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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Mar 15. 2022

고통은 있지만 고통을 느끼는 나는 없다.

(p98) 만일 당신이 ‘생각하는 자'를 발견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생각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자'라고 믿고 있는 실체가 사실은 현재 생각의 흐름 그 자체일 뿐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p99) 당신이 지금 ‘나'라고 부르는 그 느낌을 간직한 채로, 그 ‘느낌'을 ‘느끼고 있는' ‘느끼는 자'를 찾아낼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 ‘느끼는 자'를 ‘느낄'수 있겠는가? 이 경우에도, 그것은 더 이상 ‘느끼는 자'가 아니라 또 다른 ‘느낌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생각하는 자가 그 생각과 하나이고, 맛보는 자가 그 맛과 하나이듯, 느끼는 자도 그 느낌 이외의 다른 무엇이 아니다. 현재의 느낌과 분리된 ‘느끼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

켄 윌버, <무경계>, 정신세계사


'나'는 무엇인가? '나'는 존재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로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내가 '나'라고 믿었던 것들은 모두 다 환상일 뿐이다. 그저 우리의 관념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나'라고 믿었던 것은 무엇인가? 몸, 성격, 학력, 연봉, 지향하는 바, 정치 성향... 이 모든 것들을 '나'라고 믿고, 누가 넌 누구냐고 물어보면 이러저러하다 대답했지만, 이 모든 것은 환상이었다. 그 무엇도 '나'는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없으니까.

왜? 도대체 왜 '나'가 없다는 건가? 이렇게 느껴지는 데 말이다. 지금 키보드를 치고 있는 '나'가 있다. '나'가 없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나'가 있다. 어떻게 '나'가 없을 수 있는가?

켄 윌버는 그렇다면 '나'를 찾아보라고 한다. 그래 한 번 찾아보자.

무언가를 '본다'는 말을 보통 이렇게 이해한다. '보는 자'가 '보는 대상'에 대해 '본다는 행위'를 하는 것. 나는 지금 맥북 화면을 보고 있다. 보는 대상은 맥북 화면이고 보는 행위가 있다. 그렇다면 '보는 자'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있냐니? 미쳤나? 여기 있지 않나.

자. 그렇다면 '보는 자'를 볼 수 있는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라고? 그게 '나'인가? 그건 보는 대상이다. 거울에 비친 나는 나를 보고 있는가? 이 세상에 '나'가 유일무이하다면 둘 중 하나는 거짓이다. 무엇이 거짓인가? 나는 나를 볼 수 없다. 거울에 비친 나는 거울에 비친 나지 '나'는 아니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내가 생각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존재가 있을 터인데, 그 존재를 느낄 수 없다.

왜 '나'를 느낄 수 없을까? 없으니까. '나'는 생각 그 자체니까. '나'는 없다. '나'와 아닌 것의 경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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