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할 시간이 없는 삶
내 아이는 나 처럼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녀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부모의 오만함이 묻어있는 문장일 수도 있습니다. 자녀는 당연히 부모와 다른 삶을 살게 되겠죠. 부모가 어떤 짓을 하더라도 말이죠. 스스로 생각하는 부모와는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는 다른 삶을 살길 바란다고 말하는 이유는 나와 유사한 환경에 놓아두길 원하지 않기 때문인 듯합니다.
제가 어떻게 살았길래 이토록 아이는 나와는 다른 삶을 살길 바라는 걸까요?
내 존재에 대한 고민을 40이 가까워져서야 했습니다. '존재에 대한 고민'이라고 하니 조금 거창해지고 으쓱해지기도 하지만 풀어보면 이런 것 같아요.
내가 왜 사는지, 내가 좋아하는 건 뭔지, 지금 내 기분은 어떤지, 이 기분을 좋게 만들고 싶은지, 좋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것을 왜 하고 싶은지......
이런 고민이죠. 간단한 듯하면서도 생각해 보면 간단하지 않은 그런 문제. 내가 결정하면 되니까, 내 감정이니까 정답이 있을 듯하지만 정답이 없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듯해요. 나보다 빠르게 달리는 사람, 빠르게 달리려고 막 부웅붕 시동을 거는 사람, 나와 어깨를 부딪히며 비키라는 눈 빛으로 난 쳐다보는 사람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 들보다 빠르게 달리려고 최소한 너무 뒤처지지 않으려고 이따위 고민을 할 시간을 줄였습니다.
음... 어떻게 보면 고민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항상 명확한 목표가 나에게 주어졌었기 때문이죠. 교실 뒤 게시판에 붙는 시험 점수 석차를 위로 올리면 목표 달성이었죠. 고민 따위는 대학을 가서 하면 된다고 모두가 이야기했고요. 대학을 갔더니 이젠 취업을 해야 하더군요. 이 과제를 해내지 못하면 패배자가 되어버리는 듯한 분위기였습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내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줄 알았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하지 않고 잠시 멈추고 쉬어도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냥 앞으로 달려가야만 멋진 인생이고 성공한 인생을 쟁취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죠. 멈춤이 있고 순간을 감지할 수 있었야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법인데, 그걸 몰랐습니다.
자꾸 찡찡걸지만 말고, 지금 멈추면 되는 거 아니야. 멈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근데... 이젠 멈출 수가 없네요. 내 인생에 걸려있는 게 너무 많습니다. 누가 올려놨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새 짐이 내 어깨 위에 올라와 있고, 돈이라는 걸 벌지 않으면 인생이 쉽지 않아질 것 만 같은 느낌이 강하네요.
젠장. 정말 멈춰도 괜찮은데, 이걸 예전에 알았다면 잠시 달리다 멈추고, 다시 달릴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삶을 선택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요. 적어도 달리다 달리다 외부 자극에 의해 아… 젠장. 내가 왜 이러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어 달릴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는, 무엇을 위해 달리는지 모르는 상황에 처하진 않았을 듯합니다.
게다가 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멋진 존재라는 것. 그냥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빛나고 멋지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하찮은 존재라는 것. 흔히들 말하는 개나 소나 돼지나 나나 모두 같은 존재라는 것도 전혀 몰랐습니다.
왜..... 난 이런 고민을 조금 더 어렸을 때 할 수 없었을까요?
시간. 고민할 시간. 고민에 투자해도 괜찮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경쟁해야 했습니다, 친구들을 이기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했습니다. 책보다는 문제집을 풀어야 했고, 4시간 자면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대학에 가야 했습니다. 고민 따위를 할 시간은 없었네요.
내 아이에겐 이 '시간'을 주고 싶었습니다. 물론 그 시간에 그냥 게임만 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전 믿습니다. 게임을 하다 하다 지쳐 결국 존재에 대한 고민에 다다를 거라고 말이죠.
그 시간이라는 것을 현재 우리나라의 공교육 안에서 줄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올해 제천간디학교라는 대안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아이는 벌써 2달 정도 그 '시간'이라는 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아빠! 아... 죽겠어. 너무 할 게 없어. 시간이 너무 많아... ㅠㅠ"
이렇게 말한 걸로 봐선 아직 누리고 있지 못하는 듯 싶지만 언젠가는 누리지 않을까요? ㅋㅋㅋ
제천간디학교 홈페이지: http://gandhischool.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