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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Sep 24. 2024

나는 지치지 않는 사람이다.

경순 씨는 요새 통 숙면을 취할 수가 없다.


치매에 걸린 노모 때문이다. 새벽에 훔쳐간 핸드폰, 리모컨을 내놓으라며 소리를 지르고,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 밤새 3~4번씩 화장실에 가시니 신경이 항상 거실에 쏠릴 수밖에 없다.

다가올 방학도 걱정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장애인 손자를 돌봐주고 있는데, 방학을 하게 되면 하루종일 돌봐야 하기 때문이다.

퇴직한 남편, 아직 독립하지 않은 딸, 치매 걸린 노모, 장애인 손자까지 아침, 점심, 저녁 모두 해줘야 한다. 자진해서 설거지나 청소를 하는 사람은 없다. 하나하나 다 시켜야 하는데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게 더 짜증 난다.

그나마 장애인 손자가 노모를 무서워하지 않고 곁에 잘 있어 다행이다. 한 번은 노모가 손자에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 황급히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간 적도 있다. 그런데도 아이가 항상 왕할머니를 보고 싶다고 하고 안부를 묻고 안아주는 모습을 보면 힘이 난다. 가끔 손자가 엉뚱한 행동이나 질문을 해서 웃음꽃이 핀다. 잠시나마 현실을 잊는다.

이런 경순 씨에게 머리 아프고 가슴이 답답한 일이 하나 더 생겨버렸다. 약 20년간 잠잠했던 딸의 뇌종양이 커졌다. 딸아이는 이제 수술로도 제거할 수 없는 뇌종양을 머리에 담고 살아야 한다.

치매 노모에 장애인 손자, 여기에 불치병에 걸린 딸까지. 신이시여, 왜 저에게만 이러십니까?라고 울며 외쳐도 모자라지만 경순 씨는 조용히 다짐한다. 난 지치지 않는 사람이라고. 내가 쓰러지면 우리 집은 무너진다고. 원래 그랬다고.



엄마와 함께 부모 교육을 들은 적이 있다.


교육 중 한 꼭지가 “나는 ㅇㅇㅇ 사람이다.” 의 ㅇㅇㅇ 을 채우는 것이었다. 엄마는 이렇게 빈칸을 채웠다.

엄마가 채운 빈칸을 보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신을 지치지 않는 사람이라 다짐하고 또 다짐해야 살아나갈 수 있는 그런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엄마, 지치면서 살아도 돼. 지치는 건 너무 자연스럽잖아. 인간이라면... 언젠가는 지치기 마련이거든. 지쳤다고 말할 수 있는 건 행복한 일인 것 같아. 지쳤다고 말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조금 슬프기도 하고.

엄마에게 지칠 자유도 주어지지 않은 것 같아 너무 슬퍼. 엄마에게 약해질 기회도 주지 않는 이 세상이, 이 상황이 너무 속상하다.

그리고 미안해. 나는 엄마 덕분에 지칠 수 있고, 엄마 덕분에 어리광도 부릴 수 있는 데, 정작 엄마는 지치지 않는 사람이어야만 하니까 말이야.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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