틀렸다'라고 말한다. 불편하면 일단 배제해 버린다. 노 키즈 상영관이 그랬고 난민 문제도 그랬다. 초등학교의 장애아동 통합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장애아동이 함께 있는 교실은 학생, 학부모, 선생님까지 모두 선호하지 않는다. 민원을 걱정하고 장애 아동으로 인해 비장애 아동이 받을 피해만 걱정한다. 장애아동은 걱정의 대상이 아니다.
내가 EBS 제작진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제작진은 펭수의 특성에 대해 당당하게 사람들에게 알리고 설명한다고 생각했다. 찐이를 데리고 당당히 밖에 나가고 찐이를 바라보는 시선 앞에 당당해 지기 위해 애썼다.
생각해보니 그들은 당당했던 게 아니었다. 펭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기에, 당당해 지려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펭수가 창피하지도 이상하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펭수는 당연했다.
난 소리 지르는 찐이가 부끄러웠다. 숨이 넘어갈 듯 웃으며 자리에 주저앉는 찐이가 이상해 보였다. 다른 사람이 이상하게 볼까 봐 무섭고 두려웠다.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부정하며 당당하려고 무던히 애쓰고 노력했다. 당당하려 애썼다는 건 찐이를 부끄러워했다는 증거다. 찐이가 당연했다면 난 당당하려 애쓸 필요가 없었다.
장애를 하나의 특성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회를 보고싶다. 장애를 이상하게 바라보고 비정상으로 취급하는 시선이 줄어들길 바란다. 그래서 장애인도 장애인의 가족도 당당해지려 애쓸 필요가 없는 세상을 꿈꾼다. 난 이제 더 이상 찐이의 장애 앞에서 당당하려 애쓰지 않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