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를 참으려 애쓰지 않기
1. 짜증과 화의 원인은 <나>, 더 정확히 <내 욕구>에 있다는 것을 안다.
'00 때문에 짜증 나 죽겠네.'
내 입에 찰싹 붙어 있는 말이다. 하지만 짜증의 원인은 나에게 있다. 화를 내고 싶은 타이밍에 누군가가 나를 툭 건드렸을 뿐이다. 아침에도 아이가 날 화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마셜 B. 로젠버그는 그의 책 <비폭력 대화>에서 화와 짜증의 원인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말한다. '상대방이 약속 시간에 1시간 늦었기 때문에 짜증이 났다.' 만약 이 문장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같은 짜증이 나야 한다. 그러나 '상대방이 늦은 덕분에' 평소에 보고 싶었던 <블랙 미러>를 볼 수 있었다면, 화가 나지 않았을 거다.
자! 그렇다면 짜증은 과연 누구 탓인가? 늦은 사람인가? 아니면 <나>인가?
마음속에는 짜증, 화, 분노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담는 그릇이 있다. 이 그릇은 사람에 따라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다. 그 그릇이 넘치면 짜증과 화가 외부로 분출된다. 넘치는 순간 나와 마주친 어떤 누군가에게 내 화와 짜증의 책임을 넘길 필요가 있을까?
2. 내가 화, 짜증이 났음을 알아차린다.
아주 잠시라도 화를 지켜보자. 내 가슴이나 명치끝, 목구멍에 있는 화를 형상화해본다. 연기 모양도 좋고 구슬 모양도 좋다. 아주 잠시라도 바라보면 된다. 바라보는 데 성공했다면 <화>가 <나>와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화>는 감정일 뿐 그 감정은 <나>와 동일한 존재가 아니다.
흘려보낸다. 연기로 형상화했다면 내 머리 위로, 손 끝으로, 몸 밖으로 연기가 빠져나가는 상상을 해본다. 명치끝에 걸려있는 구슬이라 속이 답답했다면 아래로 내려가 소화되는 상상을 해보자.
처음에는 잘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아주 조금이라도 화가 내 몸 밖으로 흘러나가는 것을 느꼈다면 계속 연습해보자. 꽤 효과가 좋다.
3. 평소에 마음 챙김 명상을 한다.
알아차림은 마음에 짜증이 '욱'하고 올라오는 순간, 그 감정을 바라보는 것이다.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로 유명한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은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고 했다. 알아차림이 습관이 되면 몸이 반응하기 전 내 감정을 알아차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 공간이 커진다.
여유 공간을 넓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음 챙김 명상을 해보는 것이다. 명상이라고 하면 가부좌를 틀고 숲의 나무 밑이나 폭포 아래에 앉아 있는 모습을 떠올리지만 그렇지 않다. 머리를 깎을 필요도 산속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다. 식탁도 괜찮고 점심시간의 사무실도 괜찮다.
명상 앱을 다운로드하거나 유튜브에 마음 챙김 명상이라 검색해보자. 그리고 당장 시작해보자. 내 호흡을 바라보고, 내 몸을 바라보고, 내 감정을 바라본다. 하루에 5분만 투자하면 과거나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로 돌아오는 경험을 해 볼 수 있다. 현재로 돌아오는 순간 화는 과거의 것이 돼버린다.
<알아차림>은 지금 이 순간 내 감정을 바라보는 것이다. 과거 혹은 미래에 집착했던 '나'를 현재로 데려온다. <반성>은 일이 벌어진 후,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내가 했던 행동을 바라보는 것이다. 내가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든 것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 발 떨어져 생각해본다. <알아차림>과 <반성>을 반복하며 화가 조금씩 사라져 감을 느낀다.
화는 참고 견디고 이겨내고 없애버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화는 하나의 감정일 뿐이다. 생겨난 화를 참고 견디려 애쓰다 보면 쌓이고 쌓여 언젠가는 분출한다.
화를 이겨낸다? 화를 어떻게 이길 수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기는 방법은 찾지 못하겠다. 아니, 화를 이긴다는 그 의미를 도저히 알 수 없다. 굴복시켜 없애버린다는 뜻인가? 화는 감정이다. 감정은 느낌이며 내가 죽지 않는 이상 없애버릴 수 없다. 화를 없앤다는 뜻은 사랑, 쾌락 따위를 없앤다는 뜻과 같다.
화는 흘려보내야 한다. 화를 억누르려 애쓸 필요도, 없애려 애쓸 필요도 없다. 감정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하다. 화가 났음을 알아차리고 흘려보낸다. 만약 그러지 못하고 분출했다면 반성해본다. 그리고 마음 챙김 명상을 하며 자극과 반응 사이의 공간을 조금씩 넓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