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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Dec 29. 2023

지각에 대한 단상

지'옥'철, 10minutes 그리고 공감

지’옥’철


‘아... 뭐야… 왜 이리 사람이 많지?’


출근길. 2호선에 사람이 많다. 사람을 가득 실은 열차가 도착한다. 한 발을 열차에 걸치고 어깨로 살짝 밀어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열차 안의 사람과 눈이 마주친다. ‘제발… 타지 마…’ 나에게 눈빛을 쏘아 보낸다.

‘그래… 아직 시간 조금 남았어. 다음 열차를 타면 돼.’


다음 열차가 들어온다. 젠장. 틈이 보이지 않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 열차를 어떻게든 밀고 타볼 걸 그랬다. 이젠 선택의 여지가 없다. 열차 안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한 발을 열차 안에 걸친다. 다리에 힘을 주고 허리를 굽힌 채 어깨를 꾸욱 밀어 넣는다.


깊은 한숨으로 차가운 바람을 밀어내며 빌딩 1층에 도착한다. 8시 55분. 사무실은 애석하게도 23층. 엘리베이터만 제대로 타면 9시 전에 가까스로 도착할 수 있을 텐데… 고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4개를 주시한다. 왼쪽 첫 번째 엘리베이터가 열린다. 아마추어라면 그쪽으로 무턱대고 갔겠지만 난 다르다.


1년 출근 시간의 80%가 8시 57분~59분 사이인 나다. 엘리베이터의 흐름을 읽는 건 거의 프로라고 자부한다. 오른쪽 두 번째 엘리베이터의 숫자는 14에 걸려있지만, 출근 시간의 특성상 중간에 서지 않고 그대로 내려올 가능성이 크다. 왼쪽 엘리베이터가 사람을 가득 싣고 출발한 직후 오른쪽 엘베가 도착할 것이다. 더 적은 사람을 싣고 올라가겠지.


그래. 모든 것이 예상대로다. 왼쪽의 절반도 안 되는 인원이 탔다. 23층까지 단 5번만 멈추고 도달한다. 출근 시간이라는 걸 감안했을 때 23층까지 5번만 멈추고 간다는 건 매우 성공적이다.


엘리베이터의 전자시계가 58분에서 59분으로 바뀐다. 아직 다섯 층이 남았다. 두피에서 솟아오른 땀이 방울져 볼을 타고 흐른다. 백팩을 미리 벗어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는 달라질 리 없는 핸드폰의 시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9시 00분 10초. 사무실에 들어간다.


‘어휴… 이 정도면 세이프야. 정말 고생 많았다.’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 팀에서 이 정도는 완벽한 지각이다. 바로 ‘10minutes’ 때문이다.



10minutes


나와 같은 세대라면 이효리가 떠오를 테지만 ‘10minutes'는 우리 팀에서 매일 하는 미팅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___________.

뒤에 들어갈 말은?


'10minutes'룰 보자마자, 이효리가 떠올랐다면

이 질문엔 아마도


'다 사랑스러워'


이렇게 읊조렸을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10mimutes’는 미팅 이름이다. 2023년 초, 팀장의 아이디어로 시작한 이 미팅은 스타트업에서 하는 ‘데일리 스크럼’을 흉내 낸 것 같은데, 도대체 정체를 모르겠다.

스크럼을 처음 접한 건 장류진의 단편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다.


“합시다. 스크럼”
오전 아홉 시. 대표가 가장 좋아하는 스크럼 시간이다. 스크럼이란 이천 년 대 초반부터 미국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시작된 애자일 방법론의 필수 요소로, 우리 회사 같은 소규모 스타트업에서 널리 쓰이는 프로젝트 관리기법이다. 데일리 스크럼의 대원칙은 이렇다. 매일, 약속된 시간에, 선 채로, 짧게, 어제는 무슨 일을 했는지 그리고 오늘은 무슨 일을 할 것인지 각자 이야기하고, 이를 바탕으로 마지막에 스크럼 마스터가 전체적인 진행 상황을 점검하는 것. 서로의 작업 상황을 최소 단위로 공유하면서 일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함이다. 애자일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스크럼이라면 이 모든 과정이 길어도 십오 분 이내로 끝나야 했다. 하지만 우리 대표는 스크럼을 아침 조회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심히 문제였다 직원들이 십 분 이내로 스크럼을 마쳐도 마지막에 대표가 이십 분 이상 떠들어대는 바람에 매일 삼십 분이 넘는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은 마치 나와 같은 팀인 것처럼 정확히 우리 팀의 상황을 묘사했다.


제대로 된 스크럼은 해 본 적도 없고, 애자일 방법론에 대해서도 잘 모르지만 이건 알고 있다. 스크럼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서로 협업해야 하는 프로젝트, 그러니까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개발한다던가 새롭게 출시될 상품에 대한 다각도의 온-오프 마케팅이 이루어진다든가 하는 협업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팀은 내가 아는 한 업무를 나눠서 할 뿐, 협업이 이루어지는 일은 단 하나도 없다.


일을 나눠서 하는 것을 협업이라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A는 마케팅 성과를 분석하는 일을 하고, B는 중장기 전략을 세운다. C는 고객사와의 계약서를 검토하고 수정하는 일을 하고 D는 판촉품을 고르고 구매한다. 이건 협업이 아니라 일을 나눠서 하는 것이다.


협업이란 공동작업을 말한다. A가 하는 일이 B에 영향을 미치고, B가 하는 일이 완료된 후 C의 업무가 진행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경우 데일리 스크럼은 효과적일 수 있다. 서로 일의 진행 상황과 앞으로의 일을 공유하여 겹치지 않게 조정한다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이니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애자일 방법론 중 하나인 데일리 스크럼을 흉내 낸 우리의 ‘10minutes’가 제대로 작동할 리 없다. ‘나 이만큼 일하고 있어요!’. ‘나 오늘 할 일도 많고 열심히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팀장에게 일을 검사 맡는 미팅이 되어 버렸다.


아! 그리고 또 하나 엄청난 기능이 있으니, 바로 지각 탐지 기능이다. 매일 9시 정각에 실시하기 때문에 1초만 늦어도 티가 확 난다. 나에겐 최악의 미팅이다.



지각과 공감


이 대목에서


‘아… 참 게으르네, 아침에 10분만 일찍 나오면 되잖아! 그게 그렇게 어렵나?’


이렇게 생각한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30여 년간 1만 2천여 명의 속마음을 듣고 나누었던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은 그의 책 『당신이 옳다』에서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의 다른 말은 바른말이며 대부분의 사람은 바른말에 상처받는다, 고 말한다.

충조평판만 안 할 수 있어도 공감의 절반은 시작된 것이다. 공감을 시작하게 되면 누구나 각자의 사정이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부모가 보기에 쓸데없이 게임만 하며 시간을 축내는 것으로 보이는 자녀에게도 분명히 사정이 있다.


내 지각도 마찬가지다. 2023년, 난 총 4번 지각했다. 굳이 말하자면 한 10~30초 정도씩 늦었다. 이 사실만 가지고 ‘근태가 엉망이고 나태한 사람’이라 쉽게 판단한다면 아직 누군가를 공감하기엔 부족할 지도 모르겠다.

성과 평가를 위한 면담에서 팀장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무 타이트하게 출근하고, 가끔 지각도 하는 것에 누군가는 굉장히 안 좋게 볼 수도 있어요.”

이 지적에 이렇게 답했다.

“회사 안에서 지각을 생각하면 평판을 갉아먹는 꽤 중요한 일일 수 있겠지만, 제 인생을 놓고 봤을 때 지각은 작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침에 아이들을 챙기는 시간은 제 인생에서 지각보다 훨씬 소중하고, 그로 인해 회사 내 제 평판이 떨어진다면 이는 제가 감내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아침에 자녀의 등교를 챙긴다. 둘째는 지적장애를 앓고 있으니, 손이 더 많이 갈 수밖에 없다. 대체로 아침은 잘 흘러가지만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늦을 수 있다.


틀어짐 없이 잘 흘러가서 제시간에 나온다고 하더라도 지하철과 엘리베이터가 동시에 꼬이는 상황이 발생하면 지각이다. 학교에서는 8시 40분 전 등교는 지양해 달라는 문자를 날려오니 어쩔 수 없다. 최대한 맞춰야지 뭐.


2023년 4번의 지각에 대해 핑계를 대본다. 지’옥’철도 지각도 힘들지만 그보다 더 힘든 건 나에게 날리는 섣부른 충조평판이다. 조금은 어이없을 수 있는 두 개의 결론으로 글을 마쳐본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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